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고원] (Heavenly Path, 2006)
감독 : 김응수
출연 : 김응수, 이재원
K 는 여자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로 미뤄 짐작하건데, 그녀는 K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K의 곁에 없다. 무언가 이곳에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그것을 상실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혹은 이별,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남아있는 자들이 문제가 된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남아있는 자는, 혹은 자신이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기억이라는 문제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도 있다. 이곳에 컵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컵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자에게 그 아무것도 아닌 공간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현시의 공간이 된다. 그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부재에서 출발된다.
김 응수 감독의 <천상고원>은 K가 사라진 여자를 찾아 네팔로 떠나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K가 구름속인지 지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네팔의 어느 길 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영화는 시작하고 10분을 넘기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보이지 않는 연인을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인 '극영화'로 알았던 이 영화는 어느새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혹은 감독 자신의 사적 기록이 서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삼투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삶과 영화. 현실과 영화. 영화 속의 현실. 현실 속의 영화.
K 는 고산병으로 시달린다. 동행한 사람들은 가끔 생각난 듯이 차를 멈추고 그가 몸속의 내장을 모조리 들어낼 것 마냥 구토를 하는 것을 도울 뿐 별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멀뚱이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기가 막히다. 손가락 끝에 파란 물이 뚝뚝 뭍어 떨어질 것 같은 하늘과 지천으로 열린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폭발이다. 몇 미터 직진 후 좌회전, 신호대기 뭐 대략 이런것들이 필요한 잠시 전진과 잦은 멈춤신호들로만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온 자에게 이것은 차라리 거대하고 투명한 폭력이다.
무 언가 찾으러 떠났지만, 이제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다. 우리는 점점 사라진 여자의 안위가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것 보다는 이 말없는 사내의 앞으로 어떤 길과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이상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K 는 삼년전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들의 임자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왔었던 마을과 길을 찾아서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알고 계세요?' 사람들은 사진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거나 혹은 자신의 이웃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을 K에게 보여준다. '그 사람은 여기 살다 작년에 다른 마을로 이사갔어요' '그 마을이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또는 '혹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 사진을 전해 줄 수 있나요?' K는 승려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속의 사람을 알고 있나요?' '이것은 제 모습인데요' '그런가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이건 제가 맞아요.'
3 년이라는 시간, 네팔에서 한국. 다시 한국에서 네팔까지. 그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살아온 3 년의 시간. 그리고 사진이 되돌아온 3 년의 시간, 그것을 찍은이의 3 년의 시간. 그것들이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의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사진속의 공간 역시 '그 때의' 그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속의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짚어 '이것은 나'라고 말한다. 이제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두고 '이것은 나' 라고 말한다.
사진을 주인에게 (혹은 주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고 K는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는 한 고비 넘어 수월한 듯 시원하게 질주하는 도로위로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투명하게 열린다. 마치 선도차량 처럼 멀찌감치 차 한대가 달려간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추월도 하면서 솜씨 좋게 달려 내려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것 같은 앞선 차는 길 왼편에 멈춰서 있다. 카메라는 그 옆으로 무심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이제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서 달리는 차도 없고 느리고 더디게 달려가는 덩치 커다란 트럭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길은 지천으로 열려있다. 그래서 길은 동시에 사방에서 닫혀버린다.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된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천상고원 - 살아서 기억하는 것, 또는 기억함으로써 살아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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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이 재미있네요. 사진찍고 돌려주기 쉽지 않은데 말이죠. 찍은 사진을 그 사람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3년 만에 든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글삭제이 영화에는 감독 자신의 실제 경험이 많이 녹아 들었다고 합니다. 3 년전의 사진을 돌려주던 에피소드도 그렇고요.
답글삭제'환생을 찾아서'가 기억나네요. 언젠가 EIDF에서 했던 다큐인데, 입적한 스승의 환생 - 그러니까 갓 태어난 어린 스승이죠 - 을 찾아서 히말라야 산악 지대 마을들을 헤매는 승려의 이야기였어요.
답글삭제어쩌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일텐데도, 그렇게 '되찾으러' 가게 된다는 게 참 묘하죠.
@encounters - 2010/03/10 14:58
답글삭제어, 알고보니 '환생을 찾아서'가 EIDF 2009년 국제 다큐 대상이었군요. 주인공 승려의 정신세계가 비범하고도 가슴아픈데, (구하실 수 있다면) 한 번 권해드리고 싶네요.
사람이 아주 적은 곳의 이야기만이 건드려줄 수 있는 어떤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상고원'도 보고 싶어지네요.
@encounters - 2010/03/10 14:58
답글삭제저도 소개해 주신 내용보고 꼭 찾아봐야겠다. 싶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