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영화 경계의 확장과 유희
-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의 2000년 개봉작 3 편에 대하여.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이름 표기는 가나다 순)는 소위 흥행성과 작가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평가 된다. 적어도 본전치기 이상의 티켓 파워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평단'의 호응과 관심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들의 출발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00 년은 언급한 세 감독의 작품이 (어쩌면 공교롭게도) 모두 개봉된 해이다. 김지운은 <조용한 가족>(1998)이후 2 년 만에 송강호를 주연으로 내세워 <반칙왕>을 발표한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강제규의 <쉬리>(1998) 이후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다. 그리고 봉준호는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을 내놓는다.
지금은 모두 독특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이 세 감독들은 당시로서는 비대중적인 요소들을 대중적 감성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영화 잡지들에는 '김지운식 유머'라는 신조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굳이 해석을 곁들이자면 좀 썰렁한 것 같은데 피식하고 웃게 되는, 웃음의 포인트가 엉뚱한 곳에 던져지는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에서 잘 드러난다. '학생은 인생을 아느냐'는 자살자의 질문에 '저 학생 아닌데요' 하는 식이다. 차기작으로 발표한 <반칙왕>역시 다르지 않다. 가면을 쓴 대호(송강호)가 아버지(신 구)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는 장면의 비장함은 '나이 값을 못한다'며 타박하는 아버지의 돌발행동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간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 The Host>(2006)이 까이에 뒤 시네마에 소개 되었던 기사의 제목은 '삑사리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정작 '삑사리'의 대가는 따로 있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이다. 그는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으로 영화평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영화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삼인조>(1997)로 박찬욱의 감성은 한국 시장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재차 증명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지나치게 산만했다. 주제가 보이기는 하는데, 따라가기엔 뭔가 숨이 가빴고 불친절했다. 외형적으로 필름 느와르의 변형처럼 보이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이 딱 그랬다. 어쩌면 배창호의 <고래사냥>(1984) 혹은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이명세의 <개그맨>(1988)의 다른 판본으로도 보이는 <삼인조>역시 다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고래사냥>과 <바보선언>은 같은 1984 년도에 개봉한다.)
봉준호의 <플란더스의 개>는 이러한 '비주류적인 감수성'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유희한다. 후드티의 모자끈을 질끈 당겨 묶고 아파트 옥상을 달려가는 현남(배두나)의 뒤 쪽으로 노란색 우비를 입고 환호를 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의 모습은 TV 애니메이션 <딱따구리>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나무통을 타고 뛰어내리는 딱따구리에게 환호하는 관광객들의 우비 입은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교수가 되기를 원하는 시간강사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 작품은 97 년 IMF 이후 '초라한 남성'을 다루는 영화의 유행에 편승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손쉬운 위무를 건넴으로써 대중의 호의를 갈구했던 영화들과는 다른, 어쩌면 조금은 불편한 영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플란더스의 개>를 전복적이라는 수사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첨예할 수 있는 소재를 슬쩍 비껴선,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시선으로 비아냥거리듯 묘사하는 봉준호의 영화는 애초에 편안한 대중영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삼인조> 이후 3 년 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내놓는다. 그 전까지의 박찬욱 의 영화를 기억한다면 생소할 수도 있는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극한 상황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하고 독특한 블랙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정부 지원은 최대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간섭은 최소화'라는 기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이란 없지만, 당시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에 기인한 일종의 '해빙 무드'가 아니었다면 <공동경비구역 JSA>가 유사한 소재의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던) <쉬리>의 흥행기록을 갱신 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직접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지난 세대의 잔유물인 '군사분계선'을 무대로 벌이는 일종의 환상극이다. 군사 분계선은 적과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현실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가상의 장소이다. 철조망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총알은 진짜 총알이지만, 그 총알이 발사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정치도, 체제도 아닌, 전 세대에서 지금 세대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물려받은 유산이다.
김지운의 <반칙왕>은 무기력한 회사원이 프로레슬링을 통해 자신감을 찾으려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바로 반칙을 하는 것, 그것도 '반칙왕'이 되는 것이다. 유비호 (김수로) 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대호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링 위에서 대호의 캐릭터는 바로 '반칙왕'이다. 반칙왕이 이긴다 해도, (반칙을 했다면) 그것은 진짜 승리가 아니다. 대호의 승리는 경기의 룰을 무시하고 파괴해야 얻을 수 있다. 내가 합의하지 않았던 (이미 당연하게 제시된)룰을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순응 할 것인가.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 아마도 김지운은 슬쩍 유보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담 같은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최종보스'인 부지점장(송영창)과의 결투에서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진다.
<플란더스의 개>에서 우리는 아주 무기력한 지식인 남성 주인공을 본다. 그는 아내의 퇴직금으로 교수직을 청탁하려고 한다. 요즘 '떡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검찰과 '3 대 유력 일간지'들이 열심히 유행시키고 있는 '달러로 비자금 찔러주기'를 영화 속 고윤주(이성재)가 알았다면 좀 더 폼 나게 청탁을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이 남자는 우직하게 케익이 뭉개지건 말건 박스에 만 원짜리 현금 다발을 우겨넣는다. 정당한 절차가 아닌 금품이 오가는 청탁이 필요한 영화 속 '교수 사회'도 한심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아내가 가져오는 돈만 있으면 지금의 현실적인 곤란함이 해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주인공 역시 한심하다. 봉준호의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양비론으로 빠져버릴 위험도 있었지만, 어쨌든 심각하게 편파적이거나 틀린 묘사는 아니었다.
어쩌면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는 세 감독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두고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00 년에 개봉했던 세 감독의 작품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희미한 사진으로만 존재하거나(공동 경비구역 JSA), 혹은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여성화된 아버지의 모습이거나(반칙왕) 아버지 세대의 규칙에 어쨌든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플란더스의 개) 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들은 단순히 젊은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불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통과제의를 겪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조망하는 시각을 제시했다.
불화가 일어난 상황을 제시하고, 결국에는 그 불화를 딛고 화합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대중영화 화법의 주요한 방식이다.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들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대중영화 화법의 규칙 상당부분을 벗어난 지점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전의 영화들과 변별점을 가진다. 이들의 영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규정지어진 경계를 허물거나(안티 히어로 주인공의 실패담, 반칙왕), 확장하거나 (만화적 상상력과 표현의 도입, 플란더스의 개), 또는 이제는 조금 덜 곤란해진 질문(JSA, 분단 상황의 당위성)을 통해 찔러 들어옴으로써 대중영화 작법의 형질 변경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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