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는 '풍경의 영화'다.
- 김시원 에디터의 '<의형제>를 비판한다' 에 대한 재 반박.
대중영화로서의 유의미한 지점들에 대해
김 시원 에디터는 '사회적 정체성의 상실감에 대한 자각처럼 보인다'고 아주 정확하게 내가 쓴 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의형제>를 풀어낸 내 글에는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그 영화를 보던 시기의 생각들이 많이 묻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의형제>가 왜 지금,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달'이 필연은 아니더라도, 관계 없는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 내 가설이다. <의형제>는 상업영화다. 이것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름값이 높은 배우가 등장했으며, 완급을 조절하는 액션장면을 배치해서 대중적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 영화가 <경계도시>처럼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환부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상업영화의 제작이 결정되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과연 이 영화의 소재가 지금 이야기 될 만한 소재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철학' 또는 '담론' 또는 '이념'그러니까, 이 영화를 마치 대단한 사회파 영화처럼 포장(미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만을 썼고, 내 생각을 거치고, 다시 영화 속의 장면들이 보여주었던 것만 추려내서 썼다. 그러니 내 글은 '해석'이 아니다. 이 글은 그냥 '기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글)이다.
또한
<의형제>에 대한 내 글은 그 영화를 특별히 대접해서 쓴 글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유의미한 점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나는 <의형제>라는 영화의 장점으로
꼽는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보기에, 장훈은 적절하게 자신의 욕심을 조절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인감독의 패기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열정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김시원 에디터의 글에 대한 반론글이 마치
감독에 대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나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그는 타협이 아닌, 조율을 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장훈 감독을 전적으로 '지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대를 걸고,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걸어도 되는 영화를 만들어 낼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 화에는 말을 걸어오는 영화가 있고, 말을 걸어야하는 영화가 있다. 지나치게 손쉬운 이분법일 수 있겠지만, 상업영화의 대부분이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시 말해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는 것이 상업영화의 특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감정을 쥐어짜내기 위해 작위적인 '최면을 걸어오는'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사양한다. 그렇다면 <의형제>는 흔히 말하는 신파적 감수성, 그러니까, 추석 차례를 지내는 장면의 급반전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짜내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 것일까? 물론 뜬금없는 이 장면은 어쩌면 이 영화의 단점 중 가장 큰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이 드러내는 가족중심주의, 가족만능주의의 해법은 지나치게 나태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영화가 가장 일반적인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쟁점은 과연 이 영화가 가족주의로서 영화 속, 또는 현실 속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여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쓴 글의 말미에도 적었듯이, 송지원과 이한규가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똥파리>의 마지막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 장면은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무의식, 그것이 관객이 될 수도 있고, 송지원이 될 수도 있고, 이한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한규에게 송지원이 편지를 보냈고, 영국행 비행기 티켓이 그 편지에 들어 있다는 것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의 봉투에 적혀있는 것은 송지원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은 부분부터 나머지는 이한규의 상상적 읽기라고 본다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난도질 하고 작위적인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뜬금없는 추석 차례 장면과 비슷하게 이 장면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흔히 말하듯 '톤이' 너무 다르다. 이러한 구성이 장훈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런 생각도 가능하다. 이 두 장면을 보면서 나는 비교적 몰입이 되었던 영화 속에서 자꾸 튕겨져 나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느낌은 너무도 기묘해서. 다시 영화를 복기하고, 왜 이러한 장면들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독의 '인장'이었을까, 또는 대중적인 해피엔딩을 원한 제작사의 압력이었을까? 일단 결과물로 놓고 본다면. 이러한 톤이 다른 장면들의 기묘한 비현실성, 또는 비정합성은 오히려 <의형제>를 다양한 층위에서 놓고 보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균열이 현실의 한계, 현실의 균열의 지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렇게 요란한 영화가 필요했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의형제>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비롯해서 불법체류자, 국제결혼같은 지금의 사안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부분에 관해서 게으르다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에서, 그것도 대형 극장가에 걸리는 대중영화에서 외국인 노동자, 새터민, 국제결혼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당장 기억에 남는 것만 따져보더라도,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 박찬욱 감독의 <박쥐>, 심상국 감독의 <로니를 찾아서>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우리와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을 마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통해 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해왔다.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소재로서는 불명확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이슈가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형제>가 유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대공수사 전력을 가진 이한규의 직업이 사람을 찾는, 그것도 외국인들을 '추적' 한다는 설정은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것처럼 작위적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흥신소에서 외국인 사람 찾기 서비스를 업무 항목에 넣고 있고, 영화 속 이야기처럼, 한국 땅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 신부들이 집을 나가거나 실종되는 일들도 생각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영화 속의 설정이 필요 했는가를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보는 쪽이다. <의형제>를 굳이 묘사하자면 '풍경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안들을 끈기 있게, 마치 르포르타쥬처럼 파고들어가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의형제>는 대중영화이다. 500 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그 현상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의미있는 '사건'들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공산품으로서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웰메이드' 영화인가?에 대한 질문은 나에겐 크게 관심이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니, 나는 이 영화가 공산품으로써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들 지적하듯 이 영화는 익숙 요소들의 조합이다. 자동차 액션 장면들은 본 시리즈를 제대로 차용한다. 액션 장면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다크 나이트>의 구성을 닮아있다. 근거리에서 상대를 가격하는 송지원의 액션역시 <다크 나이트>의 액션을 가져왔다. 농촌을 풍경을 보면서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표절'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차용'은 근면하고 솜씨 좋은 모범생의 그것으로 보인다.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어떠한 기술의 외피만 근근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닌, 그 핵심을 이해하고 꼼꼼히 옮겨 적는 근성이 적어도 보인다는 것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이 영화는 상업 '대중' 영화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영화이지 사회의 특정한 입지를 대변하는 영화는 아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나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반드시 특정 영화가 특정 입지를 대변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의형제>는 '누구도 배반하지' 않는, 특정 입지를 고수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적 접근점을 찾는다. 송지원과 이한규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현재적 사안들에 접근해 들어간다. 나는 두 주인공들에게서 고정간첩과 대공수사관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려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둘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집단에 의해 '퇴출되었다'는 사회적 위치이다. IMF가 고정간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송지원의 '고행'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남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여'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나는 썼다. 김시원 에디터는 '유지'를 '부여'로 읽고 있다. 최소한 어떠한 맥락에서 표현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반론이 작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2010.03.20
- 양석중(editor)
영화 비평 전문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이곳에서 느림보님의 영화글을 꽤 읽었는데요.
답글삭제유독 이글은 논지가 아주 분명하여
술술 읽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역시 의형제를 재미있게 보았던 관객이구요.
영화는 사회에 대해 특정의 입지를 반드시 지닐 필요는 없지만,
평론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래야만한다는 느림보님의 생각이
이 글 속에도 엿보여서.. 뭐랄까,
무척 괴로운 직업일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명확한 논리 보다는
단순히 영화의 좋았던 느낌을 배가시켜주는 문장력에
더 눈길을 주는 편이었는데요.
모든 관객이 평론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봐야할 필요는 없지만
독자로서 조금더 성숙된 눈으로 평론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더라도 저는 여전히
느림보님의 시를 더 좋아할 것 같지만요 :)
@슈풍크 - 2010/03/22 16:21
답글삭제제가 활동하는 영화 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서 '지지반박'코너에 올라간 글이거든요. 아무래도 댓거리질 하는 대상이 명확하기때문에 논지를 분명하게 세운 것 같아요.
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가 본 것을 확실하고 명확하게 써야겠다는 욕구와 마찬가지로, 이 글 때문에 영화가 하나의 인상으로 고정되는 것을 자꾸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뭐랄까요. 내가 이 영화의 권위자다. 뭐 이런식으로 선언하고 싶지 않은 맘이랄까요. 그래서 비교적 다른 글들은 논지가 불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름 고민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콕 찔러 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