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3일 수요일

검은 숲






"… 이봐,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야?“


둘둘말은 외투를 머리 밑에 고여 주면서 그가 말했다. 나를 보면서 뭐라고 한참 말했던 것 같은데 귀에 안개가 잔뜩 들어찬 것처럼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가 동그랗게 뜬 작은 눈을 깜박인다. 그 때마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딸각. 딸각 소리를 내면서 끊어진다. 먼지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빛의 모르스부호들.


한참을 나를 들여다보면서 뭐라고 말하던 그가 잠시 사라졌다. 갑자기 하늘이 열린다. 눈이 부셔 눈물이 나온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코끝이 간지러워 온다. 빽빽이 들어찬 오래된 나무들을 뚫고 햇살이 떨어지는 걸 보면 지금은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각일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누워 있었던 것일까. 숲에 들어올 때 시계를 벗어서 이끼 낀 작은 바위위에 올려놓고 온 것이 생각난다.


손가락 끝을 조금 움직여 본다. 움직인다. 이번엔 팔을 들어 얼굴로 올려본다. 약간 저릿한 느낌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천천히 움직일 수 있다. 왼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하늘이 반 쯤 가려진다. 발아래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그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두꺼운 나무  껍질에 물을 담아 왔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참을 걸어도 이 근방에서는 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찾아 왔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이 숲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나무껍질에 담긴 물은 맑고 차가웠다. 약하게 느껴지는 단 맛은 나무껍질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을 마신 목 아래쪽이 잠시 유리병처럼 투명해진다. 이제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자. 이것도 같이 먹어봐. 눈 딱 감고 그냥 씹어 삼켜.”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내민 열매는 진홍색의 동그랗고 조그만 열매였다. 삼키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럽게 생겼다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물에 씻어 왔는지 껍질에는 물기가 약하게 어려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냄새를 슬쩍 맡아 본다. 숲의 풀냄새와 흙냄새, 향긋한 바람 냄새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꽤 맛있는 열매일 것이라는 예감. 그의 경고는 걱정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열매는 맛있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이 숲속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열매는 지독하게 쓰다.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입안이, 목구멍 속이 시커먼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물을 건네주던 그가 슬쩍 웃는다.


그가 어깨 밑으로 팔을 넣어 상체를 일으켜 준다. 아까 보다는 몸의 감각이 많이 돌아오는 것 같다. 나무뿌리처럼 옹이진 그의 손마디를 등이 느낄 수 있다. 그의 도움으로 나무 등걸에 기댄다. 조금 더 정신이 든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시간이 정오쯤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숲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사분면 한 자락 이었다. 정오의 햇살이라고 생각 했던 것은 멀리 산등성이 쪽으로 기울고 있는 오후의 태양에서 오는것 이었다. 어쩌면 그 햇살이 누워있는 동안 나른함을 더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가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처음 숲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리고 동행을 시작한 후 그가 사라졌을 때. 나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나를 다독였다. 어쩌면 그는 내가 만들어낸 숲 속의 유령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차피 혼자 들어온 숲이기 때문에 누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걷는 것에 익숙해 질 때 쯤. 그는 다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 질문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보면서 싱긋 웃기까지 했다. 손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같이 걸어갈래요?”


그가 처음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렇게 그는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다섯 밤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 졌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위성처럼 내 주변을. 아니, 이 숲속 어딘가에는 분명히 그가 걷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킬 것이다.
 
 
 
첨부 이미지 : 김명숙, the unknown passage 198X134cm 혼합매체. 1993

댓글 2개:

  1. 궁금하네요. 이 문장들을 단숨에 쓰셨을까, 아님

    오래오래 적어오신 어떤 이야기의 한 부분일까..

    이것으로 충분하기도 하고, 이다음이 있을 것도 같고

    전자와 후자,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가 않아서 말이죠.

    첫문단에서 기형도를 연상했지만, 끝문장까지 다 읽었을 때는

    하루끼가 생각났어요.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그의 공간들을 닮았어요. 하지만 왠지 다정한 숲이라고 생각해요.

    이숲을 너무 잘 아는 그는, 오래된 나무의 정령일 것 같아요.

    그 남자가 기대고 누웠던 나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정말로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킬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부분이 가장 좋네요. 멋진 글, 감상 잘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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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주 오래도록 마음 속에서 익을 때까지

    견딜 수 없어서 뼈가 울릴 때 까지 기다려서

    단 한 번에.



    씁니다. 숲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경험이 토대입니다. 일백프로 같지는 않지만, 시계를 숲 입구에 벗어두고 들어간 부분은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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