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4일 금요일

이사 갑니다.

 

이사 갑니다. 일단은 구글의 서비스인 블로거닷컴의 특성이 어떤지 파악하기 전까지 티스토리로 이사갑니다.

 

http://slowland.tistory.com

 

 

 

2010년 6월 1일 화요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멈춤. 이것은 사과다. 라는 판단을 잠시 멈추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처음이라고 영화 속 김영탁(택)시인이 말한다. 그것이 진짜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다는 광학작용, 그 광학신호를 뇌가 해석해서 내놓는 해답. 이것은 사과다. 라는 답을 잠시 멈춰 보는 것. 완전히는 아니지만, 일정부분 홍상수의 <하하하>와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보는 것. 진짜로 보는 것. 그렇게 '시작' 하는 것.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화이팅 한나라당.

 

 

 

1 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일등을 뽑지 않으면 된다. 기호 1 번. 한나라당. 화이팅.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단순한 것이 최고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어서 재료가 뭐뭐 있나 생각해 보니,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단순한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시금치 파스타. 당근과 양파와 후추콩, 메주콩, 고추, 올리브로 눙근히 야채 육수를 만들어 놓고, 마늘을 다져서 달군 팬에 올리브 오일과 함께 볶은 다음, 삶은 면을 올려서 소금 약간과 휘휘 섞어 주다가 시금치 큼직하게 썰은 것은 털어넣고, 마지막에 불 끄기 전에 육수를 네 국자, 올리브 오일 조금 더, 이렇게 충분히 부어서 다시 휘휘 섞어주고 끝. 맛은, 상상이상이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요리를 완성할 때의 기쁨은 대단하다. 나만의 시금치 파스타 레시피 완성.

맛있게 먹었습니다.

+ note 일단은 콩을 넣어 끓인 야채 육수와 시금치의 향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알고 싶어서 그냥 만들었는데, 다음에 다시 만들때에는 화이트 와인을 조금 사용해 봐야겠다.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이명박 똥에도 이름 써 넣을 기세

 

 

 

 

 

솔직히, 너들 하는 짓 보면, 어디 원사 쯤 되는 놈이 조사지역 지나가다가 '북한 문구가 씌여진' 쇳조가리 하나 'ooops!'하고 흘리고선 표표히 사라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실적 올리려고 용의자 변기에 마약봉지 쳐 넣고는 그거 찾았다고 구속해 버리는 나쁜형사 처럼 말이지. 믿음이 안가.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시>

 

<시>의 마지막, 카메라는 장소들을 떠돈다. 망실된 장소들과 시간들을 거치며 우리는 양미자가 쓴 시를 듣는다. 유령의 음성이 들린다. 사라지지 않았어야 하는 말들. 들리지 않았을 말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맨 처음에 죽은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서게된다. 이것은 차라리 간절한 부름이다.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나는 공산주의자다

 

 

 

자주 찾는 서점에 들렸다가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책이 눈에 띄어 구입했다. 두 권짜리로 이루어진,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작품이다. 아직 완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에게 '비전향 장기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보는 것 같다. 책 내용중에 출소한 주인공에게 형사가 찾아와 '남한이 좋습니까. 북한이 좋습니까'라고 재차 질문하는 부분이 있다. 이 질문은 사상과 신념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단순히 장소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로 축소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공산주의가 좋으면 공산국가로 가지, 왜 여기서 살고 있느냐?'는 것. 이러한 사회적인 한계는 출근길에 읽으려고 처음 들고 나온 오늘 제대로 느꼈는데, 손에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으려니, 책을 한 번 보고는 슬쩍 놀란 눈길로, 그러나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내 얼굴을 흘끔 거리는 시선들을 느꼈다. 그 순간 '아 이거 아직도 신념과 사상의 자유는 보편적으로 용인받지 못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좌파척결'이라는 말이 떳떳하게 통용되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신념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하하하> -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꿈. 꿈이다. 꿈만 같다.

영화 속에서 문경(김상경)은 꿈을 꾼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이 그대로다. 그는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밤과 낮>에서 하숙집 주인 장선생(기주봉)은 성남(김영호)에게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하하>에서 통영 향토 역사관 관장, 그러니까 역시 똑같은 배우가 연기한 장관장은 문경(김상경)에게 공식 영정이 아닌 '좀 더 토속적으로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영정 그림을 보며 아주 닮았다고 말한다. (배우 기주봉 씨는 여전히 안내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중이다.) 그러니까, 문경은 이 모든 것들을 경유해서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들은 <밤과낮>을 지나고 <하하하>에 이르러서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 될법한 성남이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수염이며 갑옷이며 재연이라고 하기엔, 꿈이라 하기에도 너무 조악하다. 이 모든 것이 장난 같다. 그래도 문경은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며 눈물을 쏟는다. 문경은 이순신 장군에게 '좋은 것만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꿈에서 깨자마자 꿈속에서 들은 말 들을 적으려고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말 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겪고 들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시도 적기 시작한다. 이순신장군은 꿈속에서 연습 삼아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쓸 것을 제안한다. 그러니 문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알아채고 있는 것 보다 더 많다. 여하튼, 나는 일요일 치고는 일찍 일어난 아침에 이 글을 적고 있다. 꿈속의 이순신 때문은 아니다.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어제 보았던 영화 <하하하>에 단단하게 눌러 붙어있는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같은 옷만 주구장창 입고 나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극장전>의 경수가 입고 다니던 오리털 패딩 점퍼는 홍상수 감독의 옷이라고 한다. 하루, 또는 대략 일주일 내의 사건만을 다루는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옷차림이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인물이 한 가지 옷만 입는다고 해서 크게 거슬릴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하하하>에서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때 거슬린다고 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꾸 눈길을 끌어서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배경이 여름이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하루 입은 속옷이며 티셔츠며 양말을 모조리 빨래통으로 던져 넣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 속 통영은 비도 자주내리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분명히 땀도 많이 흘리고 눅눅해 졌을 그 티셔츠를 보게 될 때마다, 마치 <극장전>의 남산타워처럼 굳이 보려들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처럼 보였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아주 뻔뻔하게 일상성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마치 문경의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나뭇잎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해 습관처럼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질문을 생각하고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그냥 나뭇잎 일진데, 굳이 '이것이 무엇'이냐며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것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혹스럽다.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 일으키는 균열의 족적 같은 것이 홍상수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일상성은, 비일상성으로 연결되는 통로, 혹은 표지판 같은 것이다. 여하튼, 급기야 영화 중반쯤 넘어서자 티셔츠의 제대로 펴지지 않은 깃에 자꾸 눈길이 가면서 영화 속 시간대로라면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날법한, 눅진하고 두터운 홀애비 냄새가 아주 정직하고 실체적으로 코끝에서 맴돌 정도였다. 분명히 문경은 중간에 흰색 셔츠나 집에서 입는 티셔츠로 갈아입지만, 그냥 잠간 벗어놓고 빨지 않은 채로 다시 입었을 것처럼 보이는 후줄근한 주홍색 셔츠는 상큼한 여름 그 자체 같은 왕성옥(문소리)의 종아리와 짧은 머리와는 반대지점에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무언가 고여 있다. 무언가 변하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끈질기게 고여 들고 있다' 는 이상하고 낯선, 그러나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감각.  

여행을 떠나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선배 성우와 함께 청평사를 찾아간다. 선착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서 두 남자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문은 문이되, 들어설 수 없는 문인 회전문 전설을 이야기하던 두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 나온다. <하하하>에서 주인공 문경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 영화평론가인 선배 중식(유준상)과 청계산에 오른다. 이 과정은 올라가는 뒷모습과 내려오는 앞모습의 두 장의 스틸 컷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두 남자는 청계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은 것 같다. 청계산 기슭 어디쯤에서 막걸리로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여행은 극점에서 극점으로 연결되는 운동이 아니라 대략 언저리 어디쯤에서 잠간 고였다가 다시 떠나가는,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이동, 단순하고 기능적인 자리바꿈이다. 이들은 여행지에서까지 떠나온 곳과 다를 것 없는, 어디에나 있는 공간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들어간다. 가령, 술집과 식당, 여관, 모텔 같은, 위상학적 지표, 지역적 특성들이 모조리 지워진 지점들을 전전한다. 이들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날 수 만 있다면 정체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는다. 정호(김강우)의 말처럼 삶에서 삶이라는 '이름'을 걷어낼 때,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닥뜨리는 것 같다.

나는 <하하하>를 보면서 여간해서 웃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는 흑백의 스틸사진 속에 고여 있고, 과거는 생동하는 이미지들로 보여진다. 그리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자'고 다짐하고 시작하는데, 이 말은 꼭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 같다. 고인(의 시간)을 모독하면 안 된다. 지나간 시간을 좋게 기억하자. '좋은 것만 보자'는 다짐은 좋은 대상만 보자는 것 보다는 좋은 '태도'로 보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라도, 지나간 삶을 긍정해야만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어렴풋한 다짐은 <극장전>에서 동수가 '생각을 하자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마지막 말과 겹쳐진다. 오로지 남겨지는 것, 기억 속에(서라도)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은 과거일 뿐인데,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는 고여 있고, 정지된 채로 남겨졌거나, 죽어있다. <하하하>는 죽어있는 (자들의) 이미지와 목소리로 회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객석의 누군가 발을 구르며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자신의 발밑에 정말로 단단한 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고 구르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좌석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정말은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냐, 동물이냐.

문경의 어머니는 그에게 '영생아파트'의 열쇠를 건네준다. 과연 어떤 건축업자가 이렇게 괴이쩍은 이름의 아파트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문경은 그 아파트가 꼭 '동굴'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애초에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의 죽음에서 출발해서 계속 한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삶을 향해 계속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영생과 비슷하다. 계속 되는 삶. 계속 해서 같은 것들만 반복되는 삶. 더 이상 선택 할 수 없이, 집도 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삶.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 그러니까 영화의 화자가 되는 인물들은 집이 있음에도 바깥으로 떠돌거나, 거의 묘사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집에 들어가기 너무 싫어' 하는 인물들 같다. <생활의 발견>을 두고 집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러니까, 집이라는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욕망하는 경수의 여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하하> 역시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은 타인의 집(앞)에서 집(앞)으로 전전한다. 이 모든 문들은 단단히 닫혀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가랑이를 벌려준다. 그러나 남자가 원하는 대로 곧이 받아주지는 않는다. '재미 보았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젊으니까, 남자니까, 니들도 그러잖아'라며 당당히 면박을 주고 떠나간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향해, 그러니까 자궁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하지만, 여자들이 열어주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그저 아랫도리 일 뿐이다. '생각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극장전>의 동수는 어쩌면 이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식이 큰아버지 앞에서 개처럼 절규했을 때, 그러니까 '이 여자라면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집은, 어머니는,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때, 남자는 동물이 아닌,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꼭 문경의 아버지로 한정지우지 않더라도, 남자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여자를 자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냐, 동물이냐. 는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지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아주 오래된 결심을 다시 떠올려 볼 때, 그나마 괴물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진데, 그렇다면 동물은 괴물이 아닌가? 문경은 어머니가 '하는 것 봐서' 줄 수도 있었던 집을 '동굴 같다'며 거부함으로써, 동물이 되기를 거부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동굴 같은 집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호는 이 동굴 같은 집에서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나고) 사람이 되어서 종국에는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하하하>에서 문경은 어떠한 사람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배우 김상경이 등장한 <극장전>, <생활의 발견>에서도 거의 유사하다. 어린애처럼 대책 없는 덩치 커다란 이 남자의 속내는 겹겹이 가려져 있거나 쉽게 오인된다. 반면, 중식의 현재 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그려진다. 그는 어찌 보면 <밤과낮>의 성남처럼 보인다. 그는 기혼남이고, 아내 몰래 만나는 애인이 있다. 그는 항상 웃지만, 우울증이 심해서 약을 복용한다. 문경의 웃음은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순간 제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무엇 같다. 자신이 굳이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사람처럼 보인다. 서울을 떠나온 이들이 머물고 있는 통영은 마치 이들이 천천히 흘러서 결국엔 고여 버린 장소 같다. 문경이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려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시켜주지 않아' 교수직에서 짤렸고, 영화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금치산자에 가깝다. 어쩌면 더 이상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문경이 정말로 캐나다로 떠났는지 확인 할 수 없다. 두 남자는 영화의 제목처럼 하하하! 하는 호쾌한 웃음을 던지며 퇴장한다. 또는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행복한지 우울한지 우리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건 거의 위협에 가까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도출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반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삶은 계속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가, 우리는 흘러서 또 다른 곳에서 고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홍상수가 점점 체념 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마도, 죽음이 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때, 홍상수의 영화에서 또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2010년 5월 7일 금요일

황진미. 평론.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씨네 21 의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마치 꼬장꼬장한 아주머니가 음식점에서 웨이터에게 '점장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면 평론이란 무엇일까. 그냥 무조건 딴지를 걸고 들어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영화를 평론한다는 것은 내가 영화와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에 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나 말고도 불만을 말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 굳이 남들 하는 짓을 따라하는 것에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2010년 5월 4일 화요일

<시리어스 맨>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계

<시리어스 맨>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계
그럼에도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

 

조금 뒤늦은 첨언이지만, 지지반박 코너는 영화자체에 대해서 지지 하거나, 그러니까 동감하거나, 동감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이유를 밝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영화(자체)에 대한 지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잘 알지 못하겠다.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하겠다.) 그냥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지가 있을 뿐, 영화 자체에 대한 지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과연 지지하는 행위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미리 말을 해두고 넘어가자. 이 글은 영화 <시리어스 맨> 자체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박영석 에디터의 글에 대한 '이견'이면서 동시에 조금 다른 방향에서의 지지가 될 것 이라는 예감, 그러니까 일종의 측면 지원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애초에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으로 지지반박을 이끌어내 보자고 이야기가 된 시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어떤 형식으로든 '흠집'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동감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두고 지지반박을 감행하는 것은, 지지하고 반박한다는 행위 자체가 영화를 사이에 놓고 '싸우는'것이 아니라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반박이라는 행위는 영화의 속살을 조금 벌려보는 것이다. 이건 아주 미미하지만 분명히 에로틱하고 직접적인 연애 행위다. 서로의 시각에서, 각자의 방법론으로 '슬쩍' 벌려보는 행위는 그러나 해부행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해부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조망'을 밝혀내고 기록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이러한 2 차적인 독법의 드러냄을 통한 겹쳐보기는 분명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아가 영화 그 자체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을 잊지 말자는 다짐.

 

불안, 끊임없는 불안.

 

<시리어스 맨>은 정체를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영화다. 박영석 에디터는 "'본질'의 본질은 규명되지 않음에 있으며", "차라리 진지한 사람보다는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더 좋다"라고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나는 조금 다르게 이 영화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근원적 불안에 대한 '시리어스'한 이야기, 혹은 불안에 대한 증명이다. 영화의 조금 뒤쪽에서부터 이야기하자. 성인식을 마친 대니가 랍비 마샤크에게 다가가는 실내 장면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대니의 시점으로 실내의 여러 가지를 둘러본다. 온갖 책들과 액자들, 포르말린에 담겨있는 정체불명의 표본들, 지구본, 장식물들 사이에서 카라바지오Caravagio의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1601-1602)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의 모티브가 된 에피소드의 내용은 이러하다.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딜레마에 빠진다. 이삭은 야훼와의 약속의 열매였다. 그런데 야훼는 이 열매를 ‘파기’하거나 되돌려 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야훼는 십계명의 제 6 계명을 정면으로 부정할 것을, 즉 존속살해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아들의 생명을 지키면 야훼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면 아들은 생명을 잃는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해피엔딩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명하고, 이삭도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의 덕목은 창조주에 대한 순종이다.

 

래리가 직면하는 근원적 불안의 순간들은 영화 <시리어스 맨>을 불가해한 현실의 그림자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주인공 래리와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래리는 아브라함처럼 신의 음성을 들은 적도, 불타는 나무를 본 적도 없다. 래리의 세계에서 게시와 말씀은 희미한 흔적으로 존재한다. 적어도 구약의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불안의 기원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신의 음성이 내리는 명령을 들었고, 복종을 맹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의 진의를 아브라함은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을 넘어선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은, 래리에게는 고스란히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를 두고 구약의 욥기를 떠 올리지만, 굳이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아브라함의 에피소드에 더 가깝다. (물론 매일 화농을 짜내야 하는 래리의 동생 아서를 보면, 온 몸에 종기가 돋은 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유태인인 래리는 그다지 신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래리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계시는 존재한다. 래리는 TV 안테나의 방향을 잡기위해 지붕에 올라선다. 지붕위의 TV 안테나는 우리시대의 불타는 나무다. 래리가 안테나에 손을 대는 순간 기계인 TV 만이 수신할 수 있는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도 들어온다. 래리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발가벗은 이웃집 여인을 훔쳐보던 래리는 정신을 잃고 지붕위에서 추락한다. 그 순간, 래리는 계시의 순간을 경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시리어스 맨>은 믿음과 계시가 부재하는 시대의 자화상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불안의 징후들을, 이 모든 명징한 계시들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들을 껴안고 살아가야만 할 것을 강요받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몇 가지 명제들

 

첫 번째 명제. '대니는 래리의 아들이다.' 영화의 앞쪽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이 영화의 앞부분을 잘못 이해했다. 래리와 대니를 동일 인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대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래리의 플래시백으로 이해했다. 래리가 병원에서 오른쪽 귀를 검사 받는 원인으로 어릴 적(대니)의 우측으로 ‘편향된’ 음악 감상 버릇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라디오와 이어폰은 마치 보청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엉뚱한 오인은 곧 깨어진다. 학교와 직장에서 돌아오는 두 인물이 같은 공간에 등장하는 장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오인’(miss-understand 혹은 miss-matching)은 이 영화의 어떤 규칙 같은 것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무의미 하더라도 서로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이 느슨하게 얽히게 되는 현상. 바로 우연(coincidence 혹은 co-incidence)이다. 우연은 예측과 제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래리가 의사에게 귀를 보여주는 것과 대니가 음악을 오른쪽으로만 듣는 것, 래리가 성적표를 고쳐 쓰는 것과 대니의 학교를 향해 몰려오는 토네이도, 래리의 접촉사고와 싸이 에이블만의 죽음, 이러한 행위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혼을 종용하는 아내와 연인관계라는 싸이 에이블만은 그다지 달콤한 연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트로의 시대를 알 수 없는 에피소드와 래리의 가족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한 자리에 놓여 질 때, 그러니까 예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어떤 것들이 한 자리에 놓여 질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래리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I'm not done anything!' 고 절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구약의 희생양보다도 더 무구하다. 우리는 래리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당신의 문제' 라고 말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직장인, 평범한 가장의 아버지, 원칙이 또렷한 학교의 선생님, 가장 평균적인 미국인이다. 잠간, 미국인이라고? 그리고 어쨌든, 두 번째 명제. 래리는 유태계 미국인이다.

 

다시 영화의 끝 부분을 보자. 금전적인 압박에 몰린 래리는 한국 학생 클라이브가 놓아둔 것으로 생각되는 돈 봉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낙제점수인 클라이브의 F를 C로 고친다. 곧이어 C에 마이너스를 더한다. C 학점이나 C- 학점이나 학점을 고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클라이브가 봉투를 놓아두었다. 또는 놓아두지 않았다. 클라이브가 낙제한다. 낙제하지 않는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유니크한 조합들이 존재할 수 있다. 클라이브는 봉투를 놓아두지 않았지만 래리는 성적을 조작한다. 클라이브가 봉투를 놓았고, 그에 대한 답례로 래리는 성적을 조작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렇다면 이 조합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건과 사건 사이, 동인과 동인 사이의 연결고리는 아주 느슨하게 묘사된다. 클라이브가 처음 등장했던 장면을 기억해 보자. 그는 교과서를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둔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래리가 들어오라고 하자 마치 쟁반을 들 듯 허리 높이에 양 손을 사용해 교과서를 든 채로 엉거주춤 들어와 앉는다. 방을 떠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를 옮기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이러한 클라이브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브의 행동은 보는 이의 주의를 끌 정도로 이상하고 어색하다. 말하자면, 클라이브는 텅 빈 기호이다. 우리는 클라이브가 돈 봉투를 놓아두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래리의 클라이브에 대한 추궁은 심증과 정황만 있을 뿐,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부재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눈으로 보았다 해도 언제나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명제.

 

세 번째 명제. '결과를 예측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과를 예측 할 수 없게 된다.' <시리어스 맨>에는 양자역학의 두 가지 측면이 소개된다. 영화의 앞부분에 소개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의 패러독스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고 실험이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사이가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 래리는 꿈속에서 거대한 칠판을 잔뜩 채운 수식을 통해 불확정성의 원리를 강의한다. 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세상만사를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래리의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세상만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증명도 불가능하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불확정성의 원리는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래리는 랍비들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해답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랍비의 지혜를 빌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래리가 끝까지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양자역학적 우주관에서 결과를 예측 한다는 것, 즉, 대상에 대한 관측행위는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랍비의 지혜가 래리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반드시 현재 상황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를 받아들여라

 

촌지를 준(것으로 추정되는) 클라이브의 아버지는 래리를 찾아와 다짜고짜 '문화적 충돌Culture Crash'을 주장한다. 주지도 않았다는 촌지의 댓가가 성적조작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래리에게 Mr. 박은 '신비 Mystery'를 받아들일 것Accept을 권고한다. 만약에 <시리어스 맨>을 성서에 대한 어떠한 우화로 본다면, 이 장면에서 Mr. 박은 창조주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messenger처럼 보인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것을, 그에 순종하는 자에게만이 창조주의 영광이 머물 것을 전하는 천사의 전언. 래리는 랍비들을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랍비들은 래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혜만을 전할 뿐이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자녀들은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어쩌면 (촌지의 불법 수수로 인해) 종신 교수직에서 탈락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빨에 새겨진 메세지며, 그저 주차장을 바라보라는 랍비의 말은 모든 복잡한 사태를 가장 단순하게 바라볼 때,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건넨 것일지도 모르지만, 래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번민들은 불만족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래리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멸, 사라지는 것, 죽는 것, 그러니까.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 또는 혼동

 

래리 본인이 알게 된다면, 너무나도 지겨운 일이겠지만, 이제 다시 사이 에이블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이 에이블만의 장례식에서 랍비 나트너는 신실serious하고, 착한 사람인 사이 에이블만이 왜,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죽어야disappear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애도사를 듣는 래리의 모습에 이어지는 커트는 검은 상복을 입고 흐느끼는 아내의 뒷모습이다. 아직 세상의 법으로도, 유태인 사회의 율법으로도 이혼한 부부가 아닌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이 장면은 마치 자신의 장례식에 초대된 남자를 보는 것 같다. 랍비 나트너와의 면담에서 래리는 자신이 자동차 사고가 난 순간 사이 에이블만이 사고로 죽은 사실을 두고, '신께서는 사이 에이블만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질문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난 두 개의 자동차 사고가 있었고, 정말로 죽은 것은 래리 고프닉이고 여기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을 래리 고프닉으로 착각하는 사이 에이블만이 아닐까? 이 모든 불안과 고통을 떠 안은 채로, 여기 살아 있는 나는, 그러니까 정말로는 죽은 것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직, 그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시리어스 맨>은 각각의 장면들을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통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마치 큐빅퍼즐과 같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퍼즐처럼 선과 면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영화는 아니다.) 각 장면들은 느슨한 가능성들로 조합이 되어있는데, 이 모든 단서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교묘하게 배치된, 오인하기 쉬운 장면들은 이 영화를 더더욱 미궁에 빠지게 만든다. 특히 래리가 랍비들을 방문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첫 번째 랍비를 만나는 장면은 닫혀있는 랍비 나트너의 방문을 보여주는 쇼트로 시작된다. 이 장면은 래리의 시점 숏처럼 보인다. 다음 쇼트는 기다리고 있는 래리의 모습으로 연결 된 후에, 랍비 스콧이 문을 열고 나오는 쇼트로 연결된다. 이 시퀀스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기실의 낮은 벽 프레임으로 인해 래리는 거울에 비추어진 랍비 나트너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때 갑자기 거울의 반대편, 그러니까 래리의 뒤 쪽 (그러니까 상상적으론 랍비 나트너의 공간)문이 열리며 래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랍비 스콧이 등장하는 장면은 공간의 연속성이 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랍비 스콧은 마치 거울 너머 세계에서 래리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회중시계를 든 토끼 같다. (사실 생김새도 거의 토끼에 가깝다.)

 

애초에 만나기를 고대했던 랍비 나트너를 만나는 시퀀스의 첫 번째 쇼트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부감 쇼트로 래리를 내려다본다. 이는 마치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어서 랍비 나트너가 래리를 바라보는 쇼트로 연결이 되는데, 이러한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랍비 나트너와 바라보는 대상과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이 시퀀스가 부감 쇼트로 랍비 나트너와 래리의 모습을 모두 담았다면 이러한 어긋남은 없을 것이다.

 

랍비 마샤크는 누가 만나는가

 

대마초를 피우고 성년식을 치룬 대니는 아버지 래리가 그렇게도 만나기를 고대했던 랍비 마샤크를 면담하게 된다. 그는 대니에게 뭔가 성년식에 걸 맞는 격언을 건네려 한다.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에'라고 말하다가 마치 자신도 그 순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몇 명의 이름을 천천히 호명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니가 라디오로 듣던 곡 'Somebody to love'를 부른 Rock Group 인 제퍼슨 에어플레인 Jefferson Airplane의 멤버들이다. 그리고 대니의 라디오를 돌려주며 착한 아이가 될 것을 주문한다. 이 장면은 클라이브가 래리의 사무실을 방문한 장면과 짝을 이룬다. 대니는 친구와 함께 교무실 서랍을 뒤졌지만 라디오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클라이브가 래리의 책상위에 봉투를 놓아둔 것을 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태인 학교의 교장 선생에서 랍비 마샤크 에게로 대니의 라디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오래된 유태인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나이많은 랍비 마샤크가 대니에게 건네는 덕담은 단순하다. 착한 아이가 되라는, 착하게 살라는 전언. 너무 단순해서 싱거울 수도, 또는 너무 단순해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니는 만족하는 것 같다. 그에게 라디오가 돌아왔고 그 안의 20 달러도 고스란히 그대로다. 모든 것이 평안한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누군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다

 

랍비 마샤크를 찾아간 래리가 '지금은 명상중'이라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당한 뒤 이어지는 쇼트에서 우리는 누군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을 본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랍비 마샤크와의 면담이 거부되자 거의 발광해 버릴 것 같은 래리의 모습을 본 우리는, 그 어두운 그림자의 주인공이 래리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울고 있던 것은 래리의 동생 아서이다. 그는 형이 모든 것을 가졌고, 자신에게는 신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밀러스 크로싱 Miller's Crossing>(1990)의 모자가 날아가는 숲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래리는 아서를 캐나다로 밀입국시키려고 한다. (랍비 나트너는 사이 에이블만의 장례식에서 내세, '올람 하바'가 캐나다 같은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캐나다가 '올람 하바'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미국에서 아서가 저지른 잘못에서 도피 할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래리도 그 만큼 마음의 짐을 덜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뒤 이웃집의 독일계 남자의 총이 아서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악몽-꿈속에서. 그리고 래리의 무의식 속에서, 아서는 죽는다. 래리의 혈욱 아서는 사냥 당하는 동물처럼 죽어버린다. 창백한 현실의 태양 아래에서는 절대로 말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힐 수 없었던, 존속 살해의 욕망은 꿈속에서 어쩌면 아주 어렵지만 확실하고 명확히 실행된다.

 

래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래리는 사이 에이블만을 죽이지 않았다. 불운한 사이 에이블만의 죽음은 래리의 탓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무구하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아내의 애인인 사이 에이블만은 죽었고, 꿈속에서 처치 곤란한 동생은 죽는다. 그러나 래리는 울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울지 않는다. 다만 어스름한 꿈의 기슭의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 울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울었다는 사실. 세상의 어깨 한 켠에서, 누군가는 이 순간 정말로 울고 있다는 사실. 그런데. 그것이 당신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래리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삶의 무게를 짊어진 당신에게? 랍비 나트너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신은 우리에게 답을 줄 이유가 없고, 그는 우리에게 의문을 준적도 없다. 어떤가, 너무도 단순simple하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don't be serious.

 

 

 

 

 

2010년 5월 3일 월요일

끄적...


양손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본다

 

어느쪽이 더 힘겨운지 어느쪽이 더 견딜만 한지..

 

내 맘대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저울에...

 

자유롭고 싶어서 그 무게만큼의 대가를 치루고 외로움을 감수할 것인지..

 

외로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유를 구속할 것인지..

 

자유에 무게가 올라가면 그만큼 외로움은 내려가겠지만

 

외로움에 무게가 올라가면 자유를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꽤 박빙의 저울질이 날마다 마음을 흔든다..

 

자유를 포기할 수 없어 치뤄야 하는 대가가 때론 혹독하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46 용사

 

 


'46 용사'를 추모한다고한다. 그들은 누구랑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다. 그냥 순국한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준 전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한, 등 떠밀려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 사람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부가 나서서 분향소를 운영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서는 조문객이 몇 만명을 넘어섰는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태도에는 죽음에 대한 예우 보다는 이들의 죽음을 선전물로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의심을 걷어내고 사태를 냉철하게 바라보아도, 왜 가장 중요한 상황에 TOD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에 존재하는데도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인가? 피로 파괴가 아니더라도, '물이 자꾸 새서 불안하다'고 하는 배를 무리하게 작전에 투입한 점, 가장 중요한 관측장비의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결정적 순간의 영상이 누란된 점, 이 모든 관리 부실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은채로, 죽은자들을 종이인형 처럼 내세우고 죽음의 잔치판을 벌이고 있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그저 이상하다는 것이다.

 

 

 

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어느날, 불현듯, 돌아선 그곳에.

 

 

“30대에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20세라고 믿어 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면서 세월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눈치 챈다. 늙음을 자각하는 것은 비극적이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돌연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늙음은 고독의 극치이다.”

 

- 장 피에르 멜빌

 

 

외로움이란 하나의 조건이다. 외로움은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며, 순간의 우연적인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흐름의 부정형적 단락 일 뿐이다. 결국 외로움이란, 그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은 항상 외롭지않다. 대개는 ‘무엇 때문에’ 외롭다고 느끼게 된다. 원인이 있고, 그 결과가 있다. 일종의 감정적 역학. 말 그대로 외로움은 ‘느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감정과 감각이란 오래도록 혹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고독이란 근원적이다. 촛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태우는 고요하고 내밀한 불꽃의 혈류 같은 것. 그것은 대면을 피할 수도 없으며 근본적으로 그것을 응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이다. 고독은 거울에 비추어 질 수 있을 정도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내밀한 안쪽으로의 침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식 같은 것이다. 고독은 응시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온 존재로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그 앞에 서는 것이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 앉아 있으면 밝은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심장 박동의 감각이 당신을 찾아온다. 당신의 심장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뛰지 않는다.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하여 심장의 근육은 반복적인 수축을 되풀이 할 뿐이다. 당신이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는 그 누군가 역시 그러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당신의 가족, 동료, 친구. 이 세계에 살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조선일보의 상상력 - 인간 어뢰

 

 


조선일보 22 일 1 면 머리기사에는 '북한의 인간어뢰 개념도'라는 그림이 올라왔다. 상상력하곤.. 하면서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게 또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수중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육지에서처럼 벽이나 돌 뒤로 숨는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폭발음이 진동과 음파의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고막손상이나 기타 피해가 발생한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개념도에는 어뢰 조작자의 탈출 여부는 제외가 되어있다. 이 그림을 보고 대부분은 자살폭탄을 떠올릴 것이다. 자살폭탄이라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비행단을 꼽을 수 있다. 전투중 불능상태가 된 전투기, 폭격기의 파일럿이 최후를 자살 공격으로 마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지만, 비행대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자살 공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을 '특공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살 공격을 획책하는 것은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국가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북한을 그러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상식적인 선택이 일어날 수 없는, 비 인도적 국가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낮에 가스통에 불 지르며 시위를 하시는 어르신들은 그냥 방관하고, 기껏 자그만 촛불 하나 드는데, 화재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 가두는 나라의 상식이란 도대체 뭔지 잘 모를지경이기는 하다. 여하튼 결론은 조선일보 너들이 괜히 1 등 신문이 아니구나. 괴벨스도 울고가겠다는 생각.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작은 연못

 

 

나는 <작은 연못>을 보면서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누구도.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오직 그 마음뿐이었다. 이 먹먹한 고통의 장면들. 주검들. 찢겨지는 육체.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 그렇게 칠흙같은 어둠 속, 몰래 숨죽이고 떠나갔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시 돌아와 주기를. 다시 돌아와서 살아가 주기를 바랬다. 눈물이 맺힌다. 견딜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외수 선생께서 디씨 갤러리의 어느 갤러가 '너는 기억의 메모리, 전설의 레전드...' 어쩌구 하는 시를 자기가 시인이 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한 게시글에 덧글로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달았다고 한다. 요즘에 싸이와 김장훈이 나오는 SK 광고하고, 황선홍 밴드 어쩌구 해서 넷이서 어설픈 안무에 노래 부르는 KT 광고를 보면 내 기분이 딱 그렇다. 무조건적인 국가주의의 발흥. 정말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네다.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천명관, <고래>

 

 


천명관의 <고래>가 좋은 소설인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중에 대다수가 '입담이 좋다'고 하는데, 마치 판소리 사설을 풀어내듯 문장을 끌고가는 실력은 인정하겠지만, 그건 그냥 기술일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나름 재미나게 읽었지만 잘 쓴 소설이고, 좋은 소설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표절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런식으로 독창성이 떨어지는 작품은 그게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기껏 잘 해 봤자 '잘 만든 짝퉁' 취급밖에는 못해주겠다.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자 유

 

 

자 유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白紙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金雀花나무 위에
내 어린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驚異 위에
日常의 흰 빵 위에
약혼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風車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鐘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門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燈帶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

 

 

- 폴 엘뤼아르, p 54-59. <이곳에 살기 위하여>, 민음사시인선, 1987

 

 

 

- 원래 이 詩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 이었다고 한다.

 

 

 


 

2010년 4월 3일 토요일

사진 없음




잊고 있었는데 생각이 났다. 얼마전에 <그린존>을 봤다. <블러디 선데이>부터 굉장히 좋아하게 된 감독인데, 기술적으로도 뛰어나지만, 그저 기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이야기와 생각을 담아내는 힘이 각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각설하고, <그린존>에 보면 이라크인 포로들을 수용한 수용소가 나온다. 그곳 펜스에는 'No Photography 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이 때 자막은 '사진 없음' 이라고 떡하니 쓰여있다. 영화 자체가 군대와 밀접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군사용어는 조금 틀려도 봐줄만하다. 어차피 그건 자막을 안 보면 되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 까지 오역을 하다니. 홍주희씨, 당신은 번역하는 인공생명체 인건가요?




Last Days








어떻게 떨어지는지 몰라
종달새는 허공에서 죽었네.
 
 

- 질 쉬페르비엘, 『중력 Gravitations』. p.198









침묵을 본다는 것




하나의 사진을 잘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 치켜들던가 혹은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라고 야누흐(Janouch)는 카프카에게 말하곤 했다. 카프카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사물을 촬영하는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이지.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법이네.” 사진은 말이 없어야만 한다. (우뢰 같은 사진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려 깊음’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하나의 상태, 즉 침묵의 노력 속에서만 얻어진다. (눈을 감는 것은 영상으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진은 그 흔해빠진 수다스러움으로부터 끌어 낼 때에 나를 감동시킨다.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등이 바로 수다스러움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푼크툼을 발견케 하는)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 둘 것.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p.57


미하일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의 마지막 시퀀스가 끝나면, 우리는 압도적인 침묵을 만나게 된다. 아무 음악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엔딩 타이틀 롤. 처연하고 무심하게 울리던 열차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직은 영화가 끝난 것을 안도할 차례가 아니다. 힘차고 명랑한, 혹은 슬픈, 울려 퍼지는 엔딩 타이틀 음악이 흐르지 않는, 기이한 침묵의 마지막.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마치 눈을 감은 것 같은 이 상태. 듣는 것으로 부터의 침묵, 말하는 것으로 부터의 침묵. 침묵을 눈으로 본다는 것. 영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부터는 현실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 마치,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영원히 지속 될 것 같은 <히든>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크린을 넘어 스멀스멀 현실로, 현실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어오는 이 낯선 감각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설다. 과거는 기억 속에, 그러니까 지나간 시간 속에 있는, 우리가, 당신이 이미 겪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간) 기억과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과거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가 여기, 지금, 현재의 시간 속에 꺼내어 질 때, 과거는 미화되거나 누군가의 추억담처럼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정말로 그랬었나요? 그 기억은 정확한가요?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어떤 말을 했었죠? 그 때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었죠? 그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나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인 척을 하는, 객관성을 흉내 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영화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영화가 결국은 관객과 만든이가 공모하는 기꺼운 속임수라는 사실에 대해 또 한 번의 확인이 필요하다. 영화의 태생적, 기술적, 구조적 요인은 주관성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만드는 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 모두에게 있어 시선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가감 없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급적’ 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위에도 적었지만,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을 보여주고, 그 보여주기를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만약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다큐멘터리는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고 감독은 대답한다. 무언가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제가 되는 것이 이제는 없다. 객관적 사료나, 신문기사, 뉴스 영상,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대로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명성, 그 6일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계속되는 농성과 공권력의 압박으로 피로에 지친 시위 참가자들이 벌였던 논쟁과 의견대립을 다루고 있는 한 장면에서, 감독은 당시 논쟁이 벌어졌던 (곳으로 추정되는) 조그만 소성당 내부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은 후일의 증언과 대담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 내부. 그 위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우들에 의해 재연된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영상이나 음성자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원 감독은 부재를 재연再演함으로서 당시를 재현再現 해낸다.


<과거는 낮선 나라다>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다. 두 ‘열사’의 죽음을 의롭고 영예롭게 포장하지도 않으며,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군사정권의 치졸함과 추악함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시 시위의 쟁점이었던 대학생 전방 입소 교육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다. 카메라의 주요한 시선은 1986년의 죽음 이후로 계속되어온 남아있는 자들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지금 부터는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 시작.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방입소 반대 시위에서 분신한 故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당시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사건은 일간지에 아주 작은 쪽기사 정도로 다뤄졌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혹은 그럴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언론과 국민의 입과 귀를 꼭꼭 틀어막았다. 그저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주어진 삶에 꾸역꾸역 만족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국가는 아버지였고, 성전이었고, 말씀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 하게 된다. 그 누구도, 혹은 아무것도 그 죽음을 기억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게 될 때, 그 죽음은 부재하는 죽음, 존재하지 않았던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묘석은 부재의 증명이며, 죽음의 현존이다. 죽은 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렇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종종 고통스럽다. 그들이 기억하는 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이제껏 그래왔듯 삶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단순하고 명징한 깨달음. 이 둔중하고 날카로운 生의 감각들.


카메라 앞에는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죽은 자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다. 그는 질문한다. 질문은 단답형이다. 그때를 기억하나요? 기억은 정확한가요? 정확하게 몇 시쯤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을 정말로 그 때 했었나요? 아니면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가요? 그 말은 누가 했죠? 정말로 당신이 한 말이 맞나요, 아니면 그때 다른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죠?


이 집요한 목소리,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질문들은 의도적으로 당시의 기억을 불러낸다. 인물들은 화창한 대낮의 배경을 뒤로하고 앉아 있지만, 우리는 인물들이 마치 취조실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한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로 찍혀진 인터뷰 장면들은 소리와 보이는 것의 몽타쥬를 통해 플래시 백 한 번 없이 당시의 공기를 바로 지금 여기, 관객 앞에 꺼내 놓는다. 증언 할 것을, 기억해 낼 것을 담담하고 차갑게 재촉하는 질문들은 80년대 취조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후반 작업을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차가운 감독의 목소리는 취조실 바깥의 어둠 속, 멀리 과거에서 다시 올라온 것처럼 들린다. 만약 당신이 이 목소리가, 이 기괴한 인터뷰를 섬뜩하게 느꼈던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과거의 목소리의 근원이 현재에서도 그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화면 속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 바깥에 철저하게 방치된다. 이 자리는 개입이 용납되지 않으며 동시에 안전하다. 구경꾼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충돌될 때, 이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다. 혹은 과거는 현재의 지속이다. 그런데.


기억은 공유될 수 없다. 기억이 초래하는 감정 역시 그러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타인의 기억은 그저 이야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의 기억은 공공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연민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연민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연민은 종종 상상력이 풍부한 이에게 더 많이 허락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때, 미약하게나마 연민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적어도 이 질문에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취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다.


개인적 감정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객관적 팩트들만을 말할 것을 재촉하는 감독의 질문은 인터뷰이들의 증언들을 통해 관객들을 당시의 현장 속으로, 그 시간을 겪었던 이들이 숨 쉬고 움직였던 공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의 감정적 접촉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관객에게 인터뷰이들의 경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감지될 수도 있었던 순간, 바로 그 앞에서 영화는 한 발 뒤로 슬쩍 물러난다. 혹은 밀어낸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차갑고 잔인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타인과 타인 사이의 이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몹시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영화라는 지적에 감독은 수긍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이 거짓말이라고,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부재와 침묵은 이 영화가 선택한 정당한 방법과 언어일 뿐이다. 만약에 분신한 두 사람에 대해 남겨진 자료들이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에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 부재에 대한 명징한 인식에서 출발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지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흔히 이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여 질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방치하라, 혹은 잊어버려라)’ 는 식으로 통용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의 자장 안에서는. 이 영화의 반 이상이 인터뷰이 들의 ‘말’로 채워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은 거의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당시 사건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정보량은 엄청나다. 이것은 마치 기억의 낱장 카드들을 있는대로 늘어놓고, 그중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려는 끊임 없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말하여질 수 없는’ 과거를 적극적으로 말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말의 체계와 그로 인해 형성된 현재의 기억들과 시간들, 그 중심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당한 말, 정당한 기억의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안락한 현재 위에 편리하게 오도된 침묵과 망각속에 방치되어 있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애도행위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그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말하라. 죽은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
감독 : 김응수



- 영화 비평 웹진 네오 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 에 동시 게재


2009. 8. 1.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이명박은 알고 있다.

 

적지않은 수의 군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 중 몇은 구조가 되었고, 그 중 몇은 생사 확인이 현재로선 불분명하다. 사건 발생 3 일이 넘어서는데, 대통령은 벙커에들어가 현장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 대신 파견된 '명바타' 정운찬 총리는 유족들의 반대로 현장에서 쫒겨났다. 이명박은 알고있다. 자신이 내려가봤자 건질것이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폼나는 사진찍을 건덕지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포토제닉 프레지던트 이명박.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100328







목련 꽃 망울이 하늘 가득.
일광에서는 엔간한 똑딱이보다 쓸만한 아이폰 카메라.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100327




백령도서 해군 함정 침몰. 간밤에 악몽을 꾸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해서 물에 뛰어 들었다. 여기저기 잠수 장비를 갖춘 사람들과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뛰어 들었다. 탁한 물 밑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다행이 그는 물 밑에서 올라와 건질 수 있었다. 온몸이 잔뜩 젖은 사람들이 담요와 따끈한 먹을것을 받기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아니라 열차가 물에 빠진 것이었고,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다음 열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 현실과 무의식의 이상한 연결. 모두 살아있기를. 오우버.



<엘리펀트> 계속 연결되는 삶들



<엘리펀트> 속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같은 프레임 내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일라이가 술에취해 운전하는 아버지를 우격다짐으로 조수석으로 우겨넣는 장면에서 감독은 일라이를 아예 화면의 바깥으로 밀어놓고는 아버지의 횡설수설하는 웅얼거림에대해 무관심한듯 툭툭 쏘아 대는 대답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그 둘 사이의 대화를 구성한다. 지각한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인 교장선생도 한 화면내가 아닌 독립적으로 잘려진 커트에서 일라이를 어쩌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영화속의 대화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구성된다. 허리우드의 영화에서 익숙해진 어깨걸고 찍는 장면은 단 한장면도 나오지 않으며 몇몇 장면에서 어른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어느 한쪽은 반드시 화면밖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런 장면들을 통해 선하고 착한 아이들과 나쁘고 오염된 어른들의 이분법적인 도식이나 그들의 대화가 단절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일어난 것이다라는식의 진술을하려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에겐 너무도 익숙해진 '어떤'것들에서 그 아이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어떤것을 자꾸 떼어내려는 몸짓에 가깝다.
 
  <엘리펀트>에서 인물들의 등뒤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알렉스와 에릭의 총격장면에서는 더이상 그들의 등뒤에 서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등뒤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각 인물들의 시점샷과 유사한 효과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그렇게 등장인물 개개인의 시점과 시간들은 영화속 우연한 어떤 지점들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알지 못하는사이에 미약하게 포개지듯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일상의 속도는 고속촬영을 통해 길고 느리고 충분하게 연장된다. 그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깨를 스치며 길게 끌고 지나가는 그림자,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무의미한것 같지만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의미로든 연결이 되어있다는 당연하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생의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엘리펀트>가 그려내는 삶의 겹침, 스쳐짐은 이런것들이다. 눈이 멀고 벙어리인 사람들이 바로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어간다. 그들 누구하나도 이 행렬을 이끌 수도 없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그렇다고 왜라는 질문도 하지 못한다. 다만 앞사람의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미약한 움직임을따라 계속해서 발을 내딛을뿐이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의 어깨위로 -필연적으로, 알지못하는 사이에- 걸쳐져있고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짐이며 동시에 인도자가 된다.



- 너무 좋아하는 영화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 조금 온도를 낮춰서 쓰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할까.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
 
하울은 소피와의 첫 만남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면 이렇게 말한다. 마법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마법의 언어를 발화하는 자가 그 말의 의미와 힘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하울은 무심결에 그 말을 소피에게 건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걸려있는 '저주'를 풀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라는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하울과 소피는 모든 과정을 감내하고 거쳐야만 한다. 이 모든 의문과 문제의 답은 이미 이 세계의 언어속에 주어져 있다. 바람의 지나감, 햇볓, 안개, 비, 외침과 고통, 전쟁, 탐욕, 시기 그 모든 세계의 언어들 바로 그 속에.

 그것이 바로 '세계의 약속'이다. 약속의 진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발을 내밀어서 계속' 걸어야 한다.


100327



영화가 존재하는 곳은, 영화가 (시시각각) 태어나는 그 공간은 '사이'다. 영화의 물리적 육체는 1초에 24 프레임이라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막면에 맺힌 상(像, image)위에서 구현된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현실의 움직임(혹은 시간의 경과)을 1/24초 단위로 분절시켜서 포획이 되는 그 이미지들이 영사기(projector) 를 통해 시공간적 이미지를 가지는 (또는 그런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움직임으로 구현되어서 관객의 망막에 전달되는 그 순간. 영화는 태어나고 완성이 된다.
 
영화의 물질적 육체인 필름의 1 초 분량, 곧 24 프레임을 놓고 생각해 보면. 1 초 라는 시간은 적어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도내에서는 연속적인 전체이지만, 그것을 카메라는 1/24 frame속으로 분절시켜 포착해낸다. 결국 극장에서 보게되는 움직이는 이미지는 1 초가 24 개로 잘리워지고 멈추어진 순간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렇게 멈추어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은  '사이(間)'다. 그것은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의 짧은 순간이지만 그 '사이(間)'는 수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분명히 존재한다. (필름위에 기록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는 검은색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렇게 분절되고 멈추어선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영사기의 간헐운동이 아니고 관객의 의식과 시각체계다. 1 초 동안 24 개의 이미지가 연속되어 지나가는 동안 관객은 그 이미지가 움직인다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이 가지고 있는 잔상효과 때문이다. 잔상이 연속되어서 중첩이되면 멈추어선 이미지를 움직이는것으로 인식하게 되는것이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100325 - 3



너에게
 
 
나의말들은낡았다
너무늙고오래되어
방치되었고녹이슬
어망가진채로버려
졌다
 
나를설명할수있는
언어를나는세상속
에서찾지못하였다
 
나는누구에게도나
를설명할수없다나
는말하여질수없는
내가되었다
 
나는너에게나를소
리내어말하고싶지
만나는너에게나를
말할수없다나는나
를설명할수가없다
 
나는너에게나를들
려주고싶지만들려
줄수없다나는나를
들을수없기때문이
다분명히
 
지금뜨겁게뛰고있
는나의심장은온전
히너의것이지만그
것을나는너에게말
할수없다전달할수
없다그리하여
 
나는침묵하고침묵
하고침묵한다아무
것도말할수없고아
무소리도낼수없다
는것을알기때문이
다그렇게
 
조용히아주조용히
이시간들이지나가
기만을기다릴뿐이
다그렇게
 
다시나는천천히눈
을감는다
 
나는시간속에서공
명하는진자처럼투
명한소리를울리며
낮게튀어오른다
 
짧은탄성처럼창밖
의마지막별빛이꺼
진다






100325 - 2



후일담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저녁이 왔다 해가 졌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겨울은 거의 끝났지만 아직 추웠다 이 시간이 되면 이상하게 슬픈생각이 들어 '시로'가 말했지 다시 찾은 오래된 성당 죽은 이들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묘석아래 누워있다 죽음이 여기있다 삶이 여기있다 등을 맞대고 붙어있던 언덕위 집들이 모조리 쫒겨났다 언덕위로 둥실 눈썹달이 떠 올랐다 내 똑딱이로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어 당신을 담을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거기에 그리고 나는 여기에 안녕.







100325 - 1



어떻게
 
 
썩둑.잘라버린노끈을휴지통에서다시집어들었다.
모든 물건에는쓰여질곳이있다. 쓰여질때가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것이다.
 
잔뜩웅크려눈만검뻑이는고양이처럼삶은,그렇게
기다림의서랍장을차곡차곡채워가는것이다.그러나
쓸모없는기다림도있다.
더러는거짓희망으로위장한채배시시웃음날리며끝끝내
자리를차지하고있는것들도있다.
 
나의탐욕나의이기심나의나태함.바로
너희들이나의눈을가리고있구나나의귀를막고있구나나의
두손과두발을묶어두었구나문득정신차리면물에빠져버린
솜처럼나의시간들을둔하게만들었구나씻어내도씻어내도
떨어지지않는헛된마지막포옹의기억처럼너희들은들러붙
어있구나어떻게떨쳐낼수있을가어떻게이미련스러운삶을
끝장낼수있을까어떻게
 
후욱.둥실떠오르는깃털처럼.

가벼워질수있을까.이삶에서.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폴리스 비트

 

 

폴리스 비트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망가진 하프시코드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씨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간의 바에는 언제나 이런 손님이 용케 찾아온다. 문이 열린 틈새로 어떤 여자가 쓰러지면서 외친다. ‘오 그가 나에게 총을 쏘았어요. 나는 운 좋게 맞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웃집 난간을 타고 넘던 고양이가 총에 맞은 것 같아요. 누군가 앰뷸런스를 불러줘요. 제발.’ 그 여자는 피 묻은 손을 들어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움직이기엔 그들의 동정심이 너무 무겁다. Z는 호수에 빠져죽은 남자의 뒷모습이 누군가 아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없을 거야. 죽은 자는 죽은 자일뿐야. 라고 자전거 패트롤 파트너가 귓전에 속삭인다. 그는 몇 년째 무좀 치료를 위해 발가락 사이에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그 다음 주 DEA는 알몸상태의 그를 체포했다. 무좀 치료약이라도 상습 투여는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약의 종류가 아니라 중독의 정도’라고 케이스 오피서가 말한다. 매주 치루는 정기적인 고해성사 시간에 주임신부는 자신의 고해 담당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페달을 밟을 때 마다 들썩이는 그의 엉덩이를 보면 흥분이 되요’ 담당 신부는 보속으로 한 달간 성당 밖으로 나가지 말 것과 하루 10 회의 사도신경 암송을 주었다. 주임신부는 마음속으로 중얼 거렸다. ‘이건 불공평해.’ 주임 신부의 고해 담당 신부는 신자들이 고해를 위해 무릎 꿇을 때 마다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지퍼를 내린다. 신자들은 매주 그에게 블로우 잡을 해 주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 길이 끊어지는 곳의 숲속에 사는 핀란드인 꼬뮤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자유 공간은 인터넷뿐이야.’ 그는 온라인으로 아동 포르노로 위장한 공산주의 교육 비디오를 판매한다. 그가 꿈꾸는 것은 (정말로 당신이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천국도, 국경도 없는 사해동포주의다. (한 번 상상해 봐요?) ‘건너편 집 보이나요? 잔디청소를 하는 흑인 남자. 그 남자는 세네갈에서 노예선을 타고 밀입국 했다우. 그는 그린카드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미국에 남아있겠다고 했어요.’ ‘부인, 이 내용 모두 직접 들으신 건가요?’ ‘아니요.’ ‘어찌 되었든 이건 이민국의 소관이라 제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Z는 노부인의 집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연결되지 않는 전화라도 그 끝에는 누군가의 손끝이 있다. 몰트위스키와 함께 배달된 발터 피피케이를 든 남자는 말했다. ‘총은 누군가를 쏘는 물건이 아니지 무언가를 쏘고 싶어지도록 하는 물건이야’ “탕-!‘ ’그 남자의 뇌수가 벽에 튀었어요.‘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는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쏘았어요.‘ 낡은 창고 주변에 노숙하던 남자는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들고 중얼거렸다. Z는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를 아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건 물에 빠져 죽은 남자의 신원을 알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일이야.‘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그냥 일어날 뿐이야.‘ ’마치 누군가의 죽음과 사건이 단 두 글자의 알파벳으로 케이스 리포트 시트에 기록되는 것처럼 말이야.‘ Z는 페달을 밟는다.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페달을 밟는다. 아직 보속을 끝내지 않은 주임신부는 종루에 올라 Z의 엉덩이를 향해 환호성을 울린다. ’내 사랑 !, 내 사랑 !‘

 

 

* 이 시(?)는 로빈슨 데버 감독의 2005년 영화 <Police Beat>를 보고 난 후 생각 나는대로 스케치 해 본 것이다.

* 머리속의 이미지들을 정련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쓴 것이므로 스케치라기 보다는 크로키라고 하는 쪽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 내용중에는 영화속에 있는 장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영화가 불러일으킨 어떤 기시감 같은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그것들도 모두 영화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천국으로 가는 문' '천국도 국경도 없는' 이라는 부분은 각각 밥 딜런의 <Knock'n on heaven's door> 와 존 레넌의 <Imagine>에서 빌려 왔다.

 

 

 

깊은 우물

 

 

 

깊은 우물
 

 


그곳에서 나는
예의바른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가벼웠다
깜박 잠이 들어버렸던
간밤에
물푸레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는 거실을
내려다 보았다
거칠게 옹이진 가지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거실은 깊은 우물처럼
투명하고 조용했다
바람이 할퀴고 지나던 창밖은
어느새 적막해졌다
나는 말없이 얇고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두눈을 가리고 있는것은
잠이 덜 깨어서가 아니라고
너는 말했다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몰래 다가가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한척 덤덤하게 뒤돌아 섰다

두껍고 과묵한 문틈 사이로
껍질을 까다만 귤 처럼

안녕 두글자를

던져두었다.

 


 

- 어느 해, 3 월 31 일에 쓰다.

만일이란 없지만, 그날 그곳에 조난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은 마음이 조금 덜 아프지 않을까.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비. 눈. 내리다



비. 눈. 내리다



젖지 않아 굴러떨어져 너는
그대로 녹아 흐르다
말없이 흐느껴 너는 나를
스쳐 지새다

불면의 밤
꺼진 촛불
싸늘히 식은 푸른
유리병

나는 너를 조용히 부르다
나는 너를 조용히 부르다
녹아서

비. 눈. 내리다.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의형제>는 '풍경의 영화'다.


<의형제>는 '풍경의 영화'다.

- 김시원 에디터의 '<의형제>를 비판한다' 에 대한 재 반박.

 

 

대중영화로서의 유의미한 지점들에 대해

 

김 시원 에디터는 '사회적 정체성의 상실감에 대한 자각처럼 보인다'고 아주 정확하게 내가 쓴 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의형제>를 풀어낸 내 글에는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그 영화를 보던 시기의 생각들이 많이 묻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의형제>가 왜 지금,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달'이 필연은 아니더라도, 관계 없는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 내 가설이다. <의형제>는 상업영화다. 이것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름값이 높은 배우가 등장했으며, 완급을 조절하는 액션장면을 배치해서 대중적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 영화가 <경계도시>처럼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환부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상업영화의 제작이 결정되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과연 이 영화의 소재가 지금 이야기 될 만한 소재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철학' 또는 '담론' 또는 '이념'그러니까, 이 영화를 마치 대단한 사회파 영화처럼 포장(미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만을 썼고, 내 생각을 거치고, 다시 영화 속의 장면들이 보여주었던 것만 추려내서 썼다. 그러니 내 글은 '해석'이 아니다. 이 글은 그냥 '기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글)이다.

또한 <의형제>에 대한 내 글은 그 영화를 특별히 대접해서 쓴 글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유의미한 점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나는 <의형제>라는 영화의 장점으로 꼽는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보기에, 장훈은 적절하게 자신의 욕심을 조절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인감독의 패기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열정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김시원 에디터의 글에 대한 반론글이 마치 감독에 대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나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그는 타협이 아닌, 조율을 할 줄 아는 타입의 감독으로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장훈 감독을 전적으로 '지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대를 걸고,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걸어도 되는 영화를 만들어 낼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 화에는 말을 걸어오는 영화가 있고, 말을 걸어야하는 영화가 있다. 지나치게 손쉬운 이분법일 수 있겠지만, 상업영화의 대부분이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시 말해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는 것이 상업영화의 특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감정을 쥐어짜내기 위해 작위적인 '최면을 걸어오는'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사양한다. 그렇다면 <의형제>는 흔히 말하는 신파적 감수성, 그러니까, 추석 차례를 지내는 장면의 급반전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짜내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 것일까? 물론 뜬금없는 이 장면은 어쩌면 이 영화의 단점 중 가장 큰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이 드러내는 가족중심주의, 가족만능주의의 해법은 지나치게 나태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영화가 가장 일반적인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쟁점은 과연 이 영화가 가족주의로서 영화 속, 또는 현실 속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여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쓴 글의 말미에도 적었듯이, 송지원과 이한규가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똥파리>의 마지막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 장면은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무의식, 그것이 관객이 될 수도 있고, 송지원이 될 수도 있고, 이한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한규에게 송지원이 편지를 보냈고, 영국행 비행기 티켓이 그 편지에 들어 있다는 것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의 봉투에 적혀있는 것은 송지원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은 부분부터 나머지는 이한규의 상상적 읽기라고 본다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난도질 하고 작위적인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뜬금없는 추석 차례 장면과 비슷하게 이 장면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흔히 말하듯 '톤이' 너무 다르다. 이러한 구성이 장훈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런 생각도 가능하다. 이 두 장면을 보면서 나는 비교적 몰입이 되었던 영화 속에서 자꾸 튕겨져 나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느낌은 너무도 기묘해서. 다시 영화를 복기하고, 왜 이러한 장면들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독의 '인장'이었을까, 또는 대중적인 해피엔딩을 원한 제작사의 압력이었을까? 일단 결과물로 놓고 본다면. 이러한 톤이 다른 장면들의 기묘한 비현실성, 또는 비정합성은 오히려 <의형제>를 다양한 층위에서 놓고 보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균열이 현실의 한계, 현실의 균열의 지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렇게 요란한 영화가 필요했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의형제>는 새터민의 인권문제를 비롯해서 불법체류자, 국제결혼같은 지금의 사안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부분에 관해서 게으르다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에서, 그것도 대형 극장가에 걸리는 대중영화에서 외국인 노동자, 새터민, 국제결혼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당장 기억에 남는 것만 따져보더라도,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 박찬욱 감독의 <박쥐>, 심상국 감독의 <로니를 찾아서>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우리와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을 마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통해 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해왔다.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소재로서는 불명확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이슈가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형제>가 유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대공수사 전력을 가진 이한규의 직업이 사람을 찾는, 그것도 외국인들을 '추적' 한다는 설정은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것처럼 작위적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흥신소에서 외국인 사람 찾기 서비스를 업무 항목에 넣고 있고, 영화 속 이야기처럼, 한국 땅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 신부들이 집을 나가거나 실종되는 일들도 생각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영화 속의 설정이 필요 했는가를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보는 쪽이다. <의형제>를 굳이 묘사하자면 '풍경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안들을 끈기 있게, 마치 르포르타쥬처럼 파고들어가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의형제>는 대중영화이다. 500 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그 현상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의미있는 '사건'들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공산품으로서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웰메이드' 영화인가?에 대한 질문은 나에겐 크게 관심이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니, 나는 이 영화가 공산품으로써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들 지적하듯 이 영화는 익숙 요소들의 조합이다. 자동차 액션 장면들은 본 시리즈를 제대로 차용한다. 액션 장면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다크 나이트>의 구성을 닮아있다. 근거리에서 상대를 가격하는 송지원의 액션역시 <다크 나이트>의 액션을 가져왔다. 농촌을 풍경을 보면서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표절'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차용'은 근면하고 솜씨 좋은 모범생의 그것으로 보인다.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어떠한 기술의 외피만 근근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닌, 그 핵심을 이해하고 꼼꼼히 옮겨 적는 근성이 적어도 보인다는 것이다.

김시원 에디터는 '이 영화는 상업 '대중' 영화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영화이지 사회의 특정한 입지를 대변하는 영화는 아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나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반드시 특정 영화가 특정 입지를 대변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의형제>는 '누구도 배반하지' 않는, 특정 입지를 고수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적 접근점을 찾는다. 송지원과 이한규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현재적 사안들에 접근해 들어간다. 나는 두 주인공들에게서 고정간첩과 대공수사관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려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둘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집단에 의해 '퇴출되었다'는 사회적 위치이다. IMF가 고정간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김시원 에디터가 지적한 송지원의 '고행'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남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여'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나는 썼다. 김시원 에디터는 '유지'를 '부여'로 읽고 있다. 최소한 어떠한 맥락에서 표현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반론이 작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0.03.20
양석중(editor)


영화 비평 전문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다시 하루




다시 하루




집으로돌아와아주오랜시간을들여몸을구석구석닦았다
친구들이건넨말들도그들이나에게보내준눈빛과걱정들
도그리고나의친애하는적들의기억들도모두씻어버렸다
아직젖어있는그대로방으로돌아와온몸이녹아내리는밤
의유령처럼물을뚝뚝흘리면서휴대전화의액정을들여다
보았다희미하게빛나는글자들이허공속을떠돌았다내가
기다리던대답은아직도착하지않았다액정을덮고몸을닦
고물을마셨다눈을감고아무말도하지않았다크게숨을들
이키고아주천천히공기가내몸을빠져나가는감각들을세
포속에한땀한땀적어두었다(이감각을잊으면안돼)공기
가빠져나간그자리에아주작은목소리로주문처럼새하얀
묘비명을새겨넣었다.다시


나는 유리처럼 딱딱해졌다.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땀으로 흠뻑 젖은 은유의 침상에서 내려온 당신과 나는 당신은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도 흔들지 않고 헤어졌다. 길다랗게 누운 오래된 돌벽에 뺨을 붙이고 걸으면서 나는 당신이 던진 혀와 말과 노래와 웃음들을 다시 생각했다. 당신은 노래하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아니, 나는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입속으로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나는 나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아. 쉿. 갈라진 보도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아직 몽우리도 맺지 못한 어린 풀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딱 그만큼 배가 불룩해진 배낭을 맨 여행자를 지나친다. 빗물이 흐르다 말라버린 오르막을 올라 한숨처럼 짧은 내리막을 지나 숲으로 간다. 이곳은 무거워진 시간이 말라붙은 눈송이처럼 낙하하는 곳. 낯선이들은 어깨동무를하고 신발을 껴안은 채로 잠을 청한다. 길고 긴 밤을 견디기에 한낮의 쉼은 너무 짧고 창백해. 눈을 감고 있으면 익숙한 현기증처럼 해가 기운다. 은유처럼 다시, 밤이 오고.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우도

 

우도

 


이제 막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나온 녀석의
파르라니 떨고있는 머리통처럼
올망졸망 수줍기도 하여라

겨울보리밭

 

 

100318

 

K가 생일선물로 시를 써달라고 했다. 흠 어쩌나 나는 마음이 아파야 시를 겨우 끄집어낼 수 있는데. K와는 아프고 기쁘고 자실게 없는데. 어려운 숙제다.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단순하고 꾸준하게

 

요즘에 글을 쓰면서 자주 나 자신을 객관적인 위치로 분리하게된다. 쓰는 나와 나를 보는 나. 일단 머릿속에서 나오는대로 문장을 쭉 써 나간 후에 다듬게 되는데, 그러나, 그러므로, 그렇기때문에, 그런데 같은 접속사를 발견하게 되면 거의 신경증적으로 없애버린다. 앞뒤 문장의 연결이 정말로 필요할 때에만 접속사를 최소한으로 쓸 것. 요즘 글을 쓰면서 두는 원칙이다. 접속사를 쓰게되면 내가 쓰는 문장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깎여버리는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접속사를 제거하면, 문장의 배치를 바꿔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건 그만큼 접속사에 기대서 문장의 배치와 관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접속사는 만능이 아니다. 접속사로 붙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붙이는 것은 미봉책일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다보면 어떤 순간에, 이런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을 거야. 이거 참 기발해. 이런 생각때문에 영화로 보았던 것 이상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뭔가를 너무 강하게 들이밀면서 주장하는 글을 쓰게 되더라. 간략하게 핵심만 단순하게 이야기 할 것. 내 개인의 감정과 욕심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상에대해 보았던 것만, 보이는 것만 이야기 할 것.  이렇게 쭉 써야겠다. 적어도 영화글은.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의형제] - 뿌리뽑힌 자들의 가면 무도회




 

얼굴들, 가면들

<의형제>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주연 배우인 송강호의 존재만이 아니다. IMF가 양산한 것은 명퇴자, 실업자, 신용불량자 뿐만이 아니었다. 고용과 가정 경제의 불안정은 가족 구성원 자체의 형질변경을 일으켰다. <우아한 세계>는 IMF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폭 코미디라는 틀을 빌어서 묘사한다. 이 영화는 유학을 떠난 가족들이 보내온 비디오테잎을 보면서 울먹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맨 마지막에 후렴구처럼 배치한다. 이 장면은 앙금처럼 쌓여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IMF 이후의 한국 영화들은 분열된 가족, 혹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을 반영(박하사탕, 바람난 가족, 해피엔드, 4인용 식탁, 눈물, 질투는 나의 힘)하거나, 이상향으로서의 가족과 '집'을 묘사함으로써(집으로, 내 마음의 풍금, 초승달과 밤배, 선생 김봉두, 인어공주) 현실에 대한 보철장치로서 기능했다.

<의형제>는 IMF를 분기점으로 6년 전과 6년 후가 나뉜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관 이한규(송강호)는 독단적인 작전수행의 책임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고정간첩 송지원(강동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실패의 추억'이다. 초반의 총격장면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떠올리게 한다. 박무영(최민식)은 인피를 뒤집어쓰고 유중원(한석규)의 추격을 벗어난다. 유중원은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박무영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간첩, 혹은 스파이를 추적하는 주인공들은 대상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얼굴 위에 정체를 덧씌우는 것처럼 보인다. 정체는 폭로되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추적자에 의해 부여된다.

 

<의형제>에서 얼굴들은 가면이면서 동시에 인식표다. 베트남인과 한국인은 생김새가 다르다. 필리핀인, 말레이시아인도 그렇다. 우리는 다른 생김새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외국인 이라고 확신한다. 얼굴은 다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의형제>에서 우리와 닮은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송지원의 얼굴을 보게 될 때, 판단은 아주 잠간 유보된다. 이한규가 베트남인 공장에서 송지원의 도움을 받는 장면에서 송지원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이한규는 아마도 베트남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송지원이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 ‘어, 한국 사람이네’라고 이한규는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그리고 동시에 송지원의 얼굴을 알아본다. 송지원도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낸다. 드러난 서로의 맨 얼굴은 가면이 된다. 이한규는 송지원이 위장취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송지원 역시 이한규가 흥신소를 가장한 국정원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격렬한 추격전으로 시작된 영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기묘한 위장극으로 전환된다.



가면무도회

송지원과 이한규의 동거는 단순히 남과 북의 대치상황만을 은유하지 않는다. 이한규는 사람 찾아주는 흥신소를 운영한다. 그의 주 고객은 농촌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 찾아주는데 얼마, 데려다 주는데 얼마를 따져대는 이한규에게 송지원은 '인간적으로' 대해 줄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이한규는 말한다. '남의 것 가져다가 내 행복을 꾸려가는 거, 그게 자본주의야. 죄가 아니야.' 이한규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단순히 물질들의 자리가 이동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행복해 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돈다. 개인의 욕망과 공명심을 교묘하게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정당화하는 이한규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는 '선 조치, 후 보고'를 주장하다가 국정원에서 퇴출당한다. 북에서 내려온 무자비한 암살자 그림자(전국환) 역시 그러하다. '매일 밤 네놈의 목을 따는 꿈을 꾸었다'는 그는 체제의 논리를 가장 깊숙한 무의식의 층위에서 동일시한다. 거침없고 무차별적인 살인은 그에게는 심판행위,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화 행위다. 김성학을 암살하는 초반 장면에서 쓰러진 김성학의 장모와 아내에게 한 발 씩 총알을 쏘아 넣는 장면은 끔직 하면서도 기묘하다. 그는 무감동하게 이미 죽은 시체에 총알을 한 발 한 발 박아 넣음으로써 죽음을 기계적으로 '배분'한다. 그에 반해 송지원은 절차적인 인간이다. 그는 원칙을 알고 있는 자로서의 개인의 결정과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낯선 남한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송지원의 노력은 마치 엄격한 수도승 같다. '나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믿는 체제, 그가 믿는 신념, 그가 배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송지원은 종종 지령대로 행동하기를 멈춘다. 이한규와 그림자가 끊임없이 몸이 먼저 움직여지는 역동적 인간형임에 비해, 송지원 에게는 정(靜)과 동(動)이 공존한다. 영화 중간 중간 그가 뿜어내는 액션은 예측 불가능하고, 빠르며 군더더기가 없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범람하는 상대의 움직임들에 틈새를 만들어 제압한다.

송지원이란 인물은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캐릭터이다. 배우 강동원의 눈길을 끄는 신체조건은 우리들이 북한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 자체를 무화시킨다. 어떻게 본다면 <의형제>의 송지원은 굉장히 이상화 되어 있는 인물이다. 체제에 충성하되, 체제에 물들지 않는 인간이다. 다른 이들이 주변 환경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그는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 인물 같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송지원의 모습은 강렬한 예시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떠도는 사람들

이한규의 아내와 딸은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딸이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 주는 것이 꿈이라는 이한규는 돈을 벌기위해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고 흔들어 놓는다. 전직 국정원 대공 수사요원이 이제는 간첩이 아닌 도망간 사람들을 쫒아 다니며 그 일로 입에 풀칠을 한다는 설정은 쓴웃음을 준다. 국가라는 경계가 흐릿해지고 복잡한 개인적 욕망들이 첨예하게 돌출되고 있는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장 훈 감독은 <의형제>에서 집을 묘사하지 않는다.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기초 단위로서의 '집'은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등장인물들이 염원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공간으로 상정된다. 이한규는 남편의 구타를 피해 도망간 베트남 여자 뚜이안을 동생집에 그냥 두고 돌아선다. 뚜이안의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은 안 마당이 있는 비교적 전통적인 구조의 한옥집이다. 이들이 떠나가는 동네 어귀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넉넉하게 품을 벌린 채로 서 있다. 이한규는 모텔의 장기투숙 방과 오피스텔을 전전한다. 정작 이 땅에 살고 사람들은 더 나은 공간, 더 큰 집,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떠도는데, 사람들이 비운 자리를 메꾸고 있는 것은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노인들뿐이다. 이 나라는 서서히 낯설어지거나, 노쇠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의형제>를 통해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금일지도 모른다.

 




의형제


뚜이안을 놓아주고 돌아온 이한규는 송지원과 술을 마시면서 '형이라고 한 번 불러봐'라고 말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에게 자신을 가족으로서 호명할 것을 요청한다. 송지원은 '사장님을 어떻게 형이라고 부르냐'며 거부한다. 추석 차례상을 놓고 벌어지는 감정선의 변화는 그림자 조금 뜬금이 없다. <의형제>를 영리한 장르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장면의 호불호에 따라 갈라질 것이다. 이 장면의 톤이 어색할 정도로 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를 지낸다지?' 라는 이한규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송지원의 모습은 마치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적대적 상황을 상정하고 반복된 훈련을 몸에 익힌 인간이 두려움을 통제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벙커 총격 장면은 <의형제>에서 역전된다. 무기를 휘두르는 자는 남한의 군인이 아니라 북한의 남파 간첩이다. 송지원의 칼로 팔에 상처를 입은 이한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송지원의 부모님 차례 상에 함께 절을 올리자고 말한다. 그림자와 맞닥뜨리게 되는 옥상 장면에서 송지원은 다시 이한규를 찌른다. 죽은 줄 알았던 이한규가 일어설 때 우리는 송지원이 칼날을 거꾸로 잡고 송지원의 복부를 가격해서 기절만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들이 어깨와 손에서 흘린 서로의 피를 섞는다. 후에 보내온 편지에서 송지원은 이한규를 '형님' 이라고 부른다. <의형제>는 만능적인 가족지상주의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는 영화이다. 송지원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이한규 역시 혈육인 딸에게 남길 무언가를 위해 돈을 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행동은 갈등과 파국을 불러온다. 모든 사건들의 맨 마지막에 이들이 택하는 (가상적)혈연으로의 부름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지금,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존립의 근거. 그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자들

<의형제>의 엔딩에 대한 논란이 적은 것,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송지원이 보내준 항공권으로 딸을 만나러 영국으로 가는 기내에서 이한규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한 컵 가득 주문한다. 이 때 이한규는 '촌스럽게 위스키가 뭐냐, 좋은 와인도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펼쳐진 신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송지원 같다. 아니겠지, 돌아앉던 이한규는 거듭 확인한다. 그가 맞다. 그는 가족들과 영국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한규와 송지원은 동일한 프레임 내에 위치하지 않는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 되지만 상상적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이들은 마치 서로의 그림자, 환영 같다. 장훈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탈북자가 오랜 탈주생활 끝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는데도 미국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 대접을 받는 것 보다, 아예 모르는 나라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 낮다는 그 남자의 이야기는 묘한 울림을 준다. <의형제>는 정치적인, 또는 이념적인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정치와 이념은 당파로서의 정치와 이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동시에 <의형제>는 가장 첨예한 정치성과 이념성을 지닌다. 내가 어디에 존립의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의형제>는 뿌리 뽑힘에 관한 이야기,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이 존립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에는 다시 떠돌 수밖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2010.03.13
양석중(editor)


- 영화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지금은_곤란하다_기다려달라.jpg




왠만하면 펌질 잘 안하고, 이미지도 잘 안올리고 텍스트 위주로 블로그를 꾸미고 싶은데, 이건 펌질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천지가 꽉꽉 막힌듯 답답하지만, 이런 해학과 여유가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정말 미친듯이 웃었음. 아마, 몇 일 내에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를 주제로 DC 믹스가 출시되지 않을까 싶다. 왠지 잉여들의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아이템. 

가카의 용안을 보고도 눈 감지 않을 자신있는 용자라면!







2010년 3월 9일 화요일

봄 눈



내가살았던도시에서는해마다봄이되면
집이무너졌다동그랗게웅크린초식동물
의내장처럼온몸을잔뜩구부리고잠이들
었던사람들은창백한옆구리를차갑고냉
냉한아침햇살에고스란히드러내곤했다.
 
벽이무너지거나누구집네담장이넘어갔
다는소문같은것들은개나리꽃덤불이내
지르는작고낮은환호성처럼좁고울퉁불
퉁한골목길을타고온동네로퍼져나갔다.

 
무너진벽이나담장같은것들은금새다시
세워졌는데제대로굳지않은모르타르는
아직마르지않은바닷내음을방안까지몰
고돌아왔고그런날마다식구들은회색파
도가잔뜩일어서거나파도에도씻겨지지
않는발자욱을남기면서끝도없는해변에
서길을잃는꿈을꾸곤했다.
 
그해봄에새로태어난아이들은제일먼저
그것을집이라고부르는법을배우면서자
라났다때로는바람에날려온민들레씨앗
이밤사이몰래내린눈처럼용케녹지도않
고그다음해겨울을지내고꽃을틔운적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생각난것처럼정말로눈발도날렸다
골목을달려내려가는꼬마들이땀이배어
나는것도모른채손에들고있었던똑하고
부러트린민들레머리처럼바람에대책없
이무심하고가볍게흩날리던,
 
봄눈같은것도내렸다.

 

여보세요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정수리 왼쪽 뒤에서 두드려댄다 아프다 찔금 잠간 발걸음 멈출정도로 아프다 왼쪽 눈꺼풀도 덩달아 꿈벅거린다 둥둥둥둥 식도에는 두통약 줄줄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해 등에 등 맏대고 손에 손 잡고 늘어서 있다 언제나 버릇처럼 지니고 있었지만 버릇이 언제나 익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매번 생소한 얼굴처럼 불쑥 얼굴 들이미는 편두통 이것에 익숙해졌다면 나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있음을 기뻐할 만큼 넉넉하지는 않다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프다 생각하면 그 순간 사라진다 사라졌다 생각하고 한 숨 돌리면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기보세요 나를 부른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 잔뜩 몰려와 분주한 김장 마당 간밤동안 얌전히 절여진 배추들이 입다물고 다소곳이 포개 누워있던 겨울 초입의 풍경 길건너 멀리서 집짓는 인부들 망치 소리가 방 한구석 독감으로 누워 있던 어린녀석의 머리통을 두둘겨대던 시간들을 그 때 나는 천정 한 구석 정육면체의 삼면 꼭지점을 이은 삼각형의 검은 덩어리가 나를 내려다보던 그 또렷한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지 나를 노려보았어 그것은 움직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그것은 어쩌면 나를 죽일수도 있었지어그것은 내가 맨 처음으로 만났던 침묵이었고 죽음이었고 파괴였고 망각이었고 고독이었고 외로움이었고 고통이었지 그 녀석의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딱 그만큼의 부피만큼 왼쪽 정수리 삼각변의 딱 그만큼이 그 손아귀에 사로잡혀서 캉캉 캉캉 캉캉 여보세요 여보세요 요기보세요 나를 부르고 있지




밤 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밤 눈, 기형도






2010년 3월 7일 일요일

볼드모트 뒷다리 긁는 소리




인간의 삶 자체가 정치성을 띌 수 밖에 없다. (다고 생각한다라고 에둘러 쓰기는 싫다) 모든 삶의 순간들이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고 정치적 시각으로 사안을 읽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평론가를 지망한다면 그 부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영화에 대해 평론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개활지에 서서 소리를 질러서 온갖 저격수들의 목표가 되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하더라도, 평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오히려 정치성을 배제하고 당장 눈앞의 문제와 일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에둘러가는 글을 쓸 때, 그 글은 가장 나빠질 수 밖에 없으며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거짓말을 하는 평론은 이미 평론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이들을 흐릿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냥 질나쁜 거짓말일 뿐.

누가 좌파고 누가 우파고 누구의 글이 좌파적 성향이고 어쩌고 따지는 바로 그 사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진다. 굳이 그걸 왜 따져야 하는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보지도 않고 겉 모습만 보고 좌파니 우파니 파란색이니 빨간색이니를 따지는 자들은 그러니까 누구인가. 자신의 두려움과 혼돈을 다른이들에게 전파해서 자신의 두려움과 혼돈을 집단적 믿음으로,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칠 수 있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당신 마음 속의 그것은 과연 무엇가? 라고 묻고 싶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다.

 

 

'시네마테크 공모제는 잠정 유보, 충무로에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하겠다' 이것이 3 일 있었던 유인촌 장관과 시네마테크 관계자들의 간담회 결론이다. 축하할 일인가? 아니다. 유인촌 장관은 '충무로'라고 짚어서 말했다. 다른 어디도 아니고 '충무로'이다. 매년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서 부산국제영화제를 능가하는 국제 영화제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통하는 바로 그 '충무로'이다. 유인촌 장관의 발언은 확실히 뭔가 뒷 수를 두고 있다. 마치 '지금은 물러가지만,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유 장관이 충무로에 만들겠다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충무로의 '토박이' 영화인들이 부산에 영화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지금, 관객도 별로 들지 않아서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에 초대권을 잔뜩 뿌려대는 충무로 영화제를 본다면 별로 기대를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볼 때, 유인촌 장관이 임기내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만들게 된다면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입지는 좁아진다. 일단 전용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생기게 되면 영진위는 여론상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영진위에서 애써서 전용관까지 만들어 줬는데, 공모제를 왠만한 선에서 수락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인촌 장관이 정부의 예산을 끌어들여서 전용관 건물을 새로 지을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가 지금까지 장관이 된 후 벌여온 일들을 보면 장기적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다. 아마도 어딘가 수익이 낮은 영화관을 임대해서 전용관이라고 내놓을 공산이크다. 일 주일만에 새 단체를 급조해서 연간 억단위의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의 주체로 낙점하는 영진위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여하튼 명목상으로라도 전용관이 생기게 되면, 아트시네마는 공모제에 압박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싸움의 국면이 바뀌었을 뿐. 서울아트시네마의 좀 더 적극적인 해법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통과 상식이라는 이름의 괴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용히 영화만 보고 싶었을 뿐, 싸움은 다른 곳에서 하세요. 또는 여기가 영화 웹진인지 정치 웹진인지 모르겠다고. 혹시라도, 당신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이런 저런 문제가 가라앉고 그나마 다들 한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그 때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는 '조용한 극장'을 찾아간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바로 그 행동자체가 김연아의 입국장에 몰려가서, 또는 올림픽 대표단의 해단식에 몰려가서 사진찍기에 골몰하는 자들의 숟가락 얹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당신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당신의 역겨운 생각과 행동을?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아주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친구 어머님께서 다치셨다. 일을 하시다가 기계에 손을 다치셨다고 한다. 친구는 덤덤하게 말하는데 크게 다치신 것 같다. 수술중이라는데 걱정이 된다. 물론 그냥 다치기만 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전,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목 아래까지 딸려 들어가 죽어버린 스무살짜리 후배가 잠깐 생각났다.

 

왜 우리는 험하고 힘든 일,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고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배려와 보상을 주려하지 않는 것일까. 한전에서 일하는 선배가 전봇대를 타고 있으니가 밑을 지나가면서 '너도 저런 일 안하려면 열심히 공부해라'고 아이에게 말하던 어떤 어머니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도대체 '저런 일'이란게 뭘까. 물론 누구나 몸이 덜 힘들고, 좀 편안하게 돈을 벌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그렇다고 해서, 힘을 들여 일하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삿되게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생산재의 경우 판매 단가가 낮기 때문에 일하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급여의 크기가 작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인정한다. 이럴 때 국가가 필요한 것이고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닐까. 가령 위험 직업군에 대한 위험 수당을 정부에서 지원함으로써 소위 3D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서서히 바꿔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펜대를 잡은 똑똑한 사람들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괜히 줬던 밥상 빼앗아 놓고 지방선거 다가오니까 무상 급식 어쩌고 공약空約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까지 머슴 흉내내며 들어와서는 강도로 돌변하는 이들에게 휘둘려야 하나.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좀 폼나는 일 하기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때, 그나마 이 현기증 나는 탐욕의 수레바퀴의 속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우아한 세계 - 결국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감독 : 한재림
출연 : 송강호, 박지영, 오달수, 윤재문
개봉 : 2007년 4월 5일
 
세계가 우아하단다. 송강호가 조폭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세계'가 우아하다고 말한다. [연애의 목적] 통해서 선생님들의 sex life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한 묘사로 적잖은 혹평을 들어야만 했던 한재림 감독은 자신의 두번째 영화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도를 보여준다. 우리들이 말안해도 대충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생활의 한 자락을 슬쩍 들춰 보이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에서 우리는 이제는 나이먹어 슬슬 등 뒤가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조폭의 삶과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서 살아남는 것을 함께 겹쳐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조폭과 가부장은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부장과 조폭. 이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으로서의 삶. 그것을 둘러싼 풍경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이야기다. 껄껄하는 웃음이 터져나오지는 않지만 헛헛한 실소의 결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짠하게 젖어 들어오는 에피소드들을 조리있게 구성한 것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송강호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다양한 재능을 풀어내듯 데뷔 이후 꾸준히 쌓아온 연기스타일을 이 영화에서 집약해서 보여준다. 마치 예측 불가능한 산간 지방의 기후 변화 처럼 한 화면내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송강호의 감정변화를 보는 것 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것일것이다. 웃는 낮으로 '연장'을 담글 수 있는 잔인한 긴장감과 어느새 자식낳아 기르다 보니 좀 데만데만해진 대한민국 중년남성의 사람 좋을것 같은 얼굴의 기묘한 동거. 그런데 어떤 장면은 마치 [복수는 나의 것] 한 장면을 가져온 것 같고 또 어느 장면은 [YMCA 야구단]을 통째로 들고 들어온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복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끝이 좀 이상하다. 결국 형기를 마친 조폭은 기러기 아빠가 된다. 마치 불필요한 후렴구처럼 붙어있는 이 장면에서, 혼자 남겨진 강인구에게 조기 유학을 나간 아들과 딸, 아내가 비디오 테잎을 보내온다. '동생'들을 호령하던 당당한 조폭 간부 강인구는 커다란 와이드 TV 앞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그것을 본다. 헤벌레 웃음을 흘리며 화면을 보던 그는 질끔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혼자 라면을 먹고 있는데 화면속 멀리 떨어진 아내와 딸, 아들은 그가 생전 못 가본 곳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다. 화면 속의 그들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그들은 '저기'에 있고, 그는 '여기'에 있다. 화면 정중앙에 강인구를 두고, 그의 얼굴과 그가 보는 것을 친절하게 다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런데 이상하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강인구는 라면그릇을 내던진다. 고슬거리는 라면 면발이 사방에 날린다. 칼질에 총질을 해서라도 들어와 살기를 소망했던 집안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그는 혼자다.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그는 검은 '비니루'와 걸레를 들고와 자신이 엎지른 라면과 깨진 그릇을 치우기 시작한다. 어디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중년 남성의 투실한 뱃살과 긴장감이 적당히 서려 있는 장단지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은 그는 다시 성질을 부리며 걸레를 내던진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이것이 대한민국 가장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만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 어느쪽에도 방점은 찍혀지지 않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우리들의 연대를 꿈꾸자.


유인촌 장관이 조희문 영진위 위원장을 대동하고 서울 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계속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네마테크 공모제의 해법을 제안하기 위해서 찾은 것 같다. 관련 기사가 나와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기사를 통해 전해진 바로는 '절차상의 문제 / 영진위의 체면도 살려야 / 서울아트시네마에 경합할 공모단체가 없다'는 정도의 내용이다. 아마도 유인촌은 이번 사태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자, 일종의 조정자 역할로 언론플레이를 하기위해 이러한 자리를 만든 것 같다. 욕은 조희문이 먹고 유인촌은 숟가락만 슬쩍 얹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자리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미디액트와 다르게 아트시네마는 수행평가 점수도 좋고 문제가 없는것으로 본다'는 발언이 나왔다는 점이다.


지난 공청회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과 조희문 위원장은 한독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미디액트가 공모주체로 부적절하다는 발언을 했고, 이것은 '촛불 집회 참여 단체에게는 정부지원을 불허한다'는 이들이 말하는 '원칙'과도 부합된다. 인디스페이스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나선 시네마루 카페에 최공재 이사장이 올린 '정치나 당파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운영한다'는 글의 내용을 일백퍼센트 믿는다해도 자신들의 순수한(것 같은) 행위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도 난 아니고, 모른다고 말하는 건, 그냥 난 바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하튼. 문화계에 닥친 이런 모든 문제들은 정부가 정치 논리로 자신들의 입장에 반하는 단체들을 길들이려는 의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유발되고 있다. 어쩌면 지나치게 멀리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서울아트시네마의 향후 거취에 따라서 문제가 더 분화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금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는 쪽에서는 단순히 한독협이나 미디액트를 판에서 쫒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분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 그들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했던 것을 기억하자. 오늘 간담회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대략 두 가지다.


1. 공모제를 없던 것으로 하고 지금처럼 아트시네마를 영진위에서 지원을 계속 하는 것.
2. 경합할 단체가 없으므로, 일단은 서류상 공모제를 아트시네마에서 받아들이고 지원을 받는 것.


문제는 아트시네마가 현재 시점에서 영진위와 표면상으로라도 화해를 하고 제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되면, 시네마테크 공모제 문제는 일단락 되는 것이겠지만, 이 모든 화살이 미디액트와 한독협으로 향해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일예를 들어서, 한독협의 경우에 현재 인디스페이스가 사라진 지금, 한독협의 연레 행사인 서울 독립 영화제와 인디 포럼, 인디 다큐 페스티벌의 마땅한 상영공간이 불확실하다. 이러한 행사들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한다해도, 현재의 영진위와 파트너쉽을 유지하게 된다면 서로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서울아트시네마가 영진위와 화해를 통해 다시 지원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1. 시네마테크 운영에 대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지원이라는 이유로 간섭을 금지할 것.
2. 민간 사업으로 시작한 시네마테크 운동을 영진위 주관 사업의 일개 부서로 축소하지 않을 것.
3. 영진위가 책임지고 전용관 사업을 발족 시켜서 진행 할 것.


대략 이같은 내용들을 합의서의 형식으로 성문화 시켜서 약속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모든 사태들을 그저 시네마테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사태는 없어야한다.





연필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전에 연필을 깍는다. 분홍색 지우개가 달린 스태들러 연필. 중국 OEM은 나무가 좋지 않다. 조금 돈을 더 하더라도 독일 생산품을 사용한다. 이 연필을 기계가 아니라 칼로 사각사각 연필의 몸통을 얇게 저며 내는 동안 오늘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머리속으로 정리해 본다. 몸통이 끝나면 연필심 차례다. 뽀죡하고 최대한 얇게, 그러나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다듬는다. 칼날이 앞으로 나가는 동안 몸통을 회전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연필심이 꼬인것처럼 깎이게 된다. 몸통은 고정하고, 칼날은 동일한 각도로 최대한 집중해서 심을 갈아준다. 뾰족한 것은 섹시하고 강하고 위험하다. 언제 부러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용케도 버틴다. 요즘 하루가 그렇다. 언제 부러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버틴다. 그런데, 정말 언제까지?

 

 

 

 

천상고원 - 살아서 기억하는 것, 또는 기억함으로써 살아있는 것



[천상고원] (Heavenly Path, 2006)

감독 : 김응수
출연 : 김응수, 이재원


K 는 여자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로 미뤄 짐작하건데, 그녀는 K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K의 곁에 없다. 무언가 이곳에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그것을 상실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혹은 이별,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남아있는 자들이 문제가 된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남아있는 자는, 혹은 자신이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기억이라는 문제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도 있다. 이곳에 컵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컵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자에게 그 아무것도 아닌 공간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현시의 공간이 된다. 그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부재에서 출발된다.

김 응수 감독의 <천상고원>은 K가 사라진 여자를 찾아 네팔로 떠나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K가 구름속인지 지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네팔의 어느 길 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영화는 시작하고 10분을 넘기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보이지 않는 연인을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인 '극영화'로 알았던 이 영화는 어느새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혹은 감독 자신의 사적 기록이 서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삼투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삶과 영화. 현실과 영화. 영화 속의 현실. 현실 속의 영화.

K 는 고산병으로 시달린다. 동행한 사람들은 가끔 생각난 듯이 차를 멈추고 그가 몸속의 내장을 모조리 들어낼 것 마냥 구토를 하는 것을 도울 뿐 별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멀뚱이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기가 막히다. 손가락 끝에 파란 물이 뚝뚝 뭍어 떨어질 것 같은 하늘과 지천으로 열린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폭발이다. 몇 미터 직진 후 좌회전, 신호대기 뭐 대략 이런것들이 필요한 잠시 전진과 잦은 멈춤신호들로만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온 자에게 이것은 차라리 거대하고 투명한 폭력이다.

무 언가 찾으러 떠났지만, 이제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다. 우리는 점점 사라진 여자의 안위가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것 보다는 이 말없는 사내의 앞으로 어떤 길과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이상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K 는 삼년전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들의 임자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왔었던 마을과 길을 찾아서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알고 계세요?' 사람들은 사진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거나 혹은 자신의 이웃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을 K에게 보여준다. '그 사람은 여기 살다 작년에 다른 마을로 이사갔어요' '그 마을이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또는 '혹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 사진을 전해 줄 수 있나요?' K는 승려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속의 사람을 알고 있나요?' '이것은 제 모습인데요' '그런가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이건 제가 맞아요.'

3 년이라는 시간, 네팔에서 한국. 다시 한국에서 네팔까지. 그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살아온 3 년의 시간. 그리고 사진이 되돌아온 3 년의 시간, 그것을 찍은이의 3 년의 시간. 그것들이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의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사진속의 공간 역시 '그 때의' 그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속의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짚어 '이것은 나'라고 말한다. 이제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두고 '이것은 나' 라고 말한다.

사진을 주인에게 (혹은 주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고 K는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는 한 고비 넘어 수월한 듯 시원하게 질주하는 도로위로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투명하게 열린다. 마치 선도차량 처럼 멀찌감치 차 한대가 달려간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추월도 하면서 솜씨 좋게 달려 내려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것 같은 앞선 차는 길 왼편에 멈춰서 있다. 카메라는 그 옆으로 무심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이제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서 달리는 차도 없고 느리고 더디게 달려가는 덩치 커다란 트럭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길은 지천으로 열려있다. 그래서 길은 동시에 사방에서 닫혀버린다.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된다.





골목바람 - 생각의 여름






골목바람 - 생각의 여름




2010년 3월 2일 화요일

끄적..

연신 지나치는 쇼윈도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여자..

 

본능이다.. 남자들은 웃을지 몰라도 어쩔수 없다..

 

간혹 남자들이 착각하는건..

 

여자들은 남자한테 잘보이기위해 거울을 본다거나 이뿐옷을 산다거나 얼굴에 칼을 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거울에 보이는 내 자신의 모습을 즐기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다..

 

거울을 보는 모습이 남자한테 감동으로 보여질수도 있고

 

눈을 찌푸리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이세상에 여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남자로선..

 

남자가 야동을 보는게 당연한거처럼 여자들이 거울을 보며 즐기는걸 인정해줘야만 같이 살기 편할것이다..

 

내가 가진 경제력으로 최대로 만족할 물건을 샀다거나

 

늘 눈독만 들이던 걸 손에 넣었을때의 여자만이 느끼는 기쁨은..

 

남자들이 갖고 싶은 차를 빚을 내서라도 내차로 만들어 시운전 하는 기분과 같을 것이다..

 

같이 외출 할때 준비가 길다고 남자들은 싫은 소리를 하곤 한다..

 

거울좀 그만 보고 빨리나오라고..

 

여자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절대 밖에 나갈 수 없는 종족이다...

 

(여자라고 쓰고 아줌마라고 읽혀지기 시작한 종족은 간혹 예외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안타깝긴하다...)

 

빨리나오라고 다그쳐봐야 더 오랜 시간을 남자들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준비시간을 방해 하지 않는것이 좀 더 적게 기다리는 방법일 것이다..

 

 

                                                                                                       - jehty-

 

당신과 나의 연대

 


2 월달에 있었던 문광부질의를 통해 시네마테크 공모제에 대한 영진위의 대응이 문제있음을 여러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 오프라인 매체들이 다루기 시작하자, 영진위는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인식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문광부 유인촌 장관의 '문제가 있다면 공모를 다시 할 수도 있다'는 발언은 물론 미디액트 공모를 두고 나온 말이지만, 지금까지 수수방관하던 유인촌 장관이 입을 열었다는 것은 뭔가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인촌은 갈등을 봉합하는 성공적인 조정자로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시네마데크에 대한 공세가 줄어든다고 했을 때, 영진위는 지금껏 해 오던 뻘 짓거리를 그만둘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 번 풀려나간 개떼는 절대로 그냥 주인에게 돌아오는 법이 없다. 계속해서 작은 약점을 들쑤셔서 큰 약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어쩌면 파시즘이 활개치던 히틀러 정권을 지금의 정권이 닮았다고 말하는데, 나치를 유명하고 강력하게 만들어준 것중의 하나는 바로 전격전이라는 개념이다. 단시간내에 가능한 많은 병력을 일점집중해서 대열을 무너뜨리는 것. 이 미친 개떼들이 어디로 또 달려나가든 그것은 이제 그냥 남의 일만은 아니다. 너와 나의 연대가 강력히, 더욱 더 필요한 시점이다.

 

 

2010년 3월 1일 월요일

소비자의 권리


적립금 폐지를 막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소비자의 진정한 권리는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약속을 얻어내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의 할인 정책이 초기에는 충격이 될 수 있었겠지만, 어차피 출판사들이라고 그냥 손 놓고 당하지는 않는다. 할인 폭만큼 책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왠만한 책은 만원 이상은 있어야 구입할 수 있다. 그럼 이런 피해는 누구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가? 소비자가 저렴하게 구입할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해도, 그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원짜리 책 한권에 10 %, 천원을 할인받는다 했을 때, 열 권이면 만원이다. 물론 만원이 작은 돈이 아니다. 십시 일반이라고, 만원이 열 번 모이면 십만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계산은 그저 개인의 탐욕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내 호주머니로 들어오는 천원이 모여서 백만원이 되고, 천만원이되고, 몇 억원이 되어서 좀 더 건강한 도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글에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적립금의 사용처를 마치 네이버 콩 기부를 하듯이, 소비자가 선택해서 기부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어떨까.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인터넷 서점의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기금을 만들수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모인 돈으로 출판 지원 기금 같은 것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정말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사에게 소비자의 이름으로 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소중한 일이고, 소중한 경험일진데, 정작 책을 구입할 때에는 아주 작고 개인적인 탐욕에 우리는 종종 휘둘린다. 인터넷 서점들은 문광부에서 폐지/수정하려는 정가제 법안에 대해 '소비자의 권리'를 이유로 반대를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책 값이 좀 더 값지게 쓰여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홍대 G&B - 헝가리안 굴라쉬 스튜를 맛있게 하는 집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어느날 꼭두 새벽에 잠이깨서 내가 친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봤더니 그게 음식이더라. 아무리 이쁘고 잘생기고 성격좋고 돈이 많아도, 음식 앞에서 매력 없는 사람은 싫더라. 잘 먹는 사람만큼 사랑 스러운 인간이 없다. 어디어디 포털의 속칭 파워블로거를 보면 음식점, 맛집 정보를 꼼꼼히 올려서 이집은 뭐가 어떻고 저떻고 미주알 고주알 써놓은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사실 음식점에 사진 찍고 그걸 품평하고 소위 '소비자의 권리'를 '집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좀 반발심이 있다. 내가 음식을 만들어 먹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음식을 개차반으로 만드는 집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음식으로 가카 마냥 요령을 피우고 사기를 치는 집이 아니라면 좀 내 입맛에 안 맞아도, 조용히 먹고 일어서는 편이다. 잘 가는 홍대의 라멘집에서 혼자와서 수백만원짜리 카메라 꺼내놓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이 찌푸려지던 경험이 있다. 내 성격도 참 둥글지 못하다. 뭐 눈에 거슬리면 그걸 못 참는다. 그런데 여하튼 진짜 할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그렇게 남들 씹어댔으면서 오늘 내가 바로 '그 짓'을 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제닥에 가서 글좀 쓰려고 했다가 트윗에 올라온 제닥이 오늘 행사 관계로 4 시 부터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보고는 홍대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전단지가 잔뜩 붙어있었는데, 쇠고기 야채 스튜와 직접 구운 빵과 버터, 커피가 세트로 3,500 원이라는 내용이었다. 뭔가 궁금해서 기웃거리는데, 아주 인상좋은 (그리고 늘씬하고 알흠다우신) 가게 주인 아주머니께서 무료시식 행사중이라고 하셔서 머쓱하니 들어가 앉았다. 커다란고 길다란 스튜냄비 뚜꺼을 여시더니 달달달 끓고 있던 스튜를 한 접시 푸짐하게 퍼 올리고, 오븐에서 나온 빵과 커피를 바로 내주신다. 사실 이 스튜냄비를 보자마자 나는 이 가게가 맘에 들기 시작했다. 음식 만들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관련 도구들에 대한 눈은 나날이 높아지는데, 이 스튜냄비는 내가 딱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이즈와 디자인의 물건이었다. 이런 물건을 고를 정도라면, 이 가게, 믿어볼만하다. 뭐 이런 내 맘대로의 상상. 여하튼. 아래는 난생 처음 찍은 음식 사진. 소위 말하는 '싸이월드 컷'. 음식 맛은 따로 품평하고 싶지 않다. 소박하고 솔직한 맛이다.


먹고 나와서 아무래도 아쉬워서 가게 전경을 찍었다. 골목에 있어서 좀 입소문이 나야 장사가 잘 될 것 같다. 아마 개학하면 홍대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3,500 원에 한끼를 아주 배부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참. 토스트도 먹어보라고 주시더라. 그것도 맛있었다. 흙. 배고프네.




참. 장소는 홍대 정문 맞은편 놀이터 스무디 킹 옆 골목이다.



Milk



Milk



오른쪽 얼굴이 울었다.
왼쪽 얼굴은 울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왼쪽 얼굴이
죽어가고 있는 왼쪽 얼굴이
나 여기 있다. 고
오른쪽 얼굴에게 말했다
오른쪽 얼굴이
왼쪽을 대신해서
눈물을 흘렸다.





Milk - 짧은 감상 후기.



친구가 물었다. 영화 감독 한 명만 꼽는다면 누구야? 갑작스런 질문이었는데, 너무 당연하게 구스 반 산트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왔다. 나도 놀랐다. 구스 반 산트라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나는 홀린 것 처럼 그의 영화를 찾아 보았다. 처음 시작은 <엘리펀트 Elephant>였다. 콜럼바인 총격 사건을 다룬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구스반 산트가 죽음에 대해 또 찍은 영화가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 영화가 <게리 Gerry>다. 두 남자가 사막으로 들어가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한 사람은 살아 나온다는 간단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여러모로 <엘리펀트>와 짝을 이루는 영화였다. 설명할 수 는 없었지만, 구스 반 산트가 집중하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 뒤에 만들어진 <라스트 데이즈 Last Days>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작년에 수입되었다는데, 지금 정부의 촛불 알러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관계로 개봉을 미루고 있다는, 왠지 납득이 되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고, 아카데미 수상을 맞추서 개봉할 것이라는 조금은 논리적인 듯한 소문도 있었다. 나는 촛불 알러지 때문이라는 쪽을 더 믿는 편이다. 좀 유난스러워야지.

여하튼 개봉된 <밀크>를 보았다.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쿨하게 사는게 좋다고는 하지만, 스폰지 하우스는 멀쩡한 4:3 비율의 영화를 1.85 : 1 로 아래위 다 잘라내고 상영했던 전적이 있었던지라, (게다가 그에 대한 변명도 지금의 영진위 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촌스러운 수준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먼저 한 일은 IMDB 를 뒤져서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가 케이블 채널인 HBO의 제작지원을 받은 관계로 4:3 으로 촬영되었고, 아마도 그 때 나름대로 4:3 화면비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는지 그 다음 작품인 <파라노이드 파크 Pranoid Park>도 4:3 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소년의 클로즈업은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내심 <밀크>도 하비 밀크라는 게이 운동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만큼 역시 4:3 으로 찍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사실 <파라노이드 파크>를 보면서 공공연히 커밍 아웃한 게이 감독이 이제는 미소년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한 탐미적인 자신만의 세계로 퇴장하려고 준비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상상을 했다. 이 영화는 의도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이 자신의 세계에 균열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소년에서 어른의 세계로 건너가는 바로 그 문턱 앞에서 멈춰선다. 흔히 '죽음 3 부작' 이라는 앞의 세 작품들에 대한 아주 멀리 떨어진 고별사 같은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다음, 구스 반 산트는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를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Milk>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구두







이태원을 지나가는데 구두 한 켤레가 곱게 놓여져 있었다.
구두의 주인은 어디 갔을까.
벼랑 같은 세상,
가벼이 맨발로 뛰어내렸을까.



푸른달



푸른 달

너를배웅하며나선길위에서사람들은희미한저녁불빛처럼어슬렁거리고있었지너는자꾸만낮게침묵하는담벼락에맺히는그림자들을피해발걸음을옮기고있었어너는이상 한날의소풍에대해나에게이야기했고내가알지못하던책과내가알지못했던시간들과내가가보지못한곳의풍경과또다른사람들의한숨과웃음에대해이야기했어너는나를 오른쪽으로듣고있었지나는너에게왼쪽얼굴로이야기했어우리는볼과볼을마주하고있는멀리떨어진신화속의진자웅동체처럼말이없었지날개라도돋아오른것처럼훌쩍 서울을빠져나가는마지막버스에올라타면서너는슬쩍뒷머리를흔들었어버스속의사람들은오래된통조림속의생선들처럼순해빠진얼굴을하고있었지나는생각난듯이내 귀에손을건네오던너의모습을기억해나는두꺼운겨울의커튼처럼내려오던너의눈꺼풀을기억해나는수줍게매달려있던유리로된푸른달을기억해.





茫願




茫願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쇄골 바로 위에서부터 그 아래로
주욱
낭심 바로 위까지 좌악
몸통을 열어 투두둑
단단히 잠긴
오래된 겨울 외투의
단추를 뜯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끄아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아야 해
억지로 눌러서 피가
흐르는 입술을
흐르다 터져서 거품이 송골 맺히는
목줄기 아래로 나를
활짝 열고 그 안에
심장, 췌장, 쓸개, 간, 위장, 몹쓸 맹장까지
모조리
바깥으로 휑하니
들어내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해
그 격렬한 떨림을
감당하지 못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때 까지.
그렇게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조금은
가벼워 질 수 있을까.
헛헛한 뱃가죽 두들기며
시원한 웃음 웃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그런 생각을
품었던 저녁이면
꿈을 꾸었다.

세상이 온통 젖었는데
바다는 젖지 않았다
바다에 간 나는
바다를 적셨다

바다에게 나의
이야기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경비병



경 비 병

1915년 12월 23일, 시마 콰트로
살해당한 동지,
그의 으르렁거리는 입,
만월로 향해 있고,
그의 부어오른 두 손
나의 침묵 속으로
들어오는데
그 곁에 온밤을 꼬박
납작 엎드려
나는 사랑 가득한
편지들을 썼다

내가 삶에
그토록
꽉 매달려본 적이 없었다.



- 주세페 웅가레티 (Giuseppe Ungaretti, 1888 ~ 1970)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한다협 + 시민영상기구 공동 기자회견

 

 

 

어제 한다협과 시민영상문화기구가 자처한 공동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 두 단체를 두고 일어나고 있는 영화계의 불만과 의혹에 대한 해명을 하시겠다는 자리인데, 결국은 더 지리멸렬해졌다. 궁금하다. 이사람들이 일부러 바보짓을 하는 것인지, 아직 충분히 서로 쿵짝이 안 맞아 그러는 것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기사의 내용을 보자면.

 

문화미래포럼과 시민영상기구는 별개의 단체라고 주장하며 "인적구성에 중복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인적구성도 조직의 목적도 전혀 다르다"

 

- 이 말씀은 그러니까, '난 애니도 좋아하고 게임도 좋아하고 플라모델도 좋아하고 미소녀 그룹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전부다 꿰고 있지만 오덕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것이나 다름없다. 더 웃긴것은,


기자회견문에 첨부해 배포한 시민영상기구 측 사업계획서에도 이사장부터 이사, 소장, 사무국 팀장 등 인적구성을 설명하는 파트에는 각 인물들의 경력만 나열돼 있을 뿐 이름은 모두 빠진 상태.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지만 장원재 이사장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 라는 부분. 이분들께서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철학을 계승하시려고 안간힘을 쓰시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공공기관의 사업에 프라이버시가 중요한지 모르겠다. 혹시 DC 갤러들이 신상 털러 들어갈까봐? 더 점입가경은.


또한 "미디어센터가 원래 퍼블릭 액세스와 시민의 영상향유권,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인 만큼 운영철학을 밝혀달라"는 질문에는 엉뚱하게도 "미디액트가 제대로 인수인계를 해주지 않아 운영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답했다. 미디액트가 서류는 물론 장비도 제대로 넘겨주지 않은 데다 회원들이 선납한 교육비를 제대로 돌려주지 않아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 장원재 이사장은 기자회견 내내 미디액트를 탓하며 "(미디액트 측이) 실질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거부하고 있다"

 

-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전정권이 인수인계를 거부했다. (사실은 인수위가 제대로 넘겨받은 인수관련 자료를 '필요없다'는 이유로 거들떠 보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 며 오리발 내밀던 분들과 똑같다. 가카께서 그러니 나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여러모로 국민들의 모범이 되시는 가카이시다.

 

이어지는 내용은 프레시안 김숙현 기자의 기사 전문을 읽어 보시길. 도대체 어떻게 기사를 써야할지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는 소회를 전하시는 김숙현 기자의 고민이 기사에서 묻어난다. 눈물 없이는 못 볼 지경이다.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호부호형을 허하라

 

 

 

안티이명박 수석부대표 초심님이 사무실에서 11시 10분경 글을 쓰던 중 경찰에게 긴급체포 되어서 강남경찰서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체포사유는 대한문 분향소를 침탈했던 서정갑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한다. 서정갑은 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탈취해 가져가서는, 마치 적장의 수급을 들어올리는 장수마냥 의기양양하던, 썩은 눈깔을 '맥아더 라이방'으로 가리고서는 거들먹 거리던 인간이다. 아니 개새끼에게 개새끼라 했을 뿐인데, 좆같은 새끼에게 좆같은 씨발새꺄라고 했을뿐인데, 그게 명예훼손이라니. 그 따위 개차반 짓을 하고 다니는데 인간 취급 받기를 바랬나? 어차피 '내 손에 피를 뭍히겠다'는 고귀한 생각으로 저지르신 일 아닌가? 그렇다면 명예 따위야 훼손 되어도 감수를 하셔야지.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낭만주의

 

 

낭만주의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이십 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더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왔던 거야
생각해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올려주었을 거야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거야

 

 

 

안도현 詩集, <아무것도 아닌것에 대하여>

 

 

 

 

2010년 2월 24일 수요일

공모되어야 하는 것은 영진위의 정책이다.



[성명서] 전문

"공모되어야 할 것은 영진위의 정책"
-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테크 공모사태와 관련하여 -


1.
2010년 벽두부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일방적인 '공모' 집행으로 영화계는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영 진위(위원장 조희문)는 독립영화전용관/영상미디어센터/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과 관련하여, 공모를 통해 운영주체를 교체하고 있다. 이미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는 형식적인 공모 절차를 거쳐 교체가 완료되었으며, 시네마테크전용관은 공모접수를 마쳤지만 지원자가 없어 유찰된 상태이다.

그야말로 '사태'로까지 비화된 이번 공모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공정성과 투명성에 있어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공모사태에 대한 조희문 위원장의 대응은 공모 자체의 문제를 넘어 영진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를 초래할 정도이다. 오히려 공모되어야 할 것은 영진위 정책이 아닌가 할 정도로 조희문 위원장과 영진위의 행보가 우려스럽다.

2.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테크 지원사업은 말그대로 '지원'사업이다. 오랜 기간 영화인들이 추진해 왔던 사업들을 영화 진흥을 위해 영진위가 그 필요성과 중요함을 인정하고 지원해 왔던 것일 뿐이다. 비록 법적, 행정적인 표현이 '위탁'사업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영진위의 소유물이 아님은 명백하다.

따라서 적어도 공모를 추진하려면, 지원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요건과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했다. 하지만 영진위는 단지 공모만을 진행했을 뿐이다.

해 당 사업들의 기존 주체들이 법적으로 수탁자라는 이유만을 들어 '사업 자체'를 공모한 영진위의 정책 결정은 지원이 아닌 소유로 해당 활동과 사업을 이해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산의 일부를 지원했고, 그 예산을 기반으로 사업이 진행되었으니, 영진위가 사업 공모를 집행하는 것은 타당하다는 입장을 영진위가 밝힌 것("공모 절차 하자 없다", 2010.02.22)은 이러한 역발상의 사후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오만한 발상은 '내 돈 내 맘대로'라는 악덕기업이나 다를 바 없는 행태이다.

공공기관 으로서 영진위가 새로운 정책 결정, 특히나 기존 사업에 대한 변경을 추진하고자 한다면 변경을 통한 사업의 목표와 기대효과, 정책집행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할 합리적 집행계획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민간위원회로서 영진위는 무엇보다도 영화인들과의 소통을 통한 합리적 정책결정을 우선시해야 한다. 특히 이번에 공모된 '사업'의 위상과 목표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또다른 사례로 현재 문제제기되고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사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번 공모사태와 관련하여 절차적 적법성 문제 이전에 영진위, 특히 조희문 영진위원장이 드러내 보인 태도는 바로 위와 같은 영진위의 본질적 위상과 역할을 망각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3.
공 모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영진위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적 의도나 이념으로 몰아 부칠 일은 아닌 것"이라며 "많은 왜곡"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왜곡'이 안타깝다면, 공정하고 투명하게 심사를 진행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면, 그 사실을 공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독립적인 사업을 병합하여 심사한 이유, 심사위원 선정, 심사세칙의 규정력, 심사과정상의 논의 경과, 심사결정과정에서의 위원회의 개입, 제출서류의 법적 타당성 등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어느 하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다못해 스스로 인정하는 "영진위 실무진의 미숙한 점"이 무엇인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곡을 탓하기 전에, 논란을 안타까워하기 전에 왜곡과 논란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영진위와 조희문 위원장이 문제이다.

이 와 같은 무계획, 무원칙, 불공정으로 공모가 진행된 위탁사업의 폐해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현재 영진위의 위탁으로 새로 운영되고 있는 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 사태가 그것이다. 영진위가 한국영화아카데미 감독들의 작품을 감독의 동의없이 해당 상영관에 상영토록 허락하고, 해당 감독들은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고 시위한다. 이것이 영진위가 영화를 그리고 영화감독을 나아가 영화계를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4.
독립영화전용관과 인디스페이스, 영상미디어센터와 미디액트, 시네마테크와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인들의 역사속에 존재하는 주체이며 관계이다. 그 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그저 영진위 진흥사업의 한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는 한국영화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기초이자 뼈대이다. 기초가 흔들리면 본체가 무너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의 사태가, 그리고 영진위가 내놓은 입장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 기초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으면서도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애써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현재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정한다면, 종국에는 한국영화의 미래 또한 암울할 것이다.

사태가 단지 진정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영화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진위가, 그리고 조희문 위원장이 정말 한국영화를 사랑한다면, 한국영화의 앞날을 생각하고 걱정한다면, 즉시 사태의 정상화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영진위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 이에 대한 영화인들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전용관 지원사업과 관련하여, 이미 결정된 공모는 원점에서부터 재검토되어야 한다.
- 시네마테크 지원사업 공모는 즉각 철회되어야 하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지원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영화인들은 현재의 사태를 정상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결단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영화의 미래 기반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0년 2월 24일



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영화인회의 · 여성영화인모임
영화감독조합 · 미술감독조합
한국영화제작가협회 · 독립영화협회





나쁜일은 자꾸만 반복된다.

 

 

 

자칭 '제 1 독립영화관'이라는 한다협의 상영관 시네마루에서 독립영화 감독들의 보이콧이 이뤄지자. 이에 한발 빼는 척하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들을 무단 상영하고 있다. 이른바 땜빵 상영이 되는 것인데, 영진위에서 제작 지원을 했기 때문에 저작권 행사는 합법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한예종 쪽에도 작품을 지원해줄 것을 통보했다고 한다. 그간 한독협에서 열정을 다해서 일구어온 국내의 독립영화계의 훌륭한 자양분을 망치는 것은 이렇게 한 순간이다. 웃기는 것은 영진위가 지원 중단을 결정한 한국영화아카데미의 활동이 위축된다면, 이들이 날로먹듯이 가져다 상영할 작품의 수급처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말로는 20 년 ~ 30 년을 내다보는 결단이라고 말씀하시는 대통령 자신이 먹튀 대통령이니 그 비슷한 인물들과 단체들이 여기저기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시네마테크 사태는 어떻게 본다면 아주 큰 그림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 김연아의 경기를 기다려 팔당 상수원 두물머리에 경찰 병력 900 여명을 동원해서 토지에 대한 강제집행에 나섰다. 4 대강 사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졸지에 삶의 터를 잃게 되었다. 이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공무집행 방해죄로 잡아 들이고 있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용산이 그랬고 미디액트가 그랬고 한예종이 그랬다. 나쁜일은 자꾸만 반복된다.

 

 


 

아니다, 인간이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밝힌 상현은 태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아직은 상현이 뱀파이어라는것을 두려워 하는 태주는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한다. 도망가려는 태주를 상현은 화장실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이해할 것을 종용한다. 이때 화면 왼쪽의 거울에는 상현의 모습이 비춰진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다. 뱀파이어는 그림자가 없다. 이것은 뱀파이어 전설(장르)의 아주 오래된 '전통' 이다. 뱀파이어가 인간이 아닌 (어쩌면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거울에 모습이 비춰지지 않거나 그림자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옮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에서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누구인가 ? 그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다. 이 장면을 단순히 태주의 위치가 거울에 비춰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거울 속에 두 사람은 함께 비춰지지 않아야만 했을까? 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을 보아야만 했을까? 거울에 비춰진 상현은 누구(무엇)인가 ? 그리고 거울 바깥의 태주는 또 누구인가?

뱀파이어는 육식 동물(?)이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뱀파이어는 마치 여우가 닭을 잡아 먹듯 인간의 피를 마신다. 중요한 점 한 가지. 뱀파이어는 결코 희생물의 '살'을 먹지 않는다. 오로지 피를 빨아 먹을 뿐이다. 피는 생명의 정수다. 그러므로 뱀파이어가 피를 빠는 것은 식욕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격렬한 욕구, '갈증 thirst' 이다. 그림자도 남지 않고, 거울에도 비춰질 수 없는, 죽어있는 자인 뱀파이어가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려는 욕망, 지금 여기에 살아있기 위해, 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희생물의 생명을 찾아 내미는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격렬한 욕망인것이다.

그렇다면, 상현은 정말로 '뱀파이어'인 것일까?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일종의 뱀파이어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를 시도한다. 상현이 거울에 비춰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존재론적으로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현이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이 가득한 뱀파이어라고 오해는 하지 말자. 그는 여전히 뱀파이어다. 그런데 그는 인간인 척 행동한다. 포식자로서의 능력과 자격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낭비한다. 자살자들의 피를 빨면서 그들의 죽음을 도와 주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태주를 설득하려한다. 그는 뱀파이어로서의 조건 혹은 상태가 아닌 뱀파이어로서의 태도를 문제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자가당착. 차라리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다. 라고 말하자.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대중영화 경계의 확장과 유희

 

 

대중영화 경계의 확장과 유희
-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의 2000년 개봉작 3 편에 대하여.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이름 표기는 가나다 순)는 소위 흥행성과 작가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평가 된다. 적어도 본전치기 이상의 티켓 파워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평단'의 호응과 관심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들의 출발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00 년은 언급한 세 감독의 작품이 (어쩌면 공교롭게도) 모두 개봉된 해이다. 김지운은 <조용한 가족>(1998)이후 2 년 만에 송강호를 주연으로 내세워 <반칙왕>을 발표한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강제규의 <쉬리>(1998) 이후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다. 그리고 봉준호는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을 내놓는다.

 

지금은 모두 독특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이 세 감독들은 당시로서는 비대중적인 요소들을 대중적 감성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영화 잡지들에는 '김지운식 유머'라는 신조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굳이 해석을 곁들이자면 좀 썰렁한 것 같은데 피식하고 웃게 되는, 웃음의 포인트가 엉뚱한 곳에 던져지는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에서 잘 드러난다. '학생은 인생을 아느냐'는 자살자의 질문에 '저 학생 아닌데요' 하는 식이다. 차기작으로 발표한 <반칙왕>역시 다르지 않다. 가면을 쓴 대호(송강호)가 아버지(신 구)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는 장면의 비장함은 '나이 값을 못한다'며 타박하는 아버지의 돌발행동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간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 The Host>(2006)이 까이에 뒤 시네마에 소개 되었던 기사의 제목은 '삑사리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정작 '삑사리'의 대가는 따로 있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이다. 그는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으로 영화평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영화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삼인조>(1997)로 박찬욱의 감성은 한국 시장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재차 증명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지나치게 산만했다. 주제가 보이기는 하는데, 따라가기엔 뭔가 숨이 가빴고 불친절했다. 외형적으로 필름 느와르의 변형처럼 보이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이 딱 그랬다. 어쩌면 배창호의 <고래사냥>(1984) 혹은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이명세의 <개그맨>(1988)의 다른 판본으로도 보이는 <삼인조>역시 다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고래사냥>과 <바보선언>은 같은 1984 년도에 개봉한다.)

 

봉준호의 <플란더스의 개>는 이러한 '비주류적인 감수성'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유희한다. 후드티의 모자끈을 질끈 당겨 묶고 아파트 옥상을 달려가는 현남(배두나)의 뒤 쪽으로 노란색 우비를 입고 환호를 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의 모습은 TV 애니메이션 <딱따구리>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나무통을 타고 뛰어내리는 딱따구리에게 환호하는 관광객들의 우비 입은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교수가 되기를 원하는 시간강사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 작품은 97 년 IMF 이후 '초라한 남성'을 다루는 영화의 유행에 편승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손쉬운 위무를 건넴으로써 대중의 호의를 갈구했던 영화들과는 다른, 어쩌면 조금은 불편한 영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플란더스의 개>를 전복적이라는 수사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첨예할 수 있는 소재를 슬쩍 비껴선,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시선으로 비아냥거리듯 묘사하는 봉준호의 영화는 애초에 편안한 대중영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삼인조> 이후 3 년 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내놓는다. 그 전까지의 박찬욱 의 영화를 기억한다면 생소할 수도 있는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극한 상황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하고 독특한 블랙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정부 지원은 최대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간섭은 최소화'라는 기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이란 없지만, 당시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에 기인한 일종의 '해빙 무드'가 아니었다면 <공동경비구역 JSA>가 유사한 소재의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던) <쉬리>의 흥행기록을 갱신 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직접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지난 세대의 잔유물인 '군사분계선'을 무대로 벌이는 일종의 환상극이다. 군사 분계선은 적과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현실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가상의 장소이다. 철조망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총알은 진짜 총알이지만, 그 총알이 발사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정치도, 체제도 아닌, 전 세대에서 지금 세대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물려받은 유산이다. 

 

김지운의 <반칙왕>은 무기력한 회사원이 프로레슬링을 통해 자신감을 찾으려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바로 반칙을 하는 것, 그것도 '반칙왕'이 되는 것이다. 유비호 (김수로) 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대호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링 위에서 대호의 캐릭터는 바로 '반칙왕'이다. 반칙왕이 이긴다 해도, (반칙을 했다면) 그것은 진짜 승리가 아니다. 대호의 승리는 경기의 룰을 무시하고 파괴해야 얻을 수 있다. 내가 합의하지 않았던 (이미 당연하게 제시된)룰을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순응 할 것인가.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 아마도 김지운은 슬쩍 유보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담 같은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최종보스'인 부지점장(송영창)과의 결투에서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진다.

 

<플란더스의 개>에서 우리는 아주 무기력한 지식인 남성 주인공을 본다. 그는 아내의 퇴직금으로 교수직을 청탁하려고 한다. 요즘 '떡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검찰과 '3 대 유력 일간지'들이 열심히 유행시키고 있는 '달러로 비자금 찔러주기'를 영화 속 고윤주(이성재)가 알았다면 좀 더 폼 나게 청탁을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이 남자는 우직하게 케익이 뭉개지건 말건 박스에 만 원짜리 현금 다발을 우겨넣는다. 정당한 절차가 아닌 금품이 오가는 청탁이 필요한 영화 속 '교수 사회'도 한심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아내가 가져오는 돈만 있으면 지금의 현실적인 곤란함이 해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주인공 역시 한심하다. 봉준호의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양비론으로 빠져버릴 위험도 있었지만, 어쨌든 심각하게 편파적이거나 틀린 묘사는 아니었다. 

 

어쩌면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는 세 감독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두고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00 년에 개봉했던 세 감독의 작품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희미한 사진으로만 존재하거나(공동 경비구역 JSA), 혹은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여성화된 아버지의 모습이거나(반칙왕) 아버지 세대의 규칙에 어쨌든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플란더스의 개) 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들은 단순히 젊은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불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통과제의를 겪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조망하는 시각을 제시했다.

 

불화가 일어난 상황을 제시하고, 결국에는 그 불화를 딛고 화합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대중영화 화법의 주요한 방식이다.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들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대중영화 화법의 규칙 상당부분을 벗어난 지점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전의 영화들과 변별점을 가진다. 이들의 영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규정지어진 경계를 허물거나(안티 히어로 주인공의 실패담, 반칙왕), 확장하거나 (만화적 상상력과 표현의 도입, 플란더스의 개), 또는 이제는 조금 덜 곤란해진 질문(JSA, 분단 상황의 당위성)을 통해 찔러 들어옴으로써 대중영화 작법의 형질 변경을 시도했다.


 

네오이마주 오프라인 4 호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