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얼굴들, 가면들

<의형제>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주연 배우인 송강호의 존재만이 아니다. IMF가 양산한 것은 명퇴자, 실업자, 신용불량자 뿐만이 아니었다. 고용과 가정 경제의 불안정은 가족 구성원 자체의 형질변경을 일으켰다. <우아한 세계>는 IMF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폭 코미디라는 틀을 빌어서 묘사한다. 이 영화는 유학을 떠난 가족들이 보내온 비디오테잎을 보면서 울먹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맨 마지막에 후렴구처럼 배치한다. 이 장면은 앙금처럼 쌓여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IMF 이후의 한국 영화들은 분열된 가족, 혹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을 반영(박하사탕, 바람난 가족, 해피엔드, 4인용 식탁, 눈물, 질투는 나의 힘)하거나, 이상향으로서의 가족과 '집'을 묘사함으로써(집으로, 내 마음의 풍금, 초승달과 밤배, 선생 김봉두, 인어공주) 현실에 대한 보철장치로서 기능했다.

<의형제>는 IMF를 분기점으로 6년 전과 6년 후가 나뉜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관 이한규(송강호)는 독단적인 작전수행의 책임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고정간첩 송지원(강동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실패의 추억'이다. 초반의 총격장면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떠올리게 한다. 박무영(최민식)은 인피를 뒤집어쓰고 유중원(한석규)의 추격을 벗어난다. 유중원은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박무영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간첩, 혹은 스파이를 추적하는 주인공들은 대상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얼굴 위에 정체를 덧씌우는 것처럼 보인다. 정체는 폭로되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추적자에 의해 부여된다.

 

<의형제>에서 얼굴들은 가면이면서 동시에 인식표다. 베트남인과 한국인은 생김새가 다르다. 필리핀인, 말레이시아인도 그렇다. 우리는 다른 생김새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외국인 이라고 확신한다. 얼굴은 다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의형제>에서 우리와 닮은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송지원의 얼굴을 보게 될 때, 판단은 아주 잠간 유보된다. 이한규가 베트남인 공장에서 송지원의 도움을 받는 장면에서 송지원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이한규는 아마도 베트남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송지원이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 ‘어, 한국 사람이네’라고 이한규는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그리고 동시에 송지원의 얼굴을 알아본다. 송지원도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낸다. 드러난 서로의 맨 얼굴은 가면이 된다. 이한규는 송지원이 위장취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송지원 역시 이한규가 흥신소를 가장한 국정원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격렬한 추격전으로 시작된 영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기묘한 위장극으로 전환된다.



가면무도회

송지원과 이한규의 동거는 단순히 남과 북의 대치상황만을 은유하지 않는다. 이한규는 사람 찾아주는 흥신소를 운영한다. 그의 주 고객은 농촌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 찾아주는데 얼마, 데려다 주는데 얼마를 따져대는 이한규에게 송지원은 '인간적으로' 대해 줄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이한규는 말한다. '남의 것 가져다가 내 행복을 꾸려가는 거, 그게 자본주의야. 죄가 아니야.' 이한규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단순히 물질들의 자리가 이동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행복해 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돈다. 개인의 욕망과 공명심을 교묘하게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정당화하는 이한규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는 '선 조치, 후 보고'를 주장하다가 국정원에서 퇴출당한다. 북에서 내려온 무자비한 암살자 그림자(전국환) 역시 그러하다. '매일 밤 네놈의 목을 따는 꿈을 꾸었다'는 그는 체제의 논리를 가장 깊숙한 무의식의 층위에서 동일시한다. 거침없고 무차별적인 살인은 그에게는 심판행위,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화 행위다. 김성학을 암살하는 초반 장면에서 쓰러진 김성학의 장모와 아내에게 한 발 씩 총알을 쏘아 넣는 장면은 끔직 하면서도 기묘하다. 그는 무감동하게 이미 죽은 시체에 총알을 한 발 한 발 박아 넣음으로써 죽음을 기계적으로 '배분'한다. 그에 반해 송지원은 절차적인 인간이다. 그는 원칙을 알고 있는 자로서의 개인의 결정과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낯선 남한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송지원의 노력은 마치 엄격한 수도승 같다. '나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믿는 체제, 그가 믿는 신념, 그가 배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송지원은 종종 지령대로 행동하기를 멈춘다. 이한규와 그림자가 끊임없이 몸이 먼저 움직여지는 역동적 인간형임에 비해, 송지원 에게는 정(靜)과 동(動)이 공존한다. 영화 중간 중간 그가 뿜어내는 액션은 예측 불가능하고, 빠르며 군더더기가 없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범람하는 상대의 움직임들에 틈새를 만들어 제압한다.

송지원이란 인물은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캐릭터이다. 배우 강동원의 눈길을 끄는 신체조건은 우리들이 북한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 자체를 무화시킨다. 어떻게 본다면 <의형제>의 송지원은 굉장히 이상화 되어 있는 인물이다. 체제에 충성하되, 체제에 물들지 않는 인간이다. 다른 이들이 주변 환경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그는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 인물 같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송지원의 모습은 강렬한 예시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떠도는 사람들

이한규의 아내와 딸은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딸이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 주는 것이 꿈이라는 이한규는 돈을 벌기위해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고 흔들어 놓는다. 전직 국정원 대공 수사요원이 이제는 간첩이 아닌 도망간 사람들을 쫒아 다니며 그 일로 입에 풀칠을 한다는 설정은 쓴웃음을 준다. 국가라는 경계가 흐릿해지고 복잡한 개인적 욕망들이 첨예하게 돌출되고 있는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장 훈 감독은 <의형제>에서 집을 묘사하지 않는다.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기초 단위로서의 '집'은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등장인물들이 염원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공간으로 상정된다. 이한규는 남편의 구타를 피해 도망간 베트남 여자 뚜이안을 동생집에 그냥 두고 돌아선다. 뚜이안의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은 안 마당이 있는 비교적 전통적인 구조의 한옥집이다. 이들이 떠나가는 동네 어귀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넉넉하게 품을 벌린 채로 서 있다. 이한규는 모텔의 장기투숙 방과 오피스텔을 전전한다. 정작 이 땅에 살고 사람들은 더 나은 공간, 더 큰 집,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떠도는데, 사람들이 비운 자리를 메꾸고 있는 것은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노인들뿐이다. 이 나라는 서서히 낯설어지거나, 노쇠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의형제>를 통해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금일지도 모른다.

 




의형제


뚜이안을 놓아주고 돌아온 이한규는 송지원과 술을 마시면서 '형이라고 한 번 불러봐'라고 말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에게 자신을 가족으로서 호명할 것을 요청한다. 송지원은 '사장님을 어떻게 형이라고 부르냐'며 거부한다. 추석 차례상을 놓고 벌어지는 감정선의 변화는 그림자 조금 뜬금이 없다. <의형제>를 영리한 장르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장면의 호불호에 따라 갈라질 것이다. 이 장면의 톤이 어색할 정도로 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를 지낸다지?' 라는 이한규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송지원의 모습은 마치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적대적 상황을 상정하고 반복된 훈련을 몸에 익힌 인간이 두려움을 통제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벙커 총격 장면은 <의형제>에서 역전된다. 무기를 휘두르는 자는 남한의 군인이 아니라 북한의 남파 간첩이다. 송지원의 칼로 팔에 상처를 입은 이한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송지원의 부모님 차례 상에 함께 절을 올리자고 말한다. 그림자와 맞닥뜨리게 되는 옥상 장면에서 송지원은 다시 이한규를 찌른다. 죽은 줄 알았던 이한규가 일어설 때 우리는 송지원이 칼날을 거꾸로 잡고 송지원의 복부를 가격해서 기절만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들이 어깨와 손에서 흘린 서로의 피를 섞는다. 후에 보내온 편지에서 송지원은 이한규를 '형님' 이라고 부른다. <의형제>는 만능적인 가족지상주의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는 영화이다. 송지원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이한규 역시 혈육인 딸에게 남길 무언가를 위해 돈을 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행동은 갈등과 파국을 불러온다. 모든 사건들의 맨 마지막에 이들이 택하는 (가상적)혈연으로의 부름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지금,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존립의 근거. 그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자들

<의형제>의 엔딩에 대한 논란이 적은 것,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송지원이 보내준 항공권으로 딸을 만나러 영국으로 가는 기내에서 이한규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한 컵 가득 주문한다. 이 때 이한규는 '촌스럽게 위스키가 뭐냐, 좋은 와인도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펼쳐진 신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송지원 같다. 아니겠지, 돌아앉던 이한규는 거듭 확인한다. 그가 맞다. 그는 가족들과 영국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한규와 송지원은 동일한 프레임 내에 위치하지 않는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 되지만 상상적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이들은 마치 서로의 그림자, 환영 같다. 장훈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탈북자가 오랜 탈주생활 끝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는데도 미국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 대접을 받는 것 보다, 아예 모르는 나라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 낮다는 그 남자의 이야기는 묘한 울림을 준다. <의형제>는 정치적인, 또는 이념적인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정치와 이념은 당파로서의 정치와 이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동시에 <의형제>는 가장 첨예한 정치성과 이념성을 지닌다. 내가 어디에 존립의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의형제>는 뿌리 뽑힘에 관한 이야기,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이 존립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에는 다시 떠돌 수밖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2010.03.13
양석중(editor)


- 영화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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