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이명박은 알고 있다.

 

적지않은 수의 군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 중 몇은 구조가 되었고, 그 중 몇은 생사 확인이 현재로선 불분명하다. 사건 발생 3 일이 넘어서는데, 대통령은 벙커에들어가 현장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 대신 파견된 '명바타' 정운찬 총리는 유족들의 반대로 현장에서 쫒겨났다. 이명박은 알고있다. 자신이 내려가봤자 건질것이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폼나는 사진찍을 건덕지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포토제닉 프레지던트 이명박.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100328







목련 꽃 망울이 하늘 가득.
일광에서는 엔간한 똑딱이보다 쓸만한 아이폰 카메라.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100327




백령도서 해군 함정 침몰. 간밤에 악몽을 꾸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해서 물에 뛰어 들었다. 여기저기 잠수 장비를 갖춘 사람들과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뛰어 들었다. 탁한 물 밑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다행이 그는 물 밑에서 올라와 건질 수 있었다. 온몸이 잔뜩 젖은 사람들이 담요와 따끈한 먹을것을 받기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아니라 열차가 물에 빠진 것이었고,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다음 열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 현실과 무의식의 이상한 연결. 모두 살아있기를. 오우버.



<엘리펀트> 계속 연결되는 삶들



<엘리펀트> 속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같은 프레임 내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일라이가 술에취해 운전하는 아버지를 우격다짐으로 조수석으로 우겨넣는 장면에서 감독은 일라이를 아예 화면의 바깥으로 밀어놓고는 아버지의 횡설수설하는 웅얼거림에대해 무관심한듯 툭툭 쏘아 대는 대답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그 둘 사이의 대화를 구성한다. 지각한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인 교장선생도 한 화면내가 아닌 독립적으로 잘려진 커트에서 일라이를 어쩌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영화속의 대화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구성된다. 허리우드의 영화에서 익숙해진 어깨걸고 찍는 장면은 단 한장면도 나오지 않으며 몇몇 장면에서 어른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어느 한쪽은 반드시 화면밖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런 장면들을 통해 선하고 착한 아이들과 나쁘고 오염된 어른들의 이분법적인 도식이나 그들의 대화가 단절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일어난 것이다라는식의 진술을하려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에겐 너무도 익숙해진 '어떤'것들에서 그 아이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어떤것을 자꾸 떼어내려는 몸짓에 가깝다.
 
  <엘리펀트>에서 인물들의 등뒤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알렉스와 에릭의 총격장면에서는 더이상 그들의 등뒤에 서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등뒤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각 인물들의 시점샷과 유사한 효과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그렇게 등장인물 개개인의 시점과 시간들은 영화속 우연한 어떤 지점들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알지 못하는사이에 미약하게 포개지듯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일상의 속도는 고속촬영을 통해 길고 느리고 충분하게 연장된다. 그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깨를 스치며 길게 끌고 지나가는 그림자,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무의미한것 같지만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의미로든 연결이 되어있다는 당연하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생의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엘리펀트>가 그려내는 삶의 겹침, 스쳐짐은 이런것들이다. 눈이 멀고 벙어리인 사람들이 바로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어간다. 그들 누구하나도 이 행렬을 이끌 수도 없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그렇다고 왜라는 질문도 하지 못한다. 다만 앞사람의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미약한 움직임을따라 계속해서 발을 내딛을뿐이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의 어깨위로 -필연적으로, 알지못하는 사이에- 걸쳐져있고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짐이며 동시에 인도자가 된다.



- 너무 좋아하는 영화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 조금 온도를 낮춰서 쓰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할까.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
 
하울은 소피와의 첫 만남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면 이렇게 말한다. 마법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마법의 언어를 발화하는 자가 그 말의 의미와 힘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하울은 무심결에 그 말을 소피에게 건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걸려있는 '저주'를 풀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라는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하울과 소피는 모든 과정을 감내하고 거쳐야만 한다. 이 모든 의문과 문제의 답은 이미 이 세계의 언어속에 주어져 있다. 바람의 지나감, 햇볓, 안개, 비, 외침과 고통, 전쟁, 탐욕, 시기 그 모든 세계의 언어들 바로 그 속에.

 그것이 바로 '세계의 약속'이다. 약속의 진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야 한다.


100327



영화가 존재하는 곳은, 영화가 (시시각각) 태어나는 그 공간은 '사이'다. 영화의 물리적 육체는 1초에 24 프레임이라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막면에 맺힌 상(像, image)위에서 구현된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현실의 움직임(혹은 시간의 경과)을 1/24초 단위로 분절시켜서 포획이 되는 그 이미지들이 영사기(projector) 를 통해 시공간적 이미지를 가지는 (또는 그런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움직임으로 구현되어서 관객의 망막에 전달되는 그 순간. 영화는 태어나고 완성이 된다.
 
영화의 물질적 육체인 필름의 1 초 분량, 곧 24 프레임을 놓고 생각해 보면. 1 초 라는 시간은 적어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도내에서는 연속적인 전체이지만, 그것을 카메라는 1/24 frame속으로 분절시켜 포착해낸다. 결국 극장에서 보게되는 움직이는 이미지는 1 초가 24 개로 잘리워지고 멈추어진 순간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렇게 멈추어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은  '사이(間)'다. 그것은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의 짧은 순간이지만 그 '사이(間)'는 수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분명히 존재한다. (필름위에 기록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는 검은색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렇게 분절되고 멈추어선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영사기의 간헐운동이 아니고 관객의 의식과 시각체계다. 1 초 동안 24 개의 이미지가 연속되어 지나가는 동안 관객은 그 이미지가 움직인다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이 가지고 있는 잔상효과 때문이다. 잔상이 연속되어서 중첩이되면 멈추어선 이미지를 움직이는것으로 인식하게 되는것이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100325 - 3



너에게
 
 
나의말들은낡았다
너무늙고오래되어
방치되었고녹이슬
어망가진채로버려
졌다
 
나를설명할수있는
언어를나는세상속
에서찾지못하였다
 
나는누구에게도나
를설명할수없다나
는말하여질수없는
내가되었다
 
나는너에게나를소
리내어말하고싶지
만나는너에게나를
말할수없다나는나
를설명할수가없다
 
나는너에게나를들
려주고싶지만들려
줄수없다나는나를
들을수없기때문이
다분명히
 
지금뜨겁게뛰고있
는나의심장은온전
히너의것이지만그
것을나는너에게말
할수없다전달할수
없다그리하여
 
나는침묵하고침묵
하고침묵한다아무
것도말할수없고아
무소리도낼수없다
는것을알기때문이
다그렇게
 
조용히아주조용히
이시간들이지나가
기만을기다릴뿐이
다그렇게
 
다시나는천천히눈
을감는다
 
나는시간속에서공
명하는진자처럼투
명한소리를울리며
낮게튀어오른다
 
짧은탄성처럼창밖
의마지막별빛이꺼
진다






100325 - 2



후일담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저녁이 왔다 해가 졌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겨울은 거의 끝났지만 아직 추웠다 이 시간이 되면 이상하게 슬픈생각이 들어 '시로'가 말했지 다시 찾은 오래된 성당 죽은 이들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묘석아래 누워있다 죽음이 여기있다 삶이 여기있다 등을 맞대고 붙어있던 언덕위 집들이 모조리 쫒겨났다 언덕위로 둥실 눈썹달이 떠 올랐다 내 똑딱이로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어 당신을 담을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거기에 그리고 나는 여기에 안녕.







100325 - 1



어떻게
 
 
썩둑.잘라버린노끈을휴지통에서다시집어들었다.
모든 물건에는쓰여질곳이있다. 쓰여질때가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것이다.
 
잔뜩웅크려눈만검뻑이는고양이처럼삶은,그렇게
기다림의서랍장을차곡차곡채워가는것이다.그러나
쓸모없는기다림도있다.
더러는거짓희망으로위장한채배시시웃음날리며끝끝내
자리를차지하고있는것들도있다.
 
나의탐욕나의이기심나의나태함.바로
너희들이나의눈을가리고있구나나의귀를막고있구나나의
두손과두발을묶어두었구나문득정신차리면물에빠져버린
솜처럼나의시간들을둔하게만들었구나씻어내도씻어내도
떨어지지않는헛된마지막포옹의기억처럼너희들은들러붙
어있구나어떻게떨쳐낼수있을가어떻게이미련스러운삶을
끝장낼수있을까어떻게
 
후욱.둥실떠오르는깃털처럼.

가벼워질수있을까.이삶에서.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폴리스 비트

 

 

폴리스 비트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망가진 하프시코드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씨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간의 바에는 언제나 이런 손님이 용케 찾아온다. 문이 열린 틈새로 어떤 여자가 쓰러지면서 외친다. ‘오 그가 나에게 총을 쏘았어요. 나는 운 좋게 맞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웃집 난간을 타고 넘던 고양이가 총에 맞은 것 같아요. 누군가 앰뷸런스를 불러줘요. 제발.’ 그 여자는 피 묻은 손을 들어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움직이기엔 그들의 동정심이 너무 무겁다. Z는 호수에 빠져죽은 남자의 뒷모습이 누군가 아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없을 거야. 죽은 자는 죽은 자일뿐야. 라고 자전거 패트롤 파트너가 귓전에 속삭인다. 그는 몇 년째 무좀 치료를 위해 발가락 사이에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그 다음 주 DEA는 알몸상태의 그를 체포했다. 무좀 치료약이라도 상습 투여는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약의 종류가 아니라 중독의 정도’라고 케이스 오피서가 말한다. 매주 치루는 정기적인 고해성사 시간에 주임신부는 자신의 고해 담당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페달을 밟을 때 마다 들썩이는 그의 엉덩이를 보면 흥분이 되요’ 담당 신부는 보속으로 한 달간 성당 밖으로 나가지 말 것과 하루 10 회의 사도신경 암송을 주었다. 주임신부는 마음속으로 중얼 거렸다. ‘이건 불공평해.’ 주임 신부의 고해 담당 신부는 신자들이 고해를 위해 무릎 꿇을 때 마다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지퍼를 내린다. 신자들은 매주 그에게 블로우 잡을 해 주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 길이 끊어지는 곳의 숲속에 사는 핀란드인 꼬뮤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자유 공간은 인터넷뿐이야.’ 그는 온라인으로 아동 포르노로 위장한 공산주의 교육 비디오를 판매한다. 그가 꿈꾸는 것은 (정말로 당신이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천국도, 국경도 없는 사해동포주의다. (한 번 상상해 봐요?) ‘건너편 집 보이나요? 잔디청소를 하는 흑인 남자. 그 남자는 세네갈에서 노예선을 타고 밀입국 했다우. 그는 그린카드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미국에 남아있겠다고 했어요.’ ‘부인, 이 내용 모두 직접 들으신 건가요?’ ‘아니요.’ ‘어찌 되었든 이건 이민국의 소관이라 제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Z는 노부인의 집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연결되지 않는 전화라도 그 끝에는 누군가의 손끝이 있다. 몰트위스키와 함께 배달된 발터 피피케이를 든 남자는 말했다. ‘총은 누군가를 쏘는 물건이 아니지 무언가를 쏘고 싶어지도록 하는 물건이야’ “탕-!‘ ’그 남자의 뇌수가 벽에 튀었어요.‘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는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쏘았어요.‘ 낡은 창고 주변에 노숙하던 남자는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들고 중얼거렸다. Z는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를 아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건 물에 빠져 죽은 남자의 신원을 알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일이야.‘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그냥 일어날 뿐이야.‘ ’마치 누군가의 죽음과 사건이 단 두 글자의 알파벳으로 케이스 리포트 시트에 기록되는 것처럼 말이야.‘ Z는 페달을 밟는다.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페달을 밟는다. 아직 보속을 끝내지 않은 주임신부는 종루에 올라 Z의 엉덩이를 향해 환호성을 울린다. ’내 사랑 !, 내 사랑 !‘

 

 

* 이 시(?)는 로빈슨 데버 감독의 2005년 영화 <Police Beat>를 보고 난 후 생각 나는대로 스케치 해 본 것이다.

* 머리속의 이미지들을 정련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쓴 것이므로 스케치라기 보다는 크로키라고 하는 쪽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 내용중에는 영화속에 있는 장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영화가 불러일으킨 어떤 기시감 같은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그것들도 모두 영화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천국으로 가는 문' '천국도 국경도 없는' 이라는 부분은 각각 밥 딜런의 <Knock'n on heaven's door> 와 존 레넌의 <Imagine>에서 빌려 왔다.

 

 

 

깊은 우물

 

 

 

깊은 우물
 

 


그곳에서 나는
예의바른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가벼웠다
깜박 잠이 들어버렸던
간밤에
물푸레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는 거실을
내려다 보았다
거칠게 옹이진 가지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거실은 깊은 우물처럼
투명하고 조용했다
바람이 할퀴고 지나던 창밖은
어느새 적막해졌다
나는 말없이 얇고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두눈을 가리고 있는것은
잠이 덜 깨어서가 아니라고
너는 말했다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몰래 다가가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한척 덤덤하게 뒤돌아 섰다

두껍고 과묵한 문틈 사이로
껍질을 까다만 귤 처럼

안녕 두글자를

던져두었다.

 


 

- 어느 해, 3 월 31 일에 쓰다.

만일이란 없지만, 그날 그곳에 조난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은 마음이 조금 덜 아프지 않을까.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비. 눈. 내리다



비. 눈. 내리다



젖지 않아 굴러떨어져 너는
그대로 녹아 흐르다
말없이 흐느껴 너는 나를
스쳐 지새다

불면의 밤
꺼진 촛불
싸늘히 식은 푸른
유리병

나는 너를 조용히 부르다
나는 너를 조용히 부르다
녹아서

비. 눈. 내리다.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의형제>는 '풍경의 영화'다.


<의형제>는 '풍경의 영화'다.

- 김시원 에디터의 '<의형제>를 비판한다' 에 대한 재 반박.

 

 

대중영화로서의 유의미한 지점들에 대해

 

김 시원 에디터는 '사회적 정체성의 상실감에 대한 자각처럼 보인다'고 아주 정확하게 내가 쓴 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의형제>를 풀어낸 내 글에는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그 영화를 보던 시기의 생각들이 많이 묻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의형제>가 왜 지금,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달'이 필연은 아니더라도, 관계 없는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 내 가설이다. <의형제>는 상업영화다. 이것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름값이 높은 배우가 등장했으며, 완급을 조절하는 액션장면을 배치해서 대중적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 영화가 <경계도시>처럼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환부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상업영화의 제작이 결정되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과연 이 영화의 소재가 지금 이야기 될 만한 소재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철학' 또는 '담론' 또는 '이념'그러니까, 이 영화를 마치 대단한 사회파 영화처럼 포장(미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만을 썼고, 내 생각을 거치고, 다시 영화 속의 장면들이 보여주었던 것만 추려내서 썼다. 그러니 내 글은 '해석'이 아니다. 이 글은 그냥 '기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글)이다.

또한 <의형제>에 대한 내 글은 그 영화를 특별히 대접해서 쓴 글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유의미한 점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나는 <의형제>라는 영화의 장점으로 꼽는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보기에, 장훈은 적절하게 자신의 욕심을 조절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인감독의 패기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열정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김시원 에디터의 글에 대한 반론글이 마치 감독에 대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나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그는 타협이 아닌, 조율을 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장훈 감독을 전적으로 '지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대를 걸고,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걸어도 되는 영화를 만들어 낼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 화에는 말을 걸어오는 영화가 있고, 말을 걸어야하는 영화가 있다. 지나치게 손쉬운 이분법일 수 있겠지만, 상업영화의 대부분이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시 말해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는 것이 상업영화의 특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감정을 쥐어짜내기 위해 작위적인 '최면을 걸어오는'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사양한다. 그렇다면 <의형제>는 흔히 말하는 신파적 감수성, 그러니까, 추석 차례를 지내는 장면의 급반전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짜내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 것일까? 물론 뜬금없는 이 장면은 어쩌면 이 영화의 단점 중 가장 큰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이 드러내는 가족중심주의, 가족만능주의의 해법은 지나치게 나태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영화가 가장 일반적인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쟁점은 과연 이 영화가 가족주의로서 영화 속, 또는 현실 속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여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쓴 글의 말미에도 적었듯이, 송지원과 이한규가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똥파리>의 마지막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 장면은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무의식, 그것이 관객이 될 수도 있고, 송지원이 될 수도 있고, 이한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한규에게 송지원이 편지를 보냈고, 영국행 비행기 티켓이 그 편지에 들어 있다는 것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의 봉투에 적혀있는 것은 송지원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은 부분부터 나머지는 이한규의 상상적 읽기라고 본다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난도질 하고 작위적인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뜬금없는 추석 차례 장면과 비슷하게 이 장면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흔히 말하듯 '톤이' 너무 다르다. 이러한 구성이 장훈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런 생각도 가능하다. 이 두 장면을 보면서 나는 비교적 몰입이 되었던 영화 속에서 자꾸 튕겨져 나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느낌은 너무도 기묘해서. 다시 영화를 복기하고, 왜 이러한 장면들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독의 '인장'이었을까, 또는 대중적인 해피엔딩을 원한 제작사의 압력이었을까? 일단 결과물로 놓고 본다면. 이러한 톤이 다른 장면들의 기묘한 비현실성, 또는 비정합성은 오히려 <의형제>를 다양한 층위에서 놓고 보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균열이 현실의 한계, 현실의 균열의 지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렇게 요란한 영화가 필요했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의형제>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비롯해서 불법체류자, 국제결혼같은 지금의 사안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부분에 관해서 게으르다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에서, 그것도 대형 극장가에 걸리는 대중영화에서 외국인 노동자, 새터민, 국제결혼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당장 기억에 남는 것만 따져보더라도,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 박찬욱 감독의 <박쥐>, 심상국 감독의 <로니를 찾아서>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우리와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을 마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통해 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해왔다.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소재로서는 불명확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이슈가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형제>가 유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대공수사 전력을 가진 이한규의 직업이 사람을 찾는, 그것도 외국인들을 '추적' 한다는 설정은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것처럼 작위적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흥신소에서 외국인 사람 찾기 서비스를 업무 항목에 넣고 있고, 영화 속 이야기처럼, 한국 땅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 신부들이 집을 나가거나 실종되는 일들도 생각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영화 속의 설정이 필요 했는가를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보는 쪽이다. <의형제>를 굳이 묘사하자면 '풍경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안들을 끈기 있게, 마치 르포르타쥬처럼 파고들어가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의형제>는 대중영화이다. 500 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그 현상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의미있는 '사건'들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공산품으로서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웰메이드' 영화인가?에 대한 질문은 나에겐 크게 관심이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니, 나는 이 영화가 공산품으로써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들 지적하듯 이 영화는 익숙 요소들의 조합이다. 자동차 액션 장면들은 본 시리즈를 제대로 차용한다. 액션 장면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다크 나이트>의 구성을 닮아있다. 근거리에서 상대를 가격하는 송지원의 액션역시 <다크 나이트>의 액션을 가져왔다. 농촌을 풍경을 보면서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표절'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차용'은 근면하고 솜씨 좋은 모범생의 그것으로 보인다.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어떠한 기술의 외피만 근근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닌, 그 핵심을 이해하고 꼼꼼히 옮겨 적는 근성이 적어도 보인다는 것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이 영화는 상업 '대중' 영화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영화이지 사회의 특정한 입지를 대변하는 영화는 아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나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반드시 특정 영화가 특정 입지를 대변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의형제>는 '누구도 배반하지' 않는, 특정 입지를 고수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적 접근점을 찾는다. 송지원과 이한규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현재적 사안들에 접근해 들어간다. 나는 두 주인공들에게서 고정간첩과 대공수사관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려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둘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집단에 의해 '퇴출되었다'는 사회적 위치이다. IMF가 고정간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송지원의 '고행'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남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여'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나는 썼다. 김시원 에디터는 '유지'를 '부여'로 읽고 있다. 최소한 어떠한 맥락에서 표현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반론이 작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0.03.20
양석중(editor)


영화 비평 전문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다시 하루




다시 하루




집으로돌아와아주오랜시간을들여몸을구석구석닦았다
친구들이건넨말들도그들이나에게보내준눈빛과걱정들
도그리고나의친애하는적들의기억들도모두씻어버렸다
아직젖어있는그대로방으로돌아와온몸이녹아내리는밤
의유령처럼물을뚝뚝흘리면서휴대전화의액정을들여다
보았다희미하게빛나는글자들이허공속을떠돌았다내가
기다리던대답은아직도착하지않았다액정을덮고몸을닦
고물을마셨다눈을감고아무말도하지않았다크게숨을들
이키고아주천천히공기가내몸을빠져나가는감각들을세
포속에한땀한땀적어두었다(이감각을잊으면안돼)공기
가빠져나간그자리에아주작은목소리로주문처럼새하얀
묘비명을새겨넣었다.다시


나는 유리처럼 딱딱해졌다.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땀으로 흠뻑 젖은 은유의 침상에서 내려온 당신과 나는 당신은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도 흔들지 않고 헤어졌다. 길다랗게 누운 오래된 돌벽에 뺨을 붙이고 걸으면서 나는 당신이 던진 혀와 말과 노래와 웃음들을 다시 생각했다. 당신은 노래하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아니, 나는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입속으로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나는 나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아. 쉿. 갈라진 보도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아직 몽우리도 맺지 못한 어린 풀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딱 그만큼 배가 불룩해진 배낭을 맨 여행자를 지나친다. 빗물이 흐르다 말라버린 오르막을 올라 한숨처럼 짧은 내리막을 지나 숲으로 간다. 이곳은 무거워진 시간이 말라붙은 눈송이처럼 낙하하는 곳. 낯선이들은 어깨동무를하고 신발을 껴안은 채로 잠을 청한다. 길고 긴 밤을 견디기에 한낮의 쉼은 너무 짧고 창백해. 눈을 감고 있으면 익숙한 현기증처럼 해가 기운다.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우도

 

우도

 


이제 막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나온 녀석의
파르라니 떨고있는 머리통처럼
올망졸망 수줍기도 하여라

겨울보리밭

 

 

100318

 

K가 생일선물로 시를 써달라고 했다. 흠 어쩌나 나는 마음이 아파야 시를 겨우 끄집어낼 수 있는데. K와는 아프고 기쁘고 자실게 없는데. 어려운 숙제다.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단순하고 꾸준하게

 

요즘에 글을 쓰면서 자주 나 자신을 객관적인 위치로 분리하게된다. 쓰는 나와 나를 보는 나. 일단 머릿속에서 나오는대로 문장을 쭉 써 나간 후에 다듬게 되는데, 그러나, 그러므로, 그렇기때문에, 그런데 같은 접속사를 발견하게 되면 거의 신경증적으로 없애버린다. 앞뒤 문장의 연결이 정말로 필요할 때에만 접속사를 최소한으로 쓸 것. 요즘 글을 쓰면서 두는 원칙이다. 접속사를 쓰게되면 내가 쓰는 문장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깎여버리는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접속사를 제거하면, 문장의 배치를 바꿔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건 그만큼 접속사에 기대서 문장의 배치와 관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접속사는 만능이 아니다. 접속사로 붙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붙이는 것은 미봉책일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다보면 어떤 순간에, 이런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을 거야. 이거 참 기발해. 이런 생각때문에 영화로 보았던 것 이상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뭔가를 너무 강하게 들이밀면서 주장하는 글을 쓰게 되더라. 간략하게 핵심만 단순하게 이야기 할 것. 내 개인의 감정과 욕심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상에대해 보았던 것만, 보이는 것만 이야기 할 것.  이렇게 쭉 써야겠다. 적어도 영화글은.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얼굴들, 가면들

<의형제>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주연 배우인 송강호의 존재만이 아니다. IMF가 양산한 것은 명퇴자, 실업자, 신용불량자 뿐만이 아니었다. 고용과 가정 경제의 불안정은 가족 구성원 자체의 형질변경을 일으켰다. <우아한 세계>는 IMF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폭 코미디라는 틀을 빌어서 묘사한다. 이 영화는 유학을 떠난 가족들이 보내온 비디오테잎을 보면서 울먹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맨 마지막에 후렴구처럼 배치한다. 이 장면은 앙금처럼 쌓여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IMF 이후의 한국 영화들은 분열된 가족, 혹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을 반영(박하사탕, 바람난 가족, 해피엔드, 4인용 식탁, 눈물, 질투는 나의 힘)하거나, 이상향으로서의 가족과 '집'을 묘사함으로써(집으로, 내 마음의 풍금, 초승달과 밤배, 선생 김봉두, 인어공주) 현실에 대한 보철장치로서 기능했다.

<의형제>는 IMF를 분기점으로 6년 전과 6년 후가 나뉜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관 이한규(송강호)는 독단적인 작전수행의 책임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고정간첩 송지원(강동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실패의 추억'이다. 초반의 총격장면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떠올리게 한다. 박무영(최민식)은 인피를 뒤집어쓰고 유중원(한석규)의 추격을 벗어난다. 유중원은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박무영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간첩, 혹은 스파이를 추적하는 주인공들은 대상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얼굴 위에 정체를 덧씌우는 것처럼 보인다. 정체는 폭로되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추적자에 의해 부여된다.

 

<의형제>에서 얼굴들은 가면이면서 동시에 인식표다. 베트남인과 한국인은 생김새가 다르다. 필리핀인, 말레이시아인도 그렇다. 우리는 다른 생김새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외국인 이라고 확신한다. 얼굴은 다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의형제>에서 우리와 닮은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송지원의 얼굴을 보게 될 때, 판단은 아주 잠간 유보된다. 이한규가 베트남인 공장에서 송지원의 도움을 받는 장면에서 송지원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이한규는 아마도 베트남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송지원이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 ‘어, 한국 사람이네’라고 이한규는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그리고 동시에 송지원의 얼굴을 알아본다. 송지원도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낸다. 드러난 서로의 맨 얼굴은 가면이 된다. 이한규는 송지원이 위장취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송지원 역시 이한규가 흥신소를 가장한 국정원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격렬한 추격전으로 시작된 영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기묘한 위장극으로 전환된다.



가면무도회

송지원과 이한규의 동거는 단순히 남과 북의 대치상황만을 은유하지 않는다. 이한규는 사람 찾아주는 흥신소를 운영한다. 그의 주 고객은 농촌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 찾아주는데 얼마, 데려다 주는데 얼마를 따져대는 이한규에게 송지원은 '인간적으로' 대해 줄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이한규는 말한다. '남의 것 가져다가 내 행복을 꾸려가는 거, 그게 자본주의야. 죄가 아니야.' 이한규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단순히 물질들의 자리가 이동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행복해 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돈다. 개인의 욕망과 공명심을 교묘하게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정당화하는 이한규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는 '선 조치, 후 보고'를 주장하다가 국정원에서 퇴출당한다. 북에서 내려온 무자비한 암살자 그림자(전국환) 역시 그러하다. '매일 밤 네놈의 목을 따는 꿈을 꾸었다'는 그는 체제의 논리를 가장 깊숙한 무의식의 층위에서 동일시한다. 거침없고 무차별적인 살인은 그에게는 심판행위,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화 행위다. 김성학을 암살하는 초반 장면에서 쓰러진 김성학의 장모와 아내에게 한 발 씩 총알을 쏘아 넣는 장면은 끔직 하면서도 기묘하다. 그는 무감동하게 이미 죽은 시체에 총알을 한 발 한 발 박아 넣음으로써 죽음을 기계적으로 '배분'한다. 그에 반해 송지원은 절차적인 인간이다. 그는 원칙을 알고 있는 자로서의 개인의 결정과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낯선 남한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송지원의 노력은 마치 엄격한 수도승 같다. '나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믿는 체제, 그가 믿는 신념, 그가 배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송지원은 종종 지령대로 행동하기를 멈춘다. 이한규와 그림자가 끊임없이 몸이 먼저 움직여지는 역동적 인간형임에 비해, 송지원 에게는 정(靜)과 동(動)이 공존한다. 영화 중간 중간 그가 뿜어내는 액션은 예측 불가능하고, 빠르며 군더더기가 없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범람하는 상대의 움직임들에 틈새를 만들어 제압한다.

송지원이란 인물은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캐릭터이다. 배우 강동원의 눈길을 끄는 신체조건은 우리들이 북한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 자체를 무화시킨다. 어떻게 본다면 <의형제>의 송지원은 굉장히 이상화 되어 있는 인물이다. 체제에 충성하되, 체제에 물들지 않는 인간이다. 다른 이들이 주변 환경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그는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 인물 같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송지원의 모습은 강렬한 예시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떠도는 사람들

이한규의 아내와 딸은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딸이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 주는 것이 꿈이라는 이한규는 돈을 벌기위해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고 흔들어 놓는다. 전직 국정원 대공 수사요원이 이제는 간첩이 아닌 도망간 사람들을 쫒아 다니며 그 일로 입에 풀칠을 한다는 설정은 쓴웃음을 준다. 국가라는 경계가 흐릿해지고 복잡한 개인적 욕망들이 첨예하게 돌출되고 있는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장 훈 감독은 <의형제>에서 집을 묘사하지 않는다.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기초 단위로서의 '집'은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등장인물들이 염원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공간으로 상정된다. 이한규는 남편의 구타를 피해 도망간 베트남 여자 뚜이안을 동생집에 그냥 두고 돌아선다. 뚜이안의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은 안 마당이 있는 비교적 전통적인 구조의 한옥집이다. 이들이 떠나가는 동네 어귀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넉넉하게 품을 벌린 채로 서 있다. 이한규는 모텔의 장기투숙 방과 오피스텔을 전전한다. 정작 이 땅에 살고 사람들은 더 나은 공간, 더 큰 집,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떠도는데, 사람들이 비운 자리를 메꾸고 있는 것은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노인들뿐이다. 이 나라는 서서히 낯설어지거나, 노쇠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의형제>를 통해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금일지도 모른다.

 




의형제


뚜이안을 놓아주고 돌아온 이한규는 송지원과 술을 마시면서 '형이라고 한 번 불러봐'라고 말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에게 자신을 가족으로서 호명할 것을 요청한다. 송지원은 '사장님을 어떻게 형이라고 부르냐'며 거부한다. 추석 차례상을 놓고 벌어지는 감정선의 변화는 그림자 조금 뜬금이 없다. <의형제>를 영리한 장르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장면의 호불호에 따라 갈라질 것이다. 이 장면의 톤이 어색할 정도로 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를 지낸다지?' 라는 이한규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송지원의 모습은 마치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적대적 상황을 상정하고 반복된 훈련을 몸에 익힌 인간이 두려움을 통제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벙커 총격 장면은 <의형제>에서 역전된다. 무기를 휘두르는 자는 남한의 군인이 아니라 북한의 남파 간첩이다. 송지원의 칼로 팔에 상처를 입은 이한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송지원의 부모님 차례 상에 함께 절을 올리자고 말한다. 그림자와 맞닥뜨리게 되는 옥상 장면에서 송지원은 다시 이한규를 찌른다. 죽은 줄 알았던 이한규가 일어설 때 우리는 송지원이 칼날을 거꾸로 잡고 송지원의 복부를 가격해서 기절만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들이 어깨와 손에서 흘린 서로의 피를 섞는다. 후에 보내온 편지에서 송지원은 이한규를 '형님' 이라고 부른다. <의형제>는 만능적인 가족지상주의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는 영화이다. 송지원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이한규 역시 혈육인 딸에게 남길 무언가를 위해 돈을 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행동은 갈등과 파국을 불러온다. 모든 사건들의 맨 마지막에 이들이 택하는 (가상적)혈연으로의 부름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지금,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존립의 근거. 그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자들

<의형제>의 엔딩에 대한 논란이 적은 것,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송지원이 보내준 항공권으로 딸을 만나러 영국으로 가는 기내에서 이한규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한 컵 가득 주문한다. 이 때 이한규는 '촌스럽게 위스키가 뭐냐, 좋은 와인도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펼쳐진 신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송지원 같다. 아니겠지, 돌아앉던 이한규는 거듭 확인한다. 그가 맞다. 그는 가족들과 영국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한규와 송지원은 동일한 프레임 내에 위치하지 않는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 되지만 상상적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이들은 마치 서로의 그림자, 환영 같다. 장훈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탈북자가 오랜 탈주생활 끝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는데도 미국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 대접을 받는 것 보다, 아예 모르는 나라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 낮다는 그 남자의 이야기는 묘한 울림을 준다. <의형제>는 정치적인, 또는 이념적인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정치와 이념은 당파로서의 정치와 이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동시에 <의형제>는 가장 첨예한 정치성과 이념성을 지닌다. 내가 어디에 존립의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의형제>는 뿌리 뽑힘에 관한 이야기,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이 존립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에는 다시 떠돌 수밖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2010.03.13
양석중(editor)


- 영화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지금은_곤란하다_기다려달라.jpg




왠만하면 펌질 잘 안하고, 이미지도 잘 안올리고 텍스트 위주로 블로그를 꾸미고 싶은데, 이건 펌질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천지가 꽉꽉 막힌듯 답답하지만, 이런 해학과 여유가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정말 미친듯이 웃었음. 아마, 몇 일 내에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를 주제로 DC 믹스가 출시되지 않을까 싶다. 왠지 잉여들의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아이템. 

가카의 용안을 보고도 눈 감지 않을 자신있는 용자라면!







2010년 3월 9일 화요일

봄 눈



내가살았던도시에서는해마다봄이되면
집이무너졌다동그랗게웅크린초식동물
의내장처럼온몸을잔뜩구부리고잠이들
었던사람들은창백한옆구리를차갑고냉
냉한아침햇살에고스란히드러내곤했다.
 
벽이무너지거나누구집네담장이넘어갔
다는소문같은것들은개나리꽃덤불이내
지르는작고낮은환호성처럼좁고울퉁불
퉁한골목길을타고온동네로퍼져나갔다.

 
무너진벽이나담장같은것들은금새다시
세워졌는데제대로굳지않은모르타르는
아직마르지않은바닷내음을방안까지몰
고돌아왔고그런날마다식구들은회색파
도가잔뜩일어서거나파도에도씻겨지지
않는발자욱을남기면서끝도없는해변에
서길을잃는꿈을꾸곤했다.
 
그해봄에새로태어난아이들은제일먼저
그것을집이라고부르는법을배우면서자
라났다때로는바람에날려온민들레씨앗
이밤사이몰래내린눈처럼용케녹지도않
고그다음해겨울을지내고꽃을틔운적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생각난것처럼정말로눈발도날렸다
골목을달려내려가는꼬마들이땀이배어
나는것도모른채손에들고있었던똑하고
부러트린민들레머리처럼바람에대책없
이무심하고가볍게흩날리던,
 
봄눈같은것도내렸다.

 

여보세요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정수리 왼쪽 뒤에서 두드려댄다 아프다 찔금 잠간 발걸음 멈출정도로 아프다 왼쪽 눈꺼풀도 덩달아 꿈벅거린다 둥둥둥둥 식도에는 두통약 줄줄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해 등에 등 맏대고 손에 손 잡고 늘어서 있다 언제나 버릇처럼 지니고 있었지만 버릇이 언제나 익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매번 생소한 얼굴처럼 불쑥 얼굴 들이미는 편두통 이것에 익숙해졌다면 나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있음을 기뻐할 만큼 넉넉하지는 않다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프다 생각하면 그 순간 사라진다 사라졌다 생각하고 한 숨 돌리면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기보세요 나를 부른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 잔뜩 몰려와 분주한 김장 마당 간밤동안 얌전히 절여진 배추들이 입다물고 다소곳이 포개 누워있던 겨울 초입의 풍경 길건너 멀리서 집짓는 인부들 망치 소리가 방 한구석 독감으로 누워 있던 어린녀석의 머리통을 두둘겨대던 시간들을 그 때 나는 천정 한 구석 정육면체의 삼면 꼭지점을 이은 삼각형의 검은 덩어리가 나를 내려다보던 그 또렷한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지 나를 노려보았어 그것은 움직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그것은 어쩌면 나를 죽일수도 있었지어그것은 내가 맨 처음으로 만났던 침묵이었고 죽음이었고 파괴였고 망각이었고 고독이었고 외로움이었고 고통이었지 그 녀석의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딱 그만큼의 부피만큼 왼쪽 정수리 삼각변의 딱 그만큼이 그 손아귀에 사로잡혀서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여보세요 요기보세요 나를 부르고 있지




밤 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밤 눈, 기형도






2010년 3월 7일 일요일

볼드모트 뒷다리 긁는 소리




인간의 삶 자체가 정치성을 띌 수 밖에 없다. (다고 생각한다라고 에둘러 쓰기는 싫다) 모든 삶의 순간들이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고 정치적 시각으로 사안을 읽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평론가를 지망한다면 그 부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영화에 대해 평론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개활지에 서서 소리를 질러서 온갖 저격수들의 목표가 되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하더라도, 평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오히려 정치성을 배제하고 당장 눈앞의 문제와 일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에둘러가는 글을 쓸 때, 그 글은 가장 나빠질 수 밖에 없으며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거짓말을 하는 평론은 이미 평론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이들을 흐릿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냥 질나쁜 거짓말일 뿐.

누가 좌파고 누가 우파고 누구의 글이 좌파적 성향이고 어쩌고 따지는 바로 그 사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진다. 굳이 그걸 왜 따져야 하는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보지도 않고 겉 모습만 보고 좌파니 우파니 파란색이니 빨간색이니를 따지는 자들은 그러니까 누구인가. 자신의 두려움과 혼돈을 다른이들에게 전파해서 자신의 두려움과 혼돈을 집단적 믿음으로,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칠 수 있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당신 마음 속의 그것은 과연 무엇가? 라고 묻고 싶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다.

 

 

'시네마테크 공모제는 잠정 유보, 충무로에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하겠다' 이것이 3 일 있었던 유인촌 장관과 시네마테크 관계자들의 간담회 결론이다. 축하할 일인가? 아니다. 유인촌 장관은 '충무로'라고 짚어서 말했다. 다른 어디도 아니고 '충무로'이다. 매년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서 부산국제영화제를 능가하는 국제 영화제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통하는 바로 그 '충무로'이다. 유인촌 장관의 발언은 확실히 뭔가 뒷 수를 두고 있다. 마치 '지금은 물러가지만,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유 장관이 충무로에 만들겠다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충무로의 '토박이' 영화인들이 부산에 영화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지금, 관객도 별로 들지 않아서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에 초대권을 잔뜩 뿌려대는 충무로 영화제를 본다면 별로 기대를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볼 때, 유인촌 장관이 임기내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만들게 된다면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입지는 좁아진다. 일단 전용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생기게 되면 영진위는 여론상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영진위에서 애써서 전용관까지 만들어 줬는데, 공모제를 왠만한 선에서 수락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인촌 장관이 정부의 예산을 끌어들여서 전용관 건물을 새로 지을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가 지금까지 장관이 된 후 벌여온 일들을 보면 장기적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다. 아마도 어딘가 수익이 낮은 영화관을 임대해서 전용관이라고 내놓을 공산이크다. 일 주일만에 새 단체를 급조해서 연간 억단위의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의 주체로 낙점하는 영진위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여하튼 명목상으로라도 전용관이 생기게 되면, 아트시네마는 공모제에 압박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싸움의 국면이 바뀌었을 뿐. 서울아트시네마의 좀 더 적극적인 해법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통과 상식이라는 이름의 괴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용히 영화만 보고 싶었을 뿐, 싸움은 다른 곳에서 하세요. 또는 여기가 영화 웹진인지 정치 웹진인지 모르겠다고. 혹시라도, 당신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이런 저런 문제가 가라앉고 그나마 다들 한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그 때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는 '조용한 극장'을 찾아간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바로 그 행동자체가 김연아의 입국장에 몰려가서, 또는 올림픽 대표단의 해단식에 몰려가서 사진찍기에 골몰하는 자들의 숟가락 얹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당신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당신의 역겨운 생각과 행동을?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아주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친구 어머님께서 다치셨다. 일을 하시다가 기계에 손을 다치셨다고 한다. 친구는 덤덤하게 말하는데 크게 다치신 것 같다. 수술중이라는데 걱정이 된다. 물론 그냥 다치기만 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전,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목 아래까지 딸려 들어가 죽어버린 스무살짜리 후배가 잠깐 생각났다.

 

왜 우리는 험하고 힘든 일,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고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배려와 보상을 주려하지 않는 것일까. 한전에서 일하는 선배가 전봇대를 타고 있으니가 밑을 지나가면서 '너도 저런 일 안하려면 열심히 공부해라'고 아이에게 말하던 어떤 어머니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도대체 '저런 일'이란게 뭘까. 물론 누구나 몸이 덜 힘들고, 좀 편안하게 돈을 벌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그렇다고 해서, 힘을 들여 일하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삿되게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생산재의 경우 판매 단가가 낮기 때문에 일하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급여의 크기가 작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인정한다. 이럴 때 국가가 필요한 것이고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닐까. 가령 위험 직업군에 대한 위험 수당을 정부에서 지원함으로써 소위 3D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서서히 바꿔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펜대를 잡은 똑똑한 사람들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괜히 줬던 밥상 빼앗아 놓고 지방선거 다가오니까 무상 급식 어쩌고 공약空約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까지 머슴 흉내내며 들어와서는 강도로 돌변하는 이들에게 휘둘려야 하나.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좀 폼나는 일 하기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때, 그나마 이 현기증 나는 탐욕의 수레바퀴의 속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우아한 세계 - 결국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감독 : 한재림
출연 : 송강호, 박지영, 오달수, 윤재문
개봉 : 2007년 4월 5일
 
세계가 우아하단다. 송강호가 조폭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세계'가 우아하다고 말한다. [연애의 목적] 통해서 선생님들의 sex life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한 묘사로 적잖은 혹평을 들어야만 했던 한재림 감독은 자신의 두번째 영화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도를 보여준다. 우리들이 말안해도 대충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생활의 한 자락을 슬쩍 들춰 보이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에서 우리는 이제는 나이먹어 슬슬 등 뒤가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조폭의 삶과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서 살아남는 것을 함께 겹쳐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조폭과 가부장은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부장과 조폭. 이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으로서의 삶. 그것을 둘러싼 풍경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이야기다. 껄껄하는 웃음이 터져나오지는 않지만 헛헛한 실소의 결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짠하게 젖어 들어오는 에피소드들을 조리있게 구성한 것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송강호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다양한 재능을 풀어내듯 데뷔 이후 꾸준히 쌓아온 연기스타일을 이 영화에서 집약해서 보여준다. 마치 예측 불가능한 산간 지방의 기후 변화 처럼 한 화면내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송강호의 감정변화를 보는 것 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것일것이다. 웃는 낮으로 '연장'을 담글 수 있는 잔인한 긴장감과 어느새 자식낳아 기르다 보니 좀 데만데만해진 대한민국 중년남성의 사람 좋을것 같은 얼굴의 기묘한 동거. 그런데 어떤 장면은 마치 [복수는 나의 것] 한 장면을 가져온 것 같고 또 어느 장면은 [YMCA 야구단]을 통째로 들고 들어온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복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끝이 좀 이상하다. 결국 형기를 마친 조폭은 기러기 아빠가 된다. 마치 불필요한 후렴구처럼 붙어있는 이 장면에서, 혼자 남겨진 강인구에게 조기 유학을 나간 아들과 딸, 아내가 비디오 테잎을 보내온다. '동생'들을 호령하던 당당한 조폭 간부 강인구는 커다란 와이드 TV 앞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그것을 본다. 헤벌레 웃음을 흘리며 화면을 보던 그는 질끔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혼자 라면을 먹고 있는데 화면속 멀리 떨어진 아내와 딸, 아들은 그가 생전 못 가본 곳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다. 화면 속의 그들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그들은 '저기'에 있고, 그는 '여기'에 있다. 화면 정중앙에 강인구를 두고, 그의 얼굴과 그가 보는 것을 친절하게 다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런데 이상하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강인구는 라면그릇을 내던진다. 고슬거리는 라면 면발이 사방에 날린다. 칼질에 총질을 해서라도 들어와 살기를 소망했던 집안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그는 혼자다.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그는 검은 '비니루'와 걸레를 들고와 자신이 엎지른 라면과 깨진 그릇을 치우기 시작한다. 어디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중년 남성의 투실한 뱃살과 긴장감이 적당히 서려 있는 장단지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은 그는 다시 성질을 부리며 걸레를 내던진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이것이 대한민국 가장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만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 어느쪽에도 방점은 찍혀지지 않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우리들의 연대를 꿈꾸자.


유인촌 장관이 조희문 영진위 위원장을 대동하고 서울 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계속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네마테크 공모제의 해법을 제안하기 위해서 찾은 것 같다. 관련 기사가 나와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기사를 통해 전해진 바로는 '절차상의 문제 / 영진위의 체면도 살려야 / 서울아트시네마에 경합할 공모단체가 없다'는 정도의 내용이다. 아마도 유인촌은 이번 사태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자, 일종의 조정자 역할로 언론플레이를 하기위해 이러한 자리를 만든 것 같다. 욕은 조희문이 먹고 유인촌은 숟가락만 슬쩍 얹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자리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미디액트와 다르게 아트시네마는 수행평가 점수도 좋고 문제가 없는것으로 본다'는 발언이 나왔다는 점이다.


지난 공청회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과 조희문 위원장은 한독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미디액트가 공모주체로 부적절하다는 발언을 했고, 이것은 '촛불 집회 참여 단체에게는 정부지원을 불허한다'는 이들이 말하는 '원칙'과도 부합된다. 인디스페이스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나선 시네마루 카페에 최공재 이사장이 올린 '정치나 당파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운영한다'는 글의 내용을 일백퍼센트 믿는다해도 자신들의 순수한(것 같은) 행위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도 난 아니고, 모른다고 말하는 건, 그냥 난 바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하튼. 문화계에 닥친 이런 모든 문제들은 정부가 정치 논리로 자신들의 입장에 반하는 단체들을 길들이려는 의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유발되고 있다. 어쩌면 지나치게 멀리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서울아트시네마의 향후 거취에 따라서 문제가 더 분화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금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는 쪽에서는 단순히 한독협이나 미디액트를 판에서 쫒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분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 그들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했던 것을 기억하자. 오늘 간담회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대략 두 가지다.


1. 공모제를 없던 것으로 하고 지금처럼 아트시네마를 영진위에서 지원을 계속 하는 것.
2. 경합할 단체가 없으므로, 일단은 서류상 공모제를 아트시네마에서 받아들이고 지원을 받는 것.


문제는 아트시네마가 현재 시점에서 영진위와 표면상으로라도 화해를 하고 제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되면, 시네마테크 공모제 문제는 일단락 되는 것이겠지만, 이 모든 화살이 미디액트와 한독협으로 향해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일예를 들어서, 한독협의 경우에 현재 인디스페이스가 사라진 지금, 한독협의 연레 행사인 서울 독립 영화제와 인디 포럼, 인디 다큐 페스티벌의 마땅한 상영공간이 불확실하다. 이러한 행사들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한다해도, 현재의 영진위와 파트너쉽을 유지하게 된다면 서로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서울아트시네마가 영진위와 화해를 통해 다시 지원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1. 시네마테크 운영에 대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지원이라는 이유로 간섭을 금지할 것.
2. 민간 사업으로 시작한 시네마테크 운동을 영진위 주관 사업의 일개 부서로 축소하지 않을 것.
3. 영진위가 책임지고 전용관 사업을 발족 시켜서 진행 할 것.


대략 이같은 내용들을 합의서의 형식으로 성문화 시켜서 약속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모든 사태들을 그저 시네마테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사태는 없어야한다.





연필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전에 연필을 깍는다. 분홍색 지우개가 달린 스태들러 연필. 중국 OEM은 나무가 좋지 않다. 조금 돈을 더 하더라도 독일 생산품을 사용한다. 이 연필을 기계가 아니라 칼로 사각사각 연필의 몸통을 얇게 저며 내는 동안 오늘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머리속으로 정리해 본다. 몸통이 끝나면 연필심 차례다. 뽀죡하고 최대한 얇게, 그러나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다듬는다. 칼날이 앞으로 나가는 동안 몸통을 회전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연필심이 꼬인것처럼 깎이게 된다. 몸통은 고정하고, 칼날은 동일한 각도로 최대한 집중해서 심을 갈아준다. 뾰족한 것은 섹시하고 강하고 위험하다. 언제 부러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용케도 버틴다. 요즘 하루가 그렇다. 언제 부러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버틴다. 그런데, 정말 언제까지?

 

 

 

 

천상고원 - 살아서 기억하는 것, 또는 기억함으로써 살아있는 것



[천상고원] (Heavenly Path, 2006)

감독 : 김응수
출연 : 김응수, 이재원


K 는 여자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로 미뤄 짐작하건데, 그녀는 K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K의 곁에 없다. 무언가 이곳에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그것을 상실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혹은 이별,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남아있는 자들이 문제가 된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남아있는 자는, 혹은 자신이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기억이라는 문제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도 있다. 이곳에 컵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컵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자에게 그 아무것도 아닌 공간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현시의 공간이 된다. 그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부재에서 출발된다.

김 응수 감독의 <천상고원>은 K가 사라진 여자를 찾아 네팔로 떠나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K가 구름속인지 지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네팔의 어느 길 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영화는 시작하고 10분을 넘기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보이지 않는 연인을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인 '극영화'로 알았던 이 영화는 어느새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혹은 감독 자신의 사적 기록이 서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삼투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삶과 영화. 현실과 영화. 영화 속의 현실. 현실 속의 영화.

K 는 고산병으로 시달린다. 동행한 사람들은 가끔 생각난 듯이 차를 멈추고 그가 몸속의 내장을 모조리 들어낼 것 마냥 구토를 하는 것을 도울 뿐 별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멀뚱이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기가 막히다. 손가락 끝에 파란 물이 뚝뚝 뭍어 떨어질 것 같은 하늘과 지천으로 열린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폭발이다. 몇 미터 직진 후 좌회전, 신호대기 뭐 대략 이런것들이 필요한 잠시 전진과 잦은 멈춤신호들로만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온 자에게 이것은 차라리 거대하고 투명한 폭력이다.

무 언가 찾으러 떠났지만, 이제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다. 우리는 점점 사라진 여자의 안위가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것 보다는 이 말없는 사내의 앞으로 어떤 길과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이상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K 는 삼년전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들의 임자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왔었던 마을과 길을 찾아서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알고 계세요?' 사람들은 사진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거나 혹은 자신의 이웃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을 K에게 보여준다. '그 사람은 여기 살다 작년에 다른 마을로 이사갔어요' '그 마을이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또는 '혹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 사진을 전해 줄 수 있나요?' K는 승려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속의 사람을 알고 있나요?' '이것은 제 모습인데요' '그런가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이건 제가 맞아요.'

3 년이라는 시간, 네팔에서 한국. 다시 한국에서 네팔까지. 그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살아온 3 년의 시간. 그리고 사진이 되돌아온 3 년의 시간, 그것을 찍은이의 3 년의 시간. 그것들이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의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사진속의 공간 역시 '그 때의' 그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속의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짚어 '이것은 나'라고 말한다. 이제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두고 '이것은 나' 라고 말한다.

사진을 주인에게 (혹은 주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고 K는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는 한 고비 넘어 수월한 듯 시원하게 질주하는 도로위로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투명하게 열린다. 마치 선도차량 처럼 멀찌감치 차 한대가 달려간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추월도 하면서 솜씨 좋게 달려 내려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것 같은 앞선 차는 길 왼편에 멈춰서 있다. 카메라는 그 옆으로 무심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이제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서 달리는 차도 없고 느리고 더디게 달려가는 덩치 커다란 트럭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길은 지천으로 열려있다. 그래서 길은 동시에 사방에서 닫혀버린다.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된다.





골목바람 - 생각의 여름






골목바람 - 생각의 여름




2010년 3월 2일 화요일

끄적..

연신 지나치는 쇼윈도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여자..

 

본능이다.. 남자들은 웃을지 몰라도 어쩔수 없다..

 

간혹 남자들이 착각하는건..

 

여자들은 남자한테 잘보이기위해 거울을 본다거나 이뿐옷을 산다거나 얼굴에 칼을 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거울에 보이는 내 자신의 모습을 즐기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다..

 

거울을 보는 모습이 남자한테 감동으로 보여질수도 있고

 

눈을 찌푸리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이세상에 여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남자로선..

 

남자가 야동을 보는게 당연한거처럼 여자들이 거울을 보며 즐기는걸 인정해줘야만 같이 살기 편할것이다..

 

내가 가진 경제력으로 최대로 만족할 물건을 샀다거나

 

늘 눈독만 들이던 걸 손에 넣었을때의 여자만이 느끼는 기쁨은..

 

남자들이 갖고 싶은 차를 빚을 내서라도 내차로 만들어 시운전 하는 기분과 같을 것이다..

 

같이 외출 할때 준비가 길다고 남자들은 싫은 소리를 하곤 한다..

 

거울좀 그만 보고 빨리나오라고..

 

여자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절대 밖에 나갈 수 없는 종족이다...

 

(여자라고 쓰고 아줌마라고 읽혀지기 시작한 종족은 간혹 예외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안타깝긴하다...)

 

빨리나오라고 다그쳐봐야 더 오랜 시간을 남자들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준비시간을 방해 하지 않는것이 좀 더 적게 기다리는 방법일 것이다..

 

 

                                                                                                       - jehty-

 

당신과 나의 연대

 


2 월달에 있었던 문광부질의를 통해 시네마테크 공모제에 대한 영진위의 대응이 문제있음을 여러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 오프라인 매체들이 다루기 시작하자, 영진위는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인식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문광부 유인촌 장관의 '문제가 있다면 공모를 다시 할 수도 있다'는 발언은 물론 미디액트 공모를 두고 나온 말이지만, 지금까지 수수방관하던 유인촌 장관이 입을 열었다는 것은 뭔가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인촌은 갈등을 봉합하는 성공적인 조정자로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시네마데크에 대한 공세가 줄어든다고 했을 때, 영진위는 지금껏 해 오던 뻘 짓거리를 그만둘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 번 풀려나간 개떼는 절대로 그냥 주인에게 돌아오는 법이 없다. 계속해서 작은 약점을 들쑤셔서 큰 약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어쩌면 파시즘이 활개치던 히틀러 정권을 지금의 정권이 닮았다고 말하는데, 나치를 유명하고 강력하게 만들어준 것중의 하나는 바로 전격전이라는 개념이다. 단시간내에 가능한 많은 병력을 일점집중해서 대열을 무너뜨리는 것. 이 미친 개떼들이 어디로 또 달려나가든 그것은 이제 그냥 남의 일만은 아니다. 너와 나의 연대가 강력히, 더욱 더 필요한 시점이다.

 

 

2010년 3월 1일 월요일

소비자의 권리


적립금 폐지를 막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소비자의 진정한 권리는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약속을 얻어내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의 할인 정책이 초기에는 충격이 될 수 있었겠지만, 어차피 출판사들이라고 그냥 손 놓고 당하지는 않는다. 할인 폭만큼 책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왠만한 책은 만원 이상은 있어야 구입할 수 있다. 그럼 이런 피해는 누구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가? 소비자가 저렴하게 구입할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해도, 그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원짜리 책 한권에 10 %, 천원을 할인받는다 했을 때, 열 권이면 만원이다. 물론 만원이 작은 돈이 아니다. 십시 일반이라고, 만원이 열 번 모이면 십만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계산은 그저 개인의 탐욕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내 호주머니로 들어오는 천원이 모여서 백만원이 되고, 천만원이되고, 몇 억원이 되어서 좀 더 건강한 도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글에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적립금의 사용처를 마치 네이버 콩 기부를 하듯이, 소비자가 선택해서 기부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어떨까.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인터넷 서점의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기금을 만들수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모인 돈으로 출판 지원 기금 같은 것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정말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사에게 소비자의 이름으로 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소중한 일이고, 소중한 경험일진데, 정작 책을 구입할 때에는 아주 작고 개인적인 탐욕에 우리는 종종 휘둘린다. 인터넷 서점들은 문광부에서 폐지/수정하려는 정가제 법안에 대해 '소비자의 권리'를 이유로 반대를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책 값이 좀 더 값지게 쓰여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