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4일 수요일

아니다, 인간이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밝힌 상현은 태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아직은 상현이 뱀파이어라는것을 두려워 하는 태주는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한다. 도망가려는 태주를 상현은 화장실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이해할 것을 종용한다. 이때 화면 왼쪽의 거울에는 상현의 모습이 비춰진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다. 뱀파이어는 그림자가 없다. 이것은 뱀파이어 전설(장르)의 아주 오래된 '전통' 이다. 뱀파이어가 인간이 아닌 (어쩌면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거울에 모습이 비춰지지 않거나 그림자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옮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에서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누구인가 ? 그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다. 이 장면을 단순히 태주의 위치가 거울에 비춰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거울 속에 두 사람은 함께 비춰지지 않아야만 했을까? 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을 보아야만 했을까? 거울에 비춰진 상현은 누구(무엇)인가 ? 그리고 거울 바깥의 태주는 또 누구인가?

뱀파이어는 육식 동물(?)이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뱀파이어는 마치 여우가 닭을 잡아 먹듯 인간의 피를 마신다. 중요한 점 한 가지. 뱀파이어는 결코 희생물의 '살'을 먹지 않는다. 오로지 피를 빨아 먹을 뿐이다. 피는 생명의 정수다. 그러므로 뱀파이어가 피를 빠는 것은 식욕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격렬한 욕구, '갈증 thirst' 이다. 그림자도 남지 않고, 거울에도 비춰질 수 없는, 죽어있는 자인 뱀파이어가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려는 욕망, 지금 여기에 살아있기 위해, 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희생물의 생명을 찾아 내미는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격렬한 욕망인것이다.

그렇다면, 상현은 정말로 '뱀파이어'인 것일까?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일종의 뱀파이어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를 시도한다. 상현이 거울에 비춰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존재론적으로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현이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이 가득한 뱀파이어라고 오해는 하지 말자. 그는 여전히 뱀파이어다. 그런데 그는 인간인 척 행동한다. 포식자로서의 능력과 자격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낭비한다. 자살자들의 피를 빨면서 그들의 죽음을 도와 주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태주를 설득하려한다. 그는 뱀파이어로서의 조건 혹은 상태가 아닌 뱀파이어로서의 태도를 문제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자가당착. 차라리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다. 라고 말하자.







댓글 3개:

  1. 아, 둘이 아니라 셋이군요.



    그때, 거울 바깥에 있던 태주, 권태로운 태주는요..

    뱀파이어가 되고서야, 비로소 인간일 수 있었던 걸까요.

    가여운 존재는 상현보다도 태주 같습니다.

    사실 박찬욱 감독 영화중 가장 집중이 안 됐던 영화인데,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감흥은

    왠지 눈여겨 보게 됩니다. 희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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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슈풍크 - 2010/02/25 00:16
    존 보이트 주연의 <폭주 기관차>에 보면 탈주범인 주인공을 두고 교도소장이 '이 괴물 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주인공은 그에 답해서 '아니, 더 지독한 것. 인간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니다, 인간이다'는 제목은 이 부분을 생각했습니다. 보지 않으셨다면 꼭 구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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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느림보 - 2010/02/25 07:32
    보지 않은 영화네요.

    인간 존재에 대한, 아주 명료한 답을

    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꼭 보겠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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