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8일 수요일

46 용사

 

 


'46 용사'를 추모한다고한다. 그들은 누구랑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다. 그냥 순국한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준 전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한, 등 떠밀려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 사람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부가 나서서 분향소를 운영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서는 조문객이 몇 만명을 넘어섰는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태도에는 죽음에 대한 예우 보다는 이들의 죽음을 선전물로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의심을 걷어내고 사태를 냉철하게 바라보아도, 왜 가장 중요한 상황에 TOD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에 존재하는데도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인가? 피로 파괴가 아니더라도, '물이 자꾸 새서 불안하다'고 하는 배를 무리하게 작전에 투입한 점, 가장 중요한 관측장비의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결정적 순간의 영상이 누란된 점, 이 모든 관리 부실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은채로, 죽은자들을 종이인형 처럼 내세우고 죽음의 잔치판을 벌이고 있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그저 이상하다는 것이다.

 

 

 

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어느날, 불현듯, 돌아선 그곳에.

 

 

“30대에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20세라고 믿어 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면서 세월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눈치 챈다. 늙음을 자각하는 것은 비극적이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돌연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늙음은 고독의 극치이다.”

 

- 장 피에르 멜빌

 

 

외로움이란 하나의 조건이다. 외로움은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며, 순간의 우연적인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흐름의 부정형적 단락 일 뿐이다. 결국 외로움이란, 그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은 항상 외롭지않다. 대개는 ‘무엇 때문에’ 외롭다고 느끼게 된다. 원인이 있고, 그 결과가 있다. 일종의 감정적 역학. 말 그대로 외로움은 ‘느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감정과 감각이란 오래도록 혹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고독이란 근원적이다. 촛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태우는 고요하고 내밀한 불꽃의 혈류 같은 것. 그것은 대면을 피할 수도 없으며 근본적으로 그것을 응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이다. 고독은 거울에 비추어 질 수 있을 정도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내밀한 안쪽으로의 침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식 같은 것이다. 고독은 응시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온 존재로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그 앞에 서는 것이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 앉아 있으면 밝은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심장 박동의 감각이 당신을 찾아온다. 당신의 심장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뛰지 않는다.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하여 심장의 근육은 반복적인 수축을 되풀이 할 뿐이다. 당신이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는 그 누군가 역시 그러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당신의 가족, 동료, 친구. 이 세계에 살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조선일보의 상상력 - 인간 어뢰

 

 


조선일보 22 일 1 면 머리기사에는 '북한의 인간어뢰 개념도'라는 그림이 올라왔다. 상상력하곤.. 하면서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게 또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수중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육지에서처럼 벽이나 돌 뒤로 숨는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폭발음이 진동과 음파의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고막손상이나 기타 피해가 발생한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개념도에는 어뢰 조작자의 탈출 여부는 제외가 되어있다. 이 그림을 보고 대부분은 자살폭탄을 떠올릴 것이다. 자살폭탄이라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비행단을 꼽을 수 있다. 전투중 불능상태가 된 전투기, 폭격기의 파일럿이 최후를 자살 공격으로 마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지만, 비행대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자살 공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을 '특공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살 공격을 획책하는 것은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국가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북한을 그러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상식적인 선택이 일어날 수 없는, 비 인도적 국가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낮에 가스통에 불 지르며 시위를 하시는 어르신들은 그냥 방관하고, 기껏 자그만 촛불 하나 드는데, 화재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 가두는 나라의 상식이란 도대체 뭔지 잘 모를지경이기는 하다. 여하튼 결론은 조선일보 너들이 괜히 1 등 신문이 아니구나. 괴벨스도 울고가겠다는 생각.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작은 연못

 

 

나는 <작은 연못>을 보면서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오직 그 마음뿐이었다. 이 먹먹한 고통의 장면들. 주검들. 찢겨지는 육체.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 그렇게 칠흙같은 어둠 속, 몰래 숨죽이고 떠나갔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시 돌아와 주기를. 다시 돌아와서 살아가 주기를 바랬다. 눈물이 맺힌다. 견딜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외수 선생께서 디씨 갤러리의 어느 갤러가 '너는 기억의 메모리, 전설의 레전드...' 어쩌구 하는 시를 자기가 시인이 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한 게시글에 덧글로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달았다고 한다. 요즘에 싸이와 김장훈이 나오는 SK 광고하고, 황선홍 밴드 어쩌구 해서 넷이서 어설픈 안무에 노래 부르는 KT 광고를 보면 내 기분이 딱 그렇다. 무조건적인 국가주의의 발흥. 정말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네다.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천명관, <고래>

 

 


천명관의 <고래>가 좋은 소설인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중에 대다수가 '입담이 좋다'고 하는데, 마치 판소리 사설을 풀어내듯 문장을 끌고가는 실력은 인정하겠지만, 그건 그냥 기술일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나름 재미나게 읽었지만 잘 쓴 소설이고, 좋은 소설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표절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런식으로 독창성이 떨어지는 작품은 그게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기껏 잘 해 봤자 '잘 만든 짝퉁' 취급밖에는 못해주겠다.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자 유

 

 

자 유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白紙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金雀花나무 위에
내 어린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驚異 위에
日常의 흰 빵 위에
약혼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風車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鐘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門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燈帶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

 

 

- 폴 엘뤼아르, p 54-59. <이곳에 살기 위하여>, 민음사시인선, 1987

 

 

 

- 원래 이 詩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 이었다고 한다.

 

 

 


 

2010년 4월 3일 토요일

사진 없음




잊고 있었는데 생각이 났다. 얼마전에 <그린존>을 봤다. <블러디 선데이>부터 굉장히 좋아하게 된 감독인데, 기술적으로도 뛰어나지만, 그저 기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이야기와 생각을 담아내는 힘이 각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각설하고, <그린존>에 보면 이라크인 포로들을 수용한 수용소가 나온다. 그곳 펜스에는 'No Photography 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이 때 자막은 '사진 없음' 이라고 떡하니 쓰여있다. 영화 자체가 군대와 밀접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군사용어는 조금 틀려도 봐줄만하다. 어차피 그건 자막을 안 보면 되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 까지 오역을 하다니. 홍주희씨, 당신은 번역하는 인공생명체 인건가요?




Last Days








어떻게 떨어지는지 몰라
종달새는 허공에서 죽었네.
 
 

- 질 쉬페르비엘, 『중력 Gravitations』. p.198









침묵을 본다는 것




하나의 사진을 잘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 치켜들던가 혹은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라고 야누흐(Janouch)는 카프카에게 말하곤 했다. 카프카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사물을 촬영하는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이지.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법이네.” 사진은 말이 없어야만 한다. (우뢰 같은 사진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려 깊음’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하나의 상태, 즉 침묵의 노력 속에서만 얻어진다. (눈을 감는 것은 영상으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진은 그 흔해빠진 수다스러움으로부터 끌어 낼 때에 나를 감동시킨다.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등이 바로 수다스러움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푼크툼을 발견케 하는)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 둘 것.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p.57


미하일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의 마지막 시퀀스가 끝나면, 우리는 압도적인 침묵을 만나게 된다. 아무 음악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엔딩 타이틀 롤. 처연하고 무심하게 울리던 열차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직은 영화가 끝난 것을 안도할 차례가 아니다. 힘차고 명랑한, 혹은 슬픈, 울려 퍼지는 엔딩 타이틀 음악이 흐르지 않는, 기이한 침묵의 마지막.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마치 눈을 감은 것 같은 이 상태. 듣는 것으로 부터의 침묵, 말하는 것으로 부터의 침묵. 침묵을 눈으로 본다는 것. 영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부터는 현실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 마치,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영원히 지속 될 것 같은 <히든>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크린을 넘어 스멀스멀 현실로, 현실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어오는 이 낯선 감각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설다. 과거는 기억 속에, 그러니까 지나간 시간 속에 있는, 우리가, 당신이 이미 겪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간) 기억과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과거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가 여기, 지금, 현재의 시간 속에 꺼내어 질 때, 과거는 미화되거나 누군가의 추억담처럼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정말로 그랬었나요? 그 기억은 정확한가요?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어떤 말을 했었죠? 그 때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었죠? 그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나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인 척을 하는, 객관성을 흉내 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영화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영화가 결국은 관객과 만든이가 공모하는 기꺼운 속임수라는 사실에 대해 또 한 번의 확인이 필요하다. 영화의 태생적, 기술적, 구조적 요인은 주관성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만드는 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 모두에게 있어 시선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가감 없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급적’ 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위에도 적었지만,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을 보여주고, 그 보여주기를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만약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다큐멘터리는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고 감독은 대답한다. 무언가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제가 되는 것이 이제는 없다. 객관적 사료나, 신문기사, 뉴스 영상,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대로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명성, 그 6일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계속되는 농성과 공권력의 압박으로 피로에 지친 시위 참가자들이 벌였던 논쟁과 의견대립을 다루고 있는 한 장면에서, 감독은 당시 논쟁이 벌어졌던 (곳으로 추정되는) 조그만 소성당 내부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은 후일의 증언과 대담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 내부. 그 위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우들에 의해 재연된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영상이나 음성자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원 감독은 부재를 재연再演함으로서 당시를 재현再現 해낸다.


<과거는 낮선 나라다>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다. 두 ‘열사’의 죽음을 의롭고 영예롭게 포장하지도 않으며,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군사정권의 치졸함과 추악함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시 시위의 쟁점이었던 대학생 전방 입소 교육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다. 카메라의 주요한 시선은 1986년의 죽음 이후로 계속되어온 남아있는 자들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지금 부터는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 시작.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방입소 반대 시위에서 분신한 故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당시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사건은 일간지에 아주 작은 쪽기사 정도로 다뤄졌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혹은 그럴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언론과 국민의 입과 귀를 꼭꼭 틀어막았다. 그저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주어진 삶에 꾸역꾸역 만족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국가는 아버지였고, 성전이었고, 말씀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 하게 된다. 그 누구도, 혹은 아무것도 그 죽음을 기억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게 될 때, 그 죽음은 부재하는 죽음, 존재하지 않았던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묘석은 부재의 증명이며, 죽음의 현존이다. 죽은 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렇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종종 고통스럽다. 그들이 기억하는 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이제껏 그래왔듯 삶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단순하고 명징한 깨달음. 이 둔중하고 날카로운 生의 감각들.


카메라 앞에는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죽은 자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다. 그는 질문한다. 질문은 단답형이다. 그때를 기억하나요? 기억은 정확한가요? 정확하게 몇 시쯤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을 정말로 그 때 했었나요? 아니면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가요? 그 말은 누가 했죠? 정말로 당신이 한 말이 맞나요, 아니면 그때 다른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죠?


이 집요한 목소리,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질문들은 의도적으로 당시의 기억을 불러낸다. 인물들은 화창한 대낮의 배경을 뒤로하고 앉아 있지만, 우리는 인물들이 마치 취조실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한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로 찍혀진 인터뷰 장면들은 소리와 보이는 것의 몽타쥬를 통해 플래시 백 한 번 없이 당시의 공기를 바로 지금 여기, 관객 앞에 꺼내 놓는다. 증언 할 것을, 기억해 낼 것을 담담하고 차갑게 재촉하는 질문들은 80년대 취조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후반 작업을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차가운 감독의 목소리는 취조실 바깥의 어둠 속, 멀리 과거에서 다시 올라온 것처럼 들린다. 만약 당신이 이 목소리가, 이 기괴한 인터뷰를 섬뜩하게 느꼈던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과거의 목소리의 근원이 현재에서도 그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화면 속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 바깥에 철저하게 방치된다. 이 자리는 개입이 용납되지 않으며 동시에 안전하다. 구경꾼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충돌될 때, 이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다. 혹은 과거는 현재의 지속이다. 그런데.


기억은 공유될 수 없다. 기억이 초래하는 감정 역시 그러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타인의 기억은 그저 이야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의 기억은 공공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연민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연민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연민은 종종 상상력이 풍부한 이에게 더 많이 허락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때, 미약하게나마 연민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적어도 이 질문에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취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다.


개인적 감정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객관적 팩트들만을 말할 것을 재촉하는 감독의 질문은 인터뷰이들의 증언들을 통해 관객들을 당시의 현장 속으로, 그 시간을 겪었던 이들이 숨 쉬고 움직였던 공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의 감정적 접촉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관객에게 인터뷰이들의 경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감지될 수도 있었던 순간, 바로 그 앞에서 영화는 한 발 뒤로 슬쩍 물러난다. 혹은 밀어낸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차갑고 잔인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타인과 타인 사이의 이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몹시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영화라는 지적에 감독은 수긍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이 거짓말이라고,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부재와 침묵은 이 영화가 선택한 정당한 방법과 언어일 뿐이다. 만약에 분신한 두 사람에 대해 남겨진 자료들이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에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 부재에 대한 명징한 인식에서 출발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지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흔히 이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여 질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방치하라, 혹은 잊어버려라)’ 는 식으로 통용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의 자장 안에서는. 이 영화의 반 이상이 인터뷰이 들의 ‘말’로 채워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은 거의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당시 사건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정보량은 엄청나다. 이것은 마치 기억의 낱장 카드들을 있는대로 늘어놓고, 그중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려는 끊임 없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말하여질 수 없는’ 과거를 적극적으로 말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말의 체계와 그로 인해 형성된 현재의 기억들과 시간들, 그 중심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당한 말, 정당한 기억의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안락한 현재 위에 편리하게 오도된 침묵과 망각속에 방치되어 있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애도행위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그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말하라. 죽은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
감독 : 김응수



- 영화 비평 웹진 네오 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 에 동시 게재


2009.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