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291753155&code=930201
이런저런 기사나 정황이 그냥 올해도 물건너 간 쪽이었는데 갑자기 급선회.
흙. 그냥 맘편하게 포기하고 있었는데.. T.T;;;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291753155&code=930201
이런저런 기사나 정황이 그냥 올해도 물건너 간 쪽이었는데 갑자기 급선회.
흙. 그냥 맘편하게 포기하고 있었는데.. T.T;;;
세상의 폭력은 가족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카인은 추방 되었다. 카인은 하느님의 표지를 이마에 받았는데, 그 표지를 가진 카인에게 그 누구도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세상 누구도 카인을 죽일 수 없었다. 만약이란 없지만, 카인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면, 카인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폭력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폭력의 세기는 시작되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에. 그 시간들이 의식의 깊은 곳에 단단하고 견고하게 새겨질 만큼.
양익준의 데뷔작 <똥파리>는 가족을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야기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다. 개인이다. 개인이 마주하게 되는 세상이다. 세상의 공기는 폭력으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처럼 '숨가쁜 Breathless' 종류가 아닌, 거의 전문가적인 정확성으로 세밀하고 꼼꼼하고 치밀하게 벌어지는 폭력이다. 하루치 일감이 떨어진다. 장부에 적힌 주소를 찾는다. 윽박지르고 때려서 돈을 받는다. 받아낸 돈은 다시 돌아온다. 그 중의 일부는 수고비로 다시 흘러 나간다. 인 풋이 있으면 아웃 풋이 뒤따른다.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다. 폭력은 공평무사하다. 위에서 아래로,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막힘없이, 쉼 없이 흐른다. 그 흐름이 세상을 호흡한다.
- 온몸의 기운과 기댈만한 희망이 모조리 빠져나가 등짝이 갈라진 메마른 땅처럼 하루 하루를 연명 할 지라도, 어쨌든 두 눈을 뜨고야 마는, 그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사람이 있다. 프레시안 김숙현기자. 영화에 대한 열정,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커다란 절망과 동시에, 삶에 대한 자존감을 (어떻게든) 찾아내기 위해 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개인적으로 '완소'감독 이라고 생각하는 김응수 감독의 인터뷰를, 이 사람이 감행(!)했다. 그리고 <반두비>의 신동일 감독 인터뷰도 같이 올라왔는데 거기에 덧글을 달면서 뻘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요즘과 같은 시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주 가차없는 답이 돌아왔다. 앞 뒤 수식도 없이 딱 '희망이 없는 시대'라고. 가차없이 명료했다. 잠간 갸웃했다. 그럴까? 생각해보니 내 머릿속엔 요즘 시대에 대해 '어처구니 없음, 지랄 맞음, 치졸함' 정도의 단어들이 맺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감각' 혹은 '생채기' 같은 것들 이라고 해야할까.
- 이정환 기자의 블로그는 구글 리더로 등록해서 애독한다. 이사람 블로그는 좋은 것이, 리더공개를 전체를 해 놓아서, 굳이 꼭 블로그 방문을 하지 않더라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 이전에. 팩트에 근거한 기사들을, 혹은 글을 쓴다는 점이다. 문장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탄탄한 저널 기사의 전형을 배울 수 있다.
오늘 구글 리더를 검색하니 이정환 기자가 이명박 정부의 친 서민 정책에 관한 글을 올렸다. 한 마디로 빚 좋은 개살구, 그냥 '쇼' 일뿐이라는 내용이다. 동감한다. 그리고 딱 그만큼 속상하다. (관련링크 : 말로만 친서민? 진정성과 의지는 의문)
- 요즘 하루키의 1Q84를 읽고 있다. 이명박은 꼭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와타나베 나오루'와 똑같다는 생각이든다. 물론 이명박을 적대적 타자의 위치에 놓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반대로 그를 '이해' 한다고 해서 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 역시 아닌것 같다. 그를 '어떻게' 한다고 뭔가가 달라질까? 그렇지 않다. 그를 어떻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어떻게든' 해나가야만 한다. 끈질기게, 집요하게,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압도적인 편견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어떤 악의라던가, 열정이라던가, 여하간 인간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 마치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텅 빈 인간'의 현신같다.
- 하루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하루키 작품중에선 개인적으로 <언더그라운드>를 가장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이 좀 이상한데, 여하튼 하루키 작품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의미있는'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맞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는 하루키가 오움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몇 개월 동안 지하철을 탈 때마다 심각하게 신경이 곤두섰던 기억이 난다. 후유증이 컸다는 이야기다.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 충실하고 꼼꼼하게 인터뷰어의 역할을 해낸다. 가급적이면 개인적인 감상을 절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용만을 기술한 이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 자신이 어떤 종류의 '어둠' 혹은 '공동'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 처럼 보인다. 소설이 아닌데도, 읽고 나면 어떤 하드보일드 소설보다도 더 거친 세계의 단면을 체험한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하루키의 노림수 였는지도 모른다. 팩트와 절제로 이루어진 평편한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 보도록 이끌어 가는 것.
그러나 하루키의 여행기는 읽지 않는다. 절대로 읽지 않는다. 예전에 <먼 북소리>를 읽고선 여행에 대한 향수병 비슷한 것에 한동안 아주 심각하게 시달린 이후로는. 세밀한 순간의 묘사에 관해선 하루키를 따를자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그 문장의 맛갈스러움이란. 그냥 항복이다 항복.
첫 번째 노트 [F For Fake]
웰 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은 기본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 작품으로는 마지막인 <거짓과 진실, F for Fake>(1974)역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엘미르 드 호리 Elmyr de Hory라는 당대의 위작 화가와 그의 전기를 쓴다는 명목으로 호리에게 기생하는 클리포트 어빙 Clifford Irving에 대한 이야기를 축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농담같은 진단을 시도한다.
개인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개그의 범주로 넣어두는 편이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들을 속이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한 번 속임수를 간파해 보십시오.’라고 호기 좋게 선언하고 시작되는 것 같은 이런 부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예를 들자면 우디 앨렌의 <젤리그, Zelig>(1983)나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피플, 24 Hour Party People>(2002)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들을 보면 도저히 같은 시간대에 있을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해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연기를 한다. 점잖은 영국식 억양으로 뻔뻔스럽게 관객 앞에서 ‘뻥’을 치는 스티브 쿠건의 모습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시민 케인>의 앞부분. ‘News on the March’를 보면 ‘아메리칸 쿠빌라이 칸’이라고까지 불리던 찰스 케인이라는 인물의 일대기가 소개된다. 그는 역사 속의 중요한 장면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심지어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만난다. 한 술 더 떠 그는 그 둘에게 평화를 역설한다.
세 계 영화사의 상석에 오른 <시민 케인>을 둘러싼 지나치게 심각한 가치 평가는 오히려 영화 자체를 관객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누구나 <시민 케인>을 알지만, 누구나 <시민 케인>을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영화를 보는 행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심각하게 영화를 보는 것이 나쁜것은 아니다. 그저 개인의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화를 유희로서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심각함은 영화를 오독할 소지가 크다. 웰스가 할리우드로 입성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가능했는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요즘 영화의 홍보 카피로 딱 알맞은 ‘대국민 사기극’을 통해서였다. 영화 <스팅, Sting>(1973)의 트릭은 웰스가 저지른 악동 짓에 비한다면 애교에 불과하다.
웰 스는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환영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태도는 <거짓과 진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마술사로 종종 여기며, 실제로 그는 상당한 마술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위대한 마술사인 후디니의 유명한 경구를 빌어 이렇게 말한다. ‘마술사는 마술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연기자는 무엇을 연기하는 것일까? 연기자가 진실을 ‘연기’할 때 그것은 진실이 되는가? 반대로, 연기자가 거짓을 연기할 때 그것은 거짓이 되는가? 웰스의 관심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냐 가짜냐, 혹은 진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보는 이에게 작용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웰 스의 통찰력은 결국 영화장치의 속성을 관통한다. 그는 자신의 데뷔작을 거대한 허구와 현실을 오묘하게 엮어 만들어 냈다. 그것은 내용뿐만 아니라 – 케인의 실제 모델이 윌리엄 허스트다, 혹은 하워드 휴즈다 등등의 논란 –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시민 케인>은 딥포커스(전심초점)를 사용한 좋은 예로 많은 영화 입문서에서 다루어지지만, 사실 그러한 장면들은 대부분 영화적 트릭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웰스가 구축한 것은 전심 초점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전심 초점 공간의 환영들이다.

대 상 object의 어원 Objectum 은 ‘문제’라는 그리스 어에 근원을 둔다. 여기서 ‘주어지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대상이 아니다. 결국, 던져진 것으로서의 대상은 바로 ‘문제’이다. 대상이란 나 자신(관객)이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환영을 본다. 그런데 그 환영은 진실(진짜)이 아니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일어나는 반응은 진실(진짜)에 가까운 반응들이다. 여기서 주의. 진실에 ‘가까운’반응이어야만 한다. 이것과 저것이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그리고 여기까지 근접할 때,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 바로 그 사이에서 영화적인 운동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운동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시민 케인>도 그렇지만, <거짓과 진실>역시 웰스가 절묘하게 취하고 있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맛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진짜로 있는, 있었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또 어느 순간에는 어린아이처럼 이 모든 것은 농담일 뿐이라고 한 발 슬쩍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순응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관객에게 아마도 이러한 태도는 곤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그 러나 <거짓과 진실>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영화이다. 후반부의 피카소의 에피소드를 보면 (웰스의 오랜 ‘여자친구’라는 오야 코다Oja Kodar) 늘씬한 미녀가 피카소의 창문 앞을 지나간다. 피카소는 말 그대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훔쳐본다. 슬쩍 창문을 가려 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이 노화가의 눈이 번득거린다. 그런데 피카소는 실제의 피카소가 아니라 마치 어딘가 잡지 사진에서 오려낸 것 같은, 그의 얼굴을 촬영한 스틸 사진이다. 여기서 웰스는 한 발 더 나간다. 피카소의 표정과 그가 그린 작품들을 병치한다. 피카소 창작의 비밀이 비로소 폭로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피카소를 닮은 배우나, 또는 피카소를 직접 촬영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맘대로 결정해 버린 것 같은 이 장면은 정말 익살맞다(어차피 제작비도 없는데.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마치 ‘이 장면의 피카소가 진짜 본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이 사람을 피카소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착각한다면 그걸로 족하다’라고 눙치는 것 같다.
거짓과 진실, 그리고 그 두 개념의 사이, 또는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역학 관계의 끊임없는 변화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던지는 질문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이렇게 재기 발랄하게, 또한 기술적으로 놀라운 완성도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웰스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리고 (저승에 있는 그가 섭섭하지 않게 이 말을 꼭 넣자) 역사상 가장 대책없는 장난꾸러기였다.
"예술은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 오손 웰스
어쩌다가 '정치적 공정함' 이라는 가치가 일개 게시판에서 'P.C'라는 닉네임으로 수난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첫 부분에서 주인공이 독일어로 대화한다고 '허이구야' 소리를 내지르며 '불편하군요' 운운하는 동네다. 그러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그게 허세 처럼 보인다고? 그럼 하루키의 소설을 지적질하면서 '불편...' 운운하는 당신은 허세가 아니라는 자신은 있는건가? 그러고도 이런저런 사안에 P.C를 내세워서 짐짓 소쿨한척,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 처럼 열을 올린다. 아 웃긴다 웃겨. 불편하면 그냥 알아서 입을 다무는 것이 예의다. 어쩌다 당신(들)의 불편함을 남들이 알아줘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인가. 자기들은 정치적으로 공정하다며 서로 애널 서킹을 해 주며 만족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저 이것저것 세상사 불편하긴 한데 짐짓 나서서 어찌 해보긴 자신도, 배알도 없는 인간들이 그 좁은 어깨를 마주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깨방정 떨면서 자위하는 것에 불과할 뿐. 이분들 덕분에 진짜 정치적 공정함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니, 이것이야 말로 이 게시판의 존재의의가 되는 것일까. 그래도 웃긴건 웃긴거다. 풉.
딱히 개신교를 욕하고픈 마음은 없다. 어차피 종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걸 지 X 꼴리는 대로 운용(!)하는 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인간들은 환난과 핍박이라는 컨텐츠를 즐기는 것 같다. 그정도 어려움은 겪어야지 우리편이지. 이런 맘이랄까.
그냥 할말 없는데. 욕은 나온다. 게다가 이런 기사까지.
아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더 열심히 의지하며 살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더라
'하나님께 더 열심히 의지해서 회개 했으니 우린 무죄' 뭐 이런 심사? 에라이 씨부럴년놈들. 지럴쌈싸먹고 자빠진다. 그건 하나님의 법이니 그렇다 치고, 당신들은 실정법의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이다. ! 아니면 아예 신정 일치 국가로 바꿔버리던가.
제주도
섬의 네거리는 텅 비었다.
바람이 불었다.
창문이 흔들렸다.
숨어들어온 모기의 날개 소리를 들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불이 모조리 꺼졌다.
이십사시간 열려 있는 편의점은 꺼지지 않았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길 끝에 바다가 있었다.
낯선 잠자리의 머리맡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비릿하지 않았다.
짜지 않았다.
바다는 검고 투명하고 깊다.
창틀 끝에 졸고 있던 나방이 훌쩍 뛰어내렸다.
실 끝에서 대롱 거리던 스위치를 잡아 당겼다.
불이 꺼졌다.
어둠속에 얇은 이명음이 남았다.
끊어진 형광등의 시신경이 파르르 떨었다.
의자에 널어둔 젖은 양말에서 물이 떨어졌다.
옆 방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렸다.
복도 맨 끝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고 법 조항에 명시 되어 있으니, 법적으로는 해가 지면 시위나 집회를 하면 불법이다. 현재는. 근데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것은 사실이다. 어두워 지면 집에 가야해서? 저녁을 해놓으신 어머니의, 혹은 아내의, 혹은 남편의, 또는 기타등등등등의 성의를 봐서라도 ? 그래야 가정이 평화롭고, 가정이 평화로우니 국가도 평화로우니까 ? 가화만사성 치국평천하라서? 난 정말 모르겠다.제10조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도 옥외집회를 허용할 수 있다.
사무실 건물은 요즘 이것저것 공사중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여름에 누수 때문에 정전 사고가 두번이나 일어났고, 자잘한 문제가 발견된 탓인지 연일 건물에서 공사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로비로 들어서면 비계로 얽기섥기 올려서 작업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 위에서 1900 년대 초반 태생의 수염 덥수룩한 화가가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고 있을것만 같아서 자꾸만 올려다 보게 된다.
사무실이 있는 대학로에도 이리저리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학로에 시냇물을 '조성'하겠다고 한다. 물론 원래 있는 물길을 산에서부터 끌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제대로 된 머리를 가진 인간들은 아니다. 그냥 수돗물을 흘러 보내서 냇가 비슷한 환경을 꾸미겠다는 것이다. 이것도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인지 모르겠다. 그냥 청계천 비슷한 수족관을 대학로에도 만들겠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어떻게 모양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을 둘도 없는 명언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지금의 '디자인 수도 서울'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그냥 우습기만하다.
일백프로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영국산 제품들의 디자인은 어찌보면 우직하기도 하고, 촌스럽기까지하다. 그러나 이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용도가 눈에 딱 띄는 디자인은 영국산 제품 디자인의 강점이다. '핫'하고 '엣지'있는 것에 집착하는 요즘 시대에는 깐깐한 고집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런 디자인 감각은 그저 구호나 캠페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아 왔는가, 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이 되기도한다.
정말로 '오세훈의 서울'의 디자인은 최악이다. 혜화역 나와서 바로 있는 환기구 구조물에는 원목으로 된 패널이 새로 붙여졌다. 기존의 구조물에는 대리석 패널이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요즘의 녹색, 친환경 어쩌구 하는 트렌드에 따라서 나무 소재로 바꾼것 같다. 그런데 기가막히게도, 기존의 대리석 패널을 떼어내고 나서 마감을 한 후에 나무 소재를 올린 것이 아니라, 흉하게 파여진 위에 그냥 철제 프레임 덧대고, 그 위에 나무로 마감을 한 것이다. 당연히 거칠게 마감도 되지 않은 콘크리트는 그냥 훤히 들여다 보인다. 시간에 쫒겨서 마무리 해버린 흔적이 역력하다. 벌써 프레임과 구조물 사이의 '공간'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가득하다. 오세훈이 생각한 기능이상의 '공공 쓰레기통으로서의 기능'을 열심히 수행중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라면 지금 서울 시내 곳곳에서 목격되는 우리들 삶의 모습은 정말로 끔찍하다. 눈 앞의 것들을 가리고, 덧칠하고, 위장하기에 급급하다. 근본적인 진단과 이해 없이 것모습만 꾸미기에 바쁜, 그렇게 내몰리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과연 '세계 디자인 수도 서울'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에 합당한 것일까. 어느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하게 되는 것일까.
명심하기 바란다! 결코 서울을 배척하고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남양주종합촬영소,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부산 이전을 획책 하다가 난관에 봉착하자 제 2의 착상을 내놓은 노사모 일당은 허망한 꿈으로 전락할 것이다. 청와대도, 국회의장도, 부산국제영화제에 포진한 좌파의 주장과 유혹에 빠져들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이 웃긴말이었구나. 절절히 체감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내놓았다는 충무로 영화제가 어땠는지 본인들은 알지 않으려 하는구나. 빤히 보아도 동원된 것이 분명한 단체 관람 티켓 남발에 관람 매너의 기본도 되지 않은 관객들, 게다가 일관성 부재의 프로그램 내용은 또 어떻게하고. (프로그래머는 도대체 어디 누구여?) 그렇게 해 대고서 세계 유수의 영화제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이사람들은 아마도 본인들의 행동은 6.25 이후의 지리산 토벌작전 쯤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만큼 자신들의 사명이 영웅적이라고 추켜세우지 않는다면, 본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 년'이 사실은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실력과 나태함 때문이란걸 덮을 수 없겠지. 가련한 인생들아.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끝에서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끝은 끝일 뿐이다.
하나의 시간이 끝났고
하나의 生이 끝났다
그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은 오늘이다.
여기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가카께서 하셨다.
이미 레임덕 상태이기 때문에 홀가분 하신듯.
마지막 그날 까지 일을 하든 어쩌든
그렇게 하시든지.
결국 죽는 날까지 삽을 놓지 않겠다는 말씀.
근데 초큼 무섭다.
상식, 영어로는 common sense, 공통의 견해를 의미한다. 조금 풀어 보자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혹은 공감하는 지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상식은 불변하는가 ? 그렇지 않다. 아주 더디고 계속해서 바뀐다. 대한민국에서 좌측 통행은 상식이지만,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우측통행이 우선된다. 상식은 그러니까 제한되고 특정한 공간, 영토, 시간대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상식은 특정한 한 사람에 의하여, 혹은 한 집단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점유 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상식을 점유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에 대한 제약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가 성립되는가? 그렇지 않다. 상식은 그저 참조항이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상식에 비추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이 이러한데 너는 잘못된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상식은 만능으로 들이댈 수 있는 잣대가 아니다. 상식이 성립되기 위해선, 그 상식의 잣대를 적용하게되는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상식의 가치가 위협 받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상황이나 조건에 대한 이해 없이 기계적으로 상식을 적용하는 것은 이 정부의 '법치주의' 만큼이나 공허하고 위험한 폭력이 되기 쉽다. 상식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일종의 '국지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합의라는 것은 양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대부분 상식이라는 것은 '보통의, 일반적인' 이라는 항목을 전제한다. 그러나 상식 자체가 보통의 일반의 가치일 뿐이지, 상식을 운운하며 잣대를 들이댄다 해서 그 사람이 보통의 사람이고 일반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일반적 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다수'를 상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일반적으론 그러한 것이니까.' 어떤 상황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상식과 보통을 말할 때, 그 말을 듣는 쪽, 그러니까 화자의 반대편의 누군가는 보통과 일반과 상식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넌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니?' 상식을 언급할 때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타인의 배재를 유발하는 말하기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폭력은 일상과 '보통'의 얼굴을 하고 알아채기 어렵게 쌓여가기 때문에 그만큼 깊고 오래가는 상처를 남긴다.
그러므로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반드시 지금 상황에 대한 명민한 판단과 이해에 대한 기본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당신은 판관이 아니고, 당신 앞의 누군가 역시 죄인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상식을 들이대는 자는 생각하기를 멈춘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런 식의 삶은 아주 비겁하고, 편리하고 이기적인 삶이다. 어차피 이런 식의 '원칙'에 의거한 삶도 개인의 판단이며 선택이지만, 문제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인 '합의'에 기반하는 상식이라는 가치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상식을 참조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상식이라는 가치가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상식은 어떤 칼날 보다도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하는 폭력적인 도구가 된다. 이것이, 상식을 습관적으로 들먹이는 자들을 경계하는 이유다.
보는 것과 쓰는 것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영화에 대해 글을 쓸것을, 그리고 써내고야 말 것을 열망하는 '우리'들이다. 그러니까, 여기 네오이마주에 옹기종기, 혹은 지나가다 들른김에, 그렇게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혹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모여든 우리들 말이다.
우리는 영화를 눈으로 본다. 우리는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언어를 통해 '말'을 하거나, 문자를 이용해서 글을 남긴다. 말과 글에는 각각 '언어'와 '문자'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각각의 도구는 각각의 방법을 매개한다. 그리고 형상을 결정한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언어와 문자라는 도구는 일종의 필터, 형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찍어 내어진’ 말과 글은 전달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말)과 글은 반드시 그 수신자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수신자의 자격 요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송신자(말, 혹은 글을 송신하는)와 동일한 영화를 보았다면 최적의 요건이고, 최소 요건은 적어도, 영화를 본 적이 있거나, 영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영화를 본 적도 없고, 영화가 무엇인지 귀동냥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이에게 영화에 대한 글과 말은 공염불일 뿐이다.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말로, 혹은 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 혹은 쓰는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을 눈으로 본 것을 정확히 동일하게 글이나 말로 옮길 수는 없다. 이미지와 말과 글은 다르다.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를,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열망한다.
말은 불완전하다. 글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말이, 한 문장의 글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달 될 때, 맨 처음 발신자에게서 시작된 말 혹은 글은 그 과정에서 마모 되거나, 덧붙여 지거나, 변형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하고, 쓰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왜 ?
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먼저 ‘어떻게’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말하기와 글 쓰기 중에서 ‘글 쓰기’로 주제를 한정해 보자. 글쓰기에 있어서 최소한의 무언가를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그냥 문장을 나열한다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무엇이, 어떻게 연결이 되고, 구조화 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에 대해 쓰여진 문장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동반한다. 문장은 필연적으로 결여를 전제한다. 한정된 지면에 넣어야 할 것과 넣지 않아야 할 것을 결정하는 순간, 이해를 위한 문장은 오해의 여지 또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적어도 글은 효율적으로, 약속된 방식에 따라, 서로가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쓰여져야 한다.
한 호흡에 읽기 좋은 분량으로 정리된 문단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깔끔하다. 알맞은 문단의 길이와 분량을 결정하기 위한 고민은 각 문장의 형태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진다. 정갈한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습관은 반대로 생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머리 속에 떠오른 글에 대한 아이디어나 컨셉을 논리적이고 좀 더 이해가 쉽도록, 그러니까 전달이 용이하도록 알맞은 형태로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이 손쉽게 뚝딱하고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 눈으로 본 것을 말하고 글로 쓰기를 열망하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과정과 노력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 ? 당신이 눈으로 본 영화를 말로, 글로 쓰기를 열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신과 나에게 소통과 이해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강하고 꾸준하게 생각하고, 정리하고 글을 쓰자. 버릇처럼, 숨 쉬는 것 처럼.
영화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 동시 게재.
저출산 해법은 이중국적
'작은 정부'를 주창하던 청와대가 슬금 슬금 덩치를 불려 가고 있다. 그럴 줄 알았다. 보은 인사(입을 틀어 막으려면)를 하려면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내도 모자랄 판인데. 그래서 그런지 '경제 특보'라는 듣도 보도 못하던 자리를, 그것도 상근직으로 만들어서 강만수씨를 앉혀 버렸다. 이쯤 되면 이명박 - 강만수 연인설이 점점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 <거북이 달린다> 에서 조필성(김윤식)의 대사가 생각난다.
"그 년놈들 눈에서 사랑을 보았으야"
여하튼 오늘의 뉴스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저출산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방향이다. 그러면서 본인도 '백인 조카 며느리'가 둘이나 있다고 말씀하신다. 각하의 어법과 동일하다. '나도 뭘 해봐서 아는데... ' 또는 '내가 아는 누가 그랬는데' 운운 시작하는... 역시 연인설은 헛소리가 아닌 것 같다. 부시 지못미.
여하튼, 저출산의 이유를 이 정부의 인사들이 모조리 그렇듯 외부에서 찾고 있다. 그러니까 애를 낳지 않는 것은 국민들의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의 힘이 아닌 외국인의 (아마도. 혹은 분명히 백인 코카서스 인들의) 우월한 종자의 힘을 빌어서라도 저출산을 해결하자는 속내 깊은 뜻이신것 같다. 그런데, 해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중국적 허가니 뭐니 복잡하게 법을 뜯어고치고 자시고 할 필요없이. '내 아이 낳고 키워볼만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면 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게 근본적이고 적확한 해법이다. 말 그대로 '자생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그게 맞는 방법이다. 내 새끼 하나 싸지르려 해도, 양육비니 교육비니 지옥 같은 경쟁 사회에서 또 나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생각을 하니 벌떡거리고 발기하던 자지도 늙은 오이마냥 축 늘어지는거다. 물론 '이중국적' 운운하는 당신은 좆이 선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이젠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뻘 소리를 하는거 안다. 그래도 당신이 고자 됐다고 남한테 까지 그러는거 아니다.
아 증말 뭐 나게 힘들지만, 그래도 좀 살만하다. 이런 소리 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천하는거. 그게 (불쌍하지만) 이제는 좆도 안서는 당신과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러니 이제 뻘소리그만.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90215205034874
그 옛날 소년중앙 공상과학 여름 특별호라도 보셨나.
병신 지랄 염병 쌈싸먹고 있다. 증말.
그걸 또 '좋은 아이디어'라며 옆에서 똥꾸녁을 살살 긁어준다.
주어는 없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