1 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일등을 뽑지 않으면 된다. 기호 1 번. 한나라당. 화이팅.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어서 재료가 뭐뭐 있나 생각해 보니,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단순한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시금치 파스타. 당근과 양파와 후추콩, 메주콩, 고추, 올리브로 눙근히 야채 육수를 만들어 놓고, 마늘을 다져서 달군 팬에 올리브 오일과 함께 볶은 다음, 삶은 면을 올려서 소금 약간과 휘휘 섞어 주다가 시금치 큼직하게 썰은 것은 털어넣고, 마지막에 불 끄기 전에 육수를 네 국자, 올리브 오일 조금 더, 이렇게 충분히 부어서 다시 휘휘 섞어주고 끝. 맛은, 상상이상이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요리를 완성할 때의 기쁨은 대단하다. 나만의 시금치 파스타 레시피 완성.
맛있게 먹었습니다.
+ note 일단은 콩을 넣어 끓인 야채 육수와 시금치의 향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알고 싶어서 그냥 만들었는데, 다음에 다시 만들때에는 화이트 와인을 조금 사용해 봐야겠다.

솔직히, 너들 하는 짓 보면, 어디 원사 쯤 되는 놈이 조사지역 지나가다가 '북한 문구가 씌여진' 쇳조가리 하나 'ooops!'하고 흘리고선 표표히 사라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실적 올리려고 용의자 변기에 마약봉지 쳐 넣고는 그거 찾았다고 구속해 버리는 나쁜형사 처럼 말이지. 믿음이 안가.
자주 찾는 서점에 들렸다가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책이 눈에 띄어 구입했다. 두 권짜리로 이루어진,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작품이다. 아직 완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에게 '비전향 장기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보는 것 같다. 책 내용중에 출소한 주인공에게 형사가 찾아와 '남한이 좋습니까. 북한이 좋습니까'라고 재차 질문하는 부분이 있다. 이 질문은 사상과 신념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단순히 장소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로 축소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공산주의가 좋으면 공산국가로 가지, 왜 여기서 살고 있느냐?'는 것. 이러한 사회적인 한계는 출근길에 읽으려고 처음 들고 나온 오늘 제대로 느꼈는데, 손에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으려니, 책을 한 번 보고는 슬쩍 놀란 눈길로, 그러나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내 얼굴을 흘끔 거리는 시선들을 느꼈다. 그 순간 '아 이거 아직도 신념과 사상의 자유는 보편적으로 용인받지 못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좌파척결'이라는 말이 떳떳하게 통용되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신념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꿈. 꿈이다. 꿈만 같다.
영화 속에서 문경(김상경)은 꿈을 꾼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이 그대로다. 그는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밤과 낮>에서 하숙집 주인 장선생(기주봉)은 성남(김영호)에게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하하>에서 통영 향토 역사관 관장, 그러니까 역시 똑같은 배우가 연기한 장관장은 문경(김상경)에게 공식 영정이 아닌 '좀 더 토속적으로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영정 그림을 보며 아주 닮았다고 말한다. (배우 기주봉 씨는 여전히 안내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중이다.) 그러니까, 문경은 이 모든 것들을 경유해서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들은 <밤과낮>을 지나고 <하하하>에 이르러서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 될법한 성남이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수염이며 갑옷이며 재연이라고 하기엔, 꿈이라 하기에도 너무 조악하다. 이 모든 것이 장난 같다. 그래도 문경은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며 눈물을 쏟는다. 문경은 이순신 장군에게 '좋은 것만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꿈에서 깨자마자 꿈속에서 들은 말 들을 적으려고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말 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겪고 들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시도 적기 시작한다. 이순신장군은 꿈속에서 연습 삼아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쓸 것을 제안한다. 그러니 문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알아채고 있는 것 보다 더 많다. 여하튼, 나는 일요일 치고는 일찍 일어난 아침에 이 글을 적고 있다. 꿈속의 이순신 때문은 아니다.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어제 보았던 영화 <하하하>에 단단하게 눌러 붙어있는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같은 옷만 주구장창 입고 나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극장전>의 경수가 입고 다니던 오리털 패딩 점퍼는 홍상수 감독의 옷이라고 한다. 하루, 또는 대략 일주일 내의 사건만을 다루는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옷차림이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인물이 한 가지 옷만 입는다고 해서 크게 거슬릴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하하하>에서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때 거슬린다고 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꾸 눈길을 끌어서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배경이 여름이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하루 입은 속옷이며 티셔츠며 양말을 모조리 빨래통으로 던져 넣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 속 통영은 비도 자주내리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분명히 땀도 많이 흘리고 눅눅해 졌을 그 티셔츠를 보게 될 때마다, 마치 <극장전>의 남산타워처럼 굳이 보려들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처럼 보였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아주 뻔뻔하게 일상성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마치 문경의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나뭇잎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해 습관처럼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질문을 생각하고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그냥 나뭇잎 일진데, 굳이 '이것이 무엇'이냐며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것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혹스럽다.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 일으키는 균열의 족적 같은 것이 홍상수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일상성은, 비일상성으로 연결되는 통로, 혹은 표지판 같은 것이다. 여하튼, 급기야 영화 중반쯤 넘어서자 티셔츠의 제대로 펴지지 않은 깃에 자꾸 눈길이 가면서 영화 속 시간대로라면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날법한, 눅진하고 두터운 홀애비 냄새가 아주 정직하고 실체적으로 코끝에서 맴돌 정도였다. 분명히 문경은 중간에 흰색 셔츠나 집에서 입는 티셔츠로 갈아입지만, 그냥 잠간 벗어놓고 빨지 않은 채로 다시 입었을 것처럼 보이는 후줄근한 주홍색 셔츠는 상큼한 여름 그 자체 같은 왕성옥(문소리)의 종아리와 짧은 머리와는 반대지점에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무언가 고여 있다. 무언가 변하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끈질기게 고여 들고 있다' 는 이상하고 낯선, 그러나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감각.
여행을 떠나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선배 성우와 함께 청평사를 찾아간다. 선착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서 두 남자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문은 문이되, 들어설 수 없는 문인 회전문 전설을 이야기하던 두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 나온다. <하하하>에서 주인공 문경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 영화평론가인 선배 중식(유준상)과 청계산에 오른다. 이 과정은 올라가는 뒷모습과 내려오는 앞모습의 두 장의 스틸 컷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두 남자는 청계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은 것 같다. 청계산 기슭 어디쯤에서 막걸리로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여행은 극점에서 극점으로 연결되는 운동이 아니라 대략 언저리 어디쯤에서 잠간 고였다가 다시 떠나가는,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이동, 단순하고 기능적인 자리바꿈이다. 이들은 여행지에서까지 떠나온 곳과 다를 것 없는, 어디에나 있는 공간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들어간다. 가령, 술집과 식당, 여관, 모텔 같은, 위상학적 지표, 지역적 특성들이 모조리 지워진 지점들을 전전한다. 이들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날 수 만 있다면 정체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는다. 정호(김강우)의 말처럼 삶에서 삶이라는 '이름'을 걷어낼 때,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닥뜨리는 것 같다.
나는 <하하하>를 보면서 여간해서 웃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는 흑백의 스틸사진 속에 고여 있고, 과거는 생동하는 이미지들로 보여진다. 그리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자'고 다짐하고 시작하는데, 이 말은 꼭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 같다. 고인(의 시간)을 모독하면 안 된다. 지나간 시간을 좋게 기억하자. '좋은 것만 보자'는 다짐은 좋은 대상만 보자는 것 보다는 좋은 '태도'로 보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라도, 지나간 삶을 긍정해야만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어렴풋한 다짐은 <극장전>에서 동수가 '생각을 하자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마지막 말과 겹쳐진다. 오로지 남겨지는 것, 기억 속에(서라도)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은 과거일 뿐인데,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는 고여 있고, 정지된 채로 남겨졌거나, 죽어있다. <하하하>는 죽어있는 (자들의) 이미지와 목소리로 회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객석의 누군가 발을 구르며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자신의 발밑에 정말로 단단한 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고 구르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좌석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정말은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냐, 동물이냐.
문경의 어머니는 그에게 '영생아파트'의 열쇠를 건네준다. 과연 어떤 건축업자가 이렇게 괴이쩍은 이름의 아파트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문경은 그 아파트가 꼭 '동굴'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애초에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의 죽음에서 출발해서 계속 한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삶을 향해 계속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영생과 비슷하다. 계속 되는 삶. 계속 해서 같은 것들만 반복되는 삶. 더 이상 선택 할 수 없이, 집도 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삶.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 그러니까 영화의 화자가 되는 인물들은 집이 있음에도 바깥으로 떠돌거나, 거의 묘사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집에 들어가기 너무 싫어' 하는 인물들 같다. <생활의 발견>을 두고 집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러니까, 집이라는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욕망하는 경수의 여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하하> 역시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은 타인의 집(앞)에서 집(앞)으로 전전한다. 이 모든 문들은 단단히 닫혀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가랑이를 벌려준다. 그러나 남자가 원하는 대로 곧이 받아주지는 않는다. '재미 보았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젊으니까, 남자니까, 니들도 그러잖아'라며 당당히 면박을 주고 떠나간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향해, 그러니까 자궁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하지만, 여자들이 열어주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그저 아랫도리 일 뿐이다. '생각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극장전>의 동수는 어쩌면 이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식이 큰아버지 앞에서 개처럼 절규했을 때, 그러니까 '이 여자라면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집은, 어머니는,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때, 남자는 동물이 아닌,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꼭 문경의 아버지로 한정지우지 않더라도, 남자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여자를 자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냐, 동물이냐. 는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지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아주 오래된 결심을 다시 떠올려 볼 때, 그나마 괴물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진데, 그렇다면 동물은 괴물이 아닌가? 문경은 어머니가 '하는 것 봐서' 줄 수도 있었던 집을 '동굴 같다'며 거부함으로써, 동물이 되기를 거부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동굴 같은 집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호는 이 동굴 같은 집에서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나고) 사람이 되어서 종국에는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하하하>에서 문경은 어떠한 사람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배우 김상경이 등장한 <극장전>, <생활의 발견>에서도 거의 유사하다. 어린애처럼 대책 없는 덩치 커다란 이 남자의 속내는 겹겹이 가려져 있거나 쉽게 오인된다. 반면, 중식의 현재 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그려진다. 그는 어찌 보면 <밤과낮>의 성남처럼 보인다. 그는 기혼남이고, 아내 몰래 만나는 애인이 있다. 그는 항상 웃지만, 우울증이 심해서 약을 복용한다. 문경의 웃음은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순간 제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무엇 같다. 자신이 굳이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사람처럼 보인다. 서울을 떠나온 이들이 머물고 있는 통영은 마치 이들이 천천히 흘러서 결국엔 고여 버린 장소 같다. 문경이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려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시켜주지 않아' 교수직에서 짤렸고, 영화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금치산자에 가깝다. 어쩌면 더 이상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문경이 정말로 캐나다로 떠났는지 확인 할 수 없다. 두 남자는 영화의 제목처럼 하하하! 하는 호쾌한 웃음을 던지며 퇴장한다. 또는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행복한지 우울한지 우리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건 거의 위협에 가까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도출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반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삶은 계속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가, 우리는 흘러서 또 다른 곳에서 고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홍상수가 점점 체념 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마도, 죽음이 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때, 홍상수의 영화에서 또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씨네 21 의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마치 꼬장꼬장한 아주머니가 음식점에서 웨이터에게 '점장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면 평론이란 무엇일까. 그냥 무조건 딴지를 걸고 들어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영화를 평론한다는 것은 내가 영화와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에 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나 말고도 불만을 말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 굳이 남들 하는 짓을 따라하는 것에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시리어스 맨>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계
그럼에도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
조금 뒤늦은 첨언이지만, 지지반박 코너는 영화자체에 대해서 지지 하거나, 그러니까 동감하거나, 동감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이유를 밝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영화(자체)에 대한 지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잘 알지 못하겠다.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하겠다.) 그냥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지가 있을 뿐, 영화 자체에 대한 지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과연 지지하는 행위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미리 말을 해두고 넘어가자. 이 글은 영화 <시리어스 맨> 자체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박영석 에디터의 글에 대한 '이견'이면서 동시에 조금 다른 방향에서의 지지가 될 것 이라는 예감, 그러니까 일종의 측면 지원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애초에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으로 지지반박을 이끌어내 보자고 이야기가 된 시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어떤 형식으로든 '흠집'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동감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두고 지지반박을 감행하는 것은, 지지하고 반박한다는 행위 자체가 영화를 사이에 놓고 '싸우는'것이 아니라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반박이라는 행위는 영화의 속살을 조금 벌려보는 것이다. 이건 아주 미미하지만 분명히 에로틱하고 직접적인 연애 행위다. 서로의 시각에서, 각자의 방법론으로 '슬쩍' 벌려보는 행위는 그러나 해부행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해부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조망'을 밝혀내고 기록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이러한 2 차적인 독법의 드러냄을 통한 겹쳐보기는 분명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아가 영화 그 자체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을 잊지 말자는 다짐.
불안, 끊임없는 불안.
<시리어스 맨>은 정체를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영화다. 박영석 에디터는 "'본질'의 본질은 규명되지 않음에 있으며", "차라리 진지한 사람보다는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더 좋다"라고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나는 조금 다르게 이 영화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근원적 불안에 대한 '시리어스'한 이야기, 혹은 불안에 대한 증명이다. 영화의 조금 뒤쪽에서부터 이야기하자. 성인식을 마친 대니가 랍비 마샤크에게 다가가는 실내 장면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대니의 시점으로 실내의 여러 가지를 둘러본다. 온갖 책들과 액자들, 포르말린에 담겨있는 정체불명의 표본들, 지구본, 장식물들 사이에서 카라바지오Caravagio의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1601-1602)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의 모티브가 된 에피소드의 내용은 이러하다.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딜레마에 빠진다. 이삭은 야훼와의 약속의 열매였다. 그런데 야훼는 이 열매를 ‘파기’하거나 되돌려 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야훼는 십계명의 제 6 계명을 정면으로 부정할 것을, 즉 존속살해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아들의 생명을 지키면 야훼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면 아들은 생명을 잃는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해피엔딩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명하고, 이삭도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의 덕목은 창조주에 대한 순종이다.
래리가 직면하는 근원적 불안의 순간들은 영화 <시리어스 맨>을 불가해한 현실의 그림자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주인공 래리와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래리는 아브라함처럼 신의 음성을 들은 적도, 불타는 나무를 본 적도 없다. 래리의 세계에서 게시와 말씀은 희미한 흔적으로 존재한다. 적어도 구약의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불안의 기원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신의 음성이 내리는 명령을 들었고, 복종을 맹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의 진의를 아브라함은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을 넘어선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은, 래리에게는 고스란히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를 두고 구약의 욥기를 떠 올리지만, 굳이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아브라함의 에피소드에 더 가깝다. (물론 매일 화농을 짜내야 하는 래리의 동생 아서를 보면, 온 몸에 종기가 돋은 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유태인인 래리는 그다지 신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래리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계시는 존재한다. 래리는 TV 안테나의 방향을 잡기위해 지붕에 올라선다. 지붕위의 TV 안테나는 우리시대의 불타는 나무다. 래리가 안테나에 손을 대는 순간 기계인 TV 만이 수신할 수 있는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도 들어온다. 래리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발가벗은 이웃집 여인을 훔쳐보던 래리는 정신을 잃고 지붕위에서 추락한다. 그 순간, 래리는 계시의 순간을 경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시리어스 맨>은 믿음과 계시가 부재하는 시대의 자화상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불안의 징후들을, 이 모든 명징한 계시들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들을 껴안고 살아가야만 할 것을 강요받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몇 가지 명제들
첫 번째 명제. '대니는 래리의 아들이다.' 영화의 앞쪽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이 영화의 앞부분을 잘못 이해했다. 래리와 대니를 동일 인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대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래리의 플래시백으로 이해했다. 래리가 병원에서 오른쪽 귀를 검사 받는 원인으로 어릴 적(대니)의 우측으로 ‘편향된’ 음악 감상 버릇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라디오와 이어폰은 마치 보청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엉뚱한 오인은 곧 깨어진다. 학교와 직장에서 돌아오는 두 인물이 같은 공간에 등장하는 장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오인’(miss-understand 혹은 miss-matching)은 이 영화의 어떤 규칙 같은 것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무의미 하더라도 서로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이 느슨하게 얽히게 되는 현상. 바로 우연(coincidence 혹은 co-incidence)이다. 우연은 예측과 제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래리가 의사에게 귀를 보여주는 것과 대니가 음악을 오른쪽으로만 듣는 것, 래리가 성적표를 고쳐 쓰는 것과 대니의 학교를 향해 몰려오는 토네이도, 래리의 접촉사고와 싸이 에이블만의 죽음, 이러한 행위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혼을 종용하는 아내와 연인관계라는 싸이 에이블만은 그다지 달콤한 연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트로의 시대를 알 수 없는 에피소드와 래리의 가족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한 자리에 놓여 질 때, 그러니까 예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어떤 것들이 한 자리에 놓여 질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래리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I'm not done anything!' 고 절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구약의 희생양보다도 더 무구하다. 우리는 래리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당신의 문제' 라고 말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직장인, 평범한 가장의 아버지, 원칙이 또렷한 학교의 선생님, 가장 평균적인 미국인이다. 잠간, 미국인이라고? 그리고 어쨌든, 두 번째 명제. 래리는 유태계 미국인이다.
다시 영화의 끝 부분을 보자. 금전적인 압박에 몰린 래리는 한국 학생 클라이브가 놓아둔 것으로 생각되는 돈 봉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낙제점수인 클라이브의 F를 C로 고친다. 곧이어 C에 마이너스를 더한다. C 학점이나 C- 학점이나 학점을 고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클라이브가 봉투를 놓아두었다. 또는 놓아두지 않았다. 클라이브가 낙제한다. 낙제하지 않는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유니크한 조합들이 존재할 수 있다. 클라이브는 봉투를 놓아두지 않았지만 래리는 성적을 조작한다. 클라이브가 봉투를 놓았고, 그에 대한 답례로 래리는 성적을 조작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렇다면 이 조합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건과 사건 사이, 동인과 동인 사이의 연결고리는 아주 느슨하게 묘사된다. 클라이브가 처음 등장했던 장면을 기억해 보자. 그는 교과서를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둔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래리가 들어오라고 하자 마치 쟁반을 들 듯 허리 높이에 양 손을 사용해 교과서를 든 채로 엉거주춤 들어와 앉는다. 방을 떠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를 옮기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이러한 클라이브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브의 행동은 보는 이의 주의를 끌 정도로 이상하고 어색하다. 말하자면, 클라이브는 텅 빈 기호이다. 우리는 클라이브가 돈 봉투를 놓아두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래리의 클라이브에 대한 추궁은 심증과 정황만 있을 뿐,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부재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눈으로 보았다 해도 언제나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명제.
세 번째 명제. '결과를 예측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과를 예측 할 수 없게 된다.' <시리어스 맨>에는 양자역학의 두 가지 측면이 소개된다. 영화의 앞부분에 소개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의 패러독스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고 실험이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사이가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 래리는 꿈속에서 거대한 칠판을 잔뜩 채운 수식을 통해 불확정성의 원리를 강의한다. 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세상만사를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래리의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세상만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증명도 불가능하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불확정성의 원리는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래리는 랍비들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해답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랍비의 지혜를 빌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래리가 끝까지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양자역학적 우주관에서 결과를 예측 한다는 것, 즉, 대상에 대한 관측행위는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랍비의 지혜가 래리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반드시 현재 상황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를 받아들여라
촌지를 준(것으로 추정되는) 클라이브의 아버지는 래리를 찾아와 다짜고짜 '문화적 충돌Culture Crash'을 주장한다. 주지도 않았다는 촌지의 댓가가 성적조작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래리에게 Mr. 박은 '신비 Mystery'를 받아들일 것Accept을 권고한다. 만약에 <시리어스 맨>을 성서에 대한 어떠한 우화로 본다면, 이 장면에서 Mr. 박은 창조주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messenger처럼 보인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것을, 그에 순종하는 자에게만이 창조주의 영광이 머물 것을 전하는 천사의 전언. 래리는 랍비들을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랍비들은 래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혜만을 전할 뿐이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자녀들은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어쩌면 (촌지의 불법 수수로 인해) 종신 교수직에서 탈락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빨에 새겨진 메세지며, 그저 주차장을 바라보라는 랍비의 말은 모든 복잡한 사태를 가장 단순하게 바라볼 때,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건넨 것일지도 모르지만, 래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번민들은 불만족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래리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멸, 사라지는 것, 죽는 것, 그러니까.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 또는 혼동
래리 본인이 알게 된다면, 너무나도 지겨운 일이겠지만, 이제 다시 사이 에이블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이 에이블만의 장례식에서 랍비 나트너는 신실serious하고, 착한 사람인 사이 에이블만이 왜,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죽어야disappear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애도사를 듣는 래리의 모습에 이어지는 커트는 검은 상복을 입고 흐느끼는 아내의 뒷모습이다. 아직 세상의 법으로도, 유태인 사회의 율법으로도 이혼한 부부가 아닌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이 장면은 마치 자신의 장례식에 초대된 남자를 보는 것 같다. 랍비 나트너와의 면담에서 래리는 자신이 자동차 사고가 난 순간 사이 에이블만이 사고로 죽은 사실을 두고, '신께서는 사이 에이블만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질문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난 두 개의 자동차 사고가 있었고, 정말로 죽은 것은 래리 고프닉이고 여기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을 래리 고프닉으로 착각하는 사이 에이블만이 아닐까? 이 모든 불안과 고통을 떠 안은 채로, 여기 살아 있는 나는, 그러니까 정말로는 죽은 것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직, 그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시리어스 맨>은 각각의 장면들을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통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마치 큐빅퍼즐과 같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퍼즐처럼 선과 면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영화는 아니다.) 각 장면들은 느슨한 가능성들로 조합이 되어있는데, 이 모든 단서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교묘하게 배치된, 오인하기 쉬운 장면들은 이 영화를 더더욱 미궁에 빠지게 만든다. 특히 래리가 랍비들을 방문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첫 번째 랍비를 만나는 장면은 닫혀있는 랍비 나트너의 방문을 보여주는 쇼트로 시작된다. 이 장면은 래리의 시점 숏처럼 보인다. 다음 쇼트는 기다리고 있는 래리의 모습으로 연결 된 후에, 랍비 스콧이 문을 열고 나오는 쇼트로 연결된다. 이 시퀀스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기실의 낮은 벽 프레임으로 인해 래리는 거울에 비추어진 랍비 나트너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때 갑자기 거울의 반대편, 그러니까 래리의 뒤 쪽 (그러니까 상상적으론 랍비 나트너의 공간)문이 열리며 래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랍비 스콧이 등장하는 장면은 공간의 연속성이 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랍비 스콧은 마치 거울 너머 세계에서 래리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회중시계를 든 토끼 같다. (사실 생김새도 거의 토끼에 가깝다.)
애초에 만나기를 고대했던 랍비 나트너를 만나는 시퀀스의 첫 번째 쇼트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부감 쇼트로 래리를 내려다본다. 이는 마치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어서 랍비 나트너가 래리를 바라보는 쇼트로 연결이 되는데, 이러한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랍비 나트너와 바라보는 대상과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이 시퀀스가 부감 쇼트로 랍비 나트너와 래리의 모습을 모두 담았다면 이러한 어긋남은 없을 것이다.
랍비 마샤크는 누가 만나는가
대마초를 피우고 성년식을 치룬 대니는 아버지 래리가 그렇게도 만나기를 고대했던 랍비 마샤크를 면담하게 된다. 그는 대니에게 뭔가 성년식에 걸 맞는 격언을 건네려 한다.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에'라고 말하다가 마치 자신도 그 순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몇 명의 이름을 천천히 호명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니가 라디오로 듣던 곡 'Somebody to love'를 부른 Rock Group 인 제퍼슨 에어플레인 Jefferson Airplane의 멤버들이다. 그리고 대니의 라디오를 돌려주며 착한 아이가 될 것을 주문한다. 이 장면은 클라이브가 래리의 사무실을 방문한 장면과 짝을 이룬다. 대니는 친구와 함께 교무실 서랍을 뒤졌지만 라디오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클라이브가 래리의 책상위에 봉투를 놓아둔 것을 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태인 학교의 교장 선생에서 랍비 마샤크 에게로 대니의 라디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오래된 유태인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나이많은 랍비 마샤크가 대니에게 건네는 덕담은 단순하다. 착한 아이가 되라는, 착하게 살라는 전언. 너무 단순해서 싱거울 수도, 또는 너무 단순해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니는 만족하는 것 같다. 그에게 라디오가 돌아왔고 그 안의 20 달러도 고스란히 그대로다. 모든 것이 평안한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누군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다
랍비 마샤크를 찾아간 래리가 '지금은 명상중'이라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당한 뒤 이어지는 쇼트에서 우리는 누군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을 본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랍비 마샤크와의 면담이 거부되자 거의 발광해 버릴 것 같은 래리의 모습을 본 우리는, 그 어두운 그림자의 주인공이 래리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울고 있던 것은 래리의 동생 아서이다. 그는 형이 모든 것을 가졌고, 자신에게는 신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밀러스 크로싱 Miller's Crossing>(1990)의 모자가 날아가는 숲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래리는 아서를 캐나다로 밀입국시키려고 한다. (랍비 나트너는 사이 에이블만의 장례식에서 내세, '올람 하바'가 캐나다 같은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캐나다가 '올람 하바'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미국에서 아서가 저지른 잘못에서 도피 할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래리도 그 만큼 마음의 짐을 덜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뒤 이웃집의 독일계 남자의 총이 아서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악몽-꿈속에서. 그리고 래리의 무의식 속에서, 아서는 죽는다. 래리의 혈욱 아서는 사냥 당하는 동물처럼 죽어버린다. 창백한 현실의 태양 아래에서는 절대로 말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힐 수 없었던, 존속 살해의 욕망은 꿈속에서 어쩌면 아주 어렵지만 확실하고 명확히 실행된다.
래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래리는 사이 에이블만을 죽이지 않았다. 불운한 사이 에이블만의 죽음은 래리의 탓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무구하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아내의 애인인 사이 에이블만은 죽었고, 꿈속에서 처치 곤란한 동생은 죽는다. 그러나 래리는 울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울지 않는다. 다만 어스름한 꿈의 기슭의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 울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울었다는 사실. 세상의 어깨 한 켠에서, 누군가는 이 순간 정말로 울고 있다는 사실. 그런데. 그것이 당신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래리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삶의 무게를 짊어진 당신에게? 랍비 나트너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신은 우리에게 답을 줄 이유가 없고, 그는 우리에게 의문을 준적도 없다. 어떤가, 너무도 단순simple하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don't be serious.
양손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본다
어느쪽이 더 힘겨운지 어느쪽이 더 견딜만 한지..
내 맘대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저울에...
자유롭고 싶어서 그 무게만큼의 대가를 치루고 외로움을 감수할 것인지..
외로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유를 구속할 것인지..
자유에 무게가 올라가면 그만큼 외로움은 내려가겠지만
외로움에 무게가 올라가면 자유를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꽤 박빙의 저울질이 날마다 마음을 흔든다..
자유를 포기할 수 없어 치뤄야 하는 대가가 때론 혹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