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안개




안   개



기 형 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나는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p 11-13, 문학과 지성사, 1989






뚝섬










진실




진실은 마음이 묶여 있는 곳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특정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파주>에서 은모는 중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게 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얘기에요? 난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중식은 대답한다. "다 진실이야. 다." 중식의 대답은 모호하고 중의적이다. 은모에게 중식의 말은 대답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은모는 또 다시 길을 떠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진실을 찾지 못한 자는 길 바깥으로 떠돌 수 밖에 없다.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어디엔가 정주할 곳을 찾게 될 것이다.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간밤에 쓰러진 남자
취한 풀처럼
화단 위에서 곱게
자라고 있다.

 

 

 

 

 

 

2006. 8. 3

 

 

 

 

김소영 교수의 장편 데뷔작 [경],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10월 10일, 메가박스 해운대에서 있었던 김 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경>의 상영 후 GV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디지털로 촬영된 <경>은 동생을 찾아나서는 여자의 이야기를 씨줄로, 남강 휴게소를 중심으로 떠나거나, 멈추거나, 잠시 머무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날줄로 엮어내는 영화이다. 길위에 선 자의 쓸쓸한 정조가 묻어나는 이 영화는 뚜렷한 이야기 구조 없이도, 탐색의 형태나 구조 그 자체가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어낸다. 특히 이 영화에서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되고 삽입된다. 최신의 디지털 테크놀러지와 과거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중첩하는 형태로 다루면서 동시대를 축으로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감독 자신의 전망을 조심스럽게 관객에게 건넨다. 진행은 감독의 오랜 동료인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진행했다.




 

허문영 (이하 허) : 김 정 선생께서는 이 영화를 만드실 때 지도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 인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일종의 mapper 같은. 일종의 지도에 관한 페티시즘을 드러내신 것 같은데. 지도에 대한 애착과 집착은 어떤 계기로?

김 정 (이하 김): 영화에 지도가 나오는게 좋고, 하다못해 레이더스에서도 지도가 나오는 장면도 좋아하고, 놈놈놈도 좋아했다. 지도가 사실 여성으로서 영화를 만드는데 영화를 만드는것뿐만 아니라 사는데 있어서도 전세대의 여성 주의자, 감독들이 활동을 하지만, 항상 지도와 같은 (전례)가 없다는 생각, 지도만들기가 정신적으로 중요했다. 고대지도에서 내비게이션까지, 지도가 세상을 그려내고 파악하는 것이 매혹적인데. 사실은 제가 지도치다. 오지를 가도 지도 없이 가는데, 실제로는 지도를 전혀 안 읽는데, 이것을 비주얼하게 보는 것을 좋아하고, 벤야민이 말하는 컨스털레이션 Constellation, 배열. 우주의 별자리 같은것. 그것이 중요한 생각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거의 패티시즘 처럼 보여지는 것 같다.

허 :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떠나고 싶은데 합천 주위만 뱅뱅 돌고, 그런 궤적들이 결과적으로 지도를 그려내는 것 같다.


관객 1 : 영화의 시작점이 있을 텐데, 시작점을 못 찾았는데, 시작은 어디서. 주인공의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으로 신일선씨 사진은 (<청춘의 십자로>) 왜 사용했는가?


김 : 시작점은 대부분이 여러개로 시작을 하고 주로 하는 일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쓰는 일이라. 비교적 질서 정연한 일이지만, 영화 찍을 때는 풀어 두고 하려고 했는데 혼돈 상태에서 하는 것 같다. 여러개의 윈도우를 늘어놓는 식으로. 그래서 아마 시작점이 분명치는 않은데, 장편 극영화를 다른 것을 준비도 하고, 허문영 선생의 도움으로 이나영을 캐스팅 하려다 실패도 했다. 아마도 흥행을 담보할 수 없는 인간일 것이라고 해서 투자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못 찍고 있다가 CinDi 영화제에서 장률 감독님의 중경을 봤는데, 정말 가혹한 이야기를 절제있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가 바로 이 영화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신일선 선생님에 대해선 워낙에 영화 <청춘의 십자로>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이 때 신일선 선생이 등장할 때의 스틸이 우리나라 여배우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신일선 씨의 일생은 영화의 어머니로 설정된 캐릭터와 유사한 삶을 살아서. 국민 배우에서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정도까지 영락한 삶을 살아갔다. 이 배우를 통해 한국 영화 역사의 지점을 불러오고 싶었지만, 재능있고 잘난 딸들이 영락한 엄마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저 역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나이들어가는 그 이전의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도 했었고, 궁극 적으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었다.

관객 2 : 남강 휴게소는 알고 있는 곳이었지만, 휴게소 뒷 문의 모습을 몰랐다. 항상 호두과자만 사먹고 나와서 몰랐는데, 그 뒷면을 보여준것은 의도 된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아서 사용한 것인가?

김 : 오랫동안 운전을 해야 하는 생활을 했다. 하루에 10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했는데. 경남에 자주 갔었다. 진주의 남강휴게소는 경로에 있는 휴게소는 아닌데, 어느날 우연히 뒤로 가니까 남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부터 고속도록 휴게소를 다루고 싶었다. 휴게소는 동시대의 외로움이나 그런걸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고속도로를 야간에 달리면 절대적인 외로움을 느끼는데, 도시에 있는 24시간 편의점도 새벽에 들르게 되면 뭔가라도 억지로 산다. 그런식으로 고속도로 휴게소가 그렇고, 남강 휴게소는 요즘으로 치면 좀 오래된 휴게소다. 이런 약간 개발이 되지 않은 휴게소인데, 그래서 여러개의 시간의 층이 있다. 그래서 선택했다.

허 : ('창')을 연기한 배우에게) 창 이라는 인물이 사진을 찍어도 나오지 않고 그러는데 어떤 인물이라고 설명듣고 어떤 인물로 연기했는가?

창 : 오히려 영화를 보며 궁금해 졌다. 선생께서 창은 바라보는 입장이다. 항상 하신 말씀은 정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창의 마음을 지켜라. 나는 본래 활발한 성격이고 많이 시끄러운 편인데, 촬영 내내 창이라는 인물은 밖에서 안을, 혹은 안에서 밖을. 그러니까 항상 관찰을 해야 했다.

허 : 감독님께서 보충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 창이라는 인물은 인물이기도 하고 비존재이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의 조력자, 요정이기도 합니다. 크레딧에도 있는 얼 잭슨 교수가 창이라는 인물의 원안을 제공했다. 창이라는 인물은 정말로 컴퓨터 애니메이터로서 상상력을 (무한하게) 발휘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남성에게 가해지는 업악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의 조력자같은 부분이 있다. 배우가 어려운 역할인데 잘 해 주었다.

허 : 양은용씨에게, 사실은 경이라는 인물이 동생의 설명과는 서로 다르게 나온다. 이중적인 요소가 나오는데, 본인의 입장에서 전경은 어떤 쪽 인물인가. 분열적인 편인가, 아니면 자비와 자상하고 연민이 많은 편으로 생각하면서. 어느 쪽으로 촛점을 맞춰서 연기했는가?

양 : 전경이 느끼는 그대로를 진실로 믿고, 후경이 하는 말을 따로 생각했다. 사실 촬영 당시 어떤 말씀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카페에서 찍었을 때 기억을 이야기 하자면, 감독님 께서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설명이나 디렉션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열어주는데, 오히려 굳이 꼬집어서 이건 어떤 것이냐 묻는 것이 우매한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파고들지는 않았다.

관객 3 : 어머님의 죽음 101째 날부터 시작해서 110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죽음이 있다. 왜 죽자마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왜 100일 부터 시작외덨는가? 그리고 음악이 전부 여성 뮤지션의 음악이다. 감독님께서 이렇게 선택하신 이유는?

김 : 돌아가시고 100일 째 탈상을 하고 영화의 시간은 전경이 후경을 찾는 순서로 되있는 것 같은데, 동생인 후경은 어머니의 49재를 마치고, 언니는 100일을 마치고 동생을 찾아나선 것이다. 혹은 어머니와 공식적으로 100일의 애도의 시간을 마치고 어머니와 화해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양가적인 시간처럼 느끼게 했다. 실종된 사람을 찾는 것 같지만, 시간을 되짚어서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음악은 정해 두고 시나리오나 캐릭터를 만든다. 예전 다큐를 할때도 니나 시몬의 노래를 결정해서 작업을 했었고. 이번에는 <경>의 주제곡은 장재호 선생이 작곡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음악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저작권에 대한 걱정 많았지만, 다들 음악을 흔쾌히 내 주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 자체가 영화의 대사고 가사고 정조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했다. 음악을 사용을 허락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관객 4 : 놀랍게 봤던 부분은 과거 이야기를 하면 최신 이야기를 엮거나 최신 미디어아트를 같이 엮지 않는데. 이 영화는 두 가지가 다 보여진다. 그리고 꿈 이야기들, 이빨빠진 것. 융 적인 모티브, 과거에 대한 이야기 같은 굉장히 전통적이고 원형적인 것들이 나오는 반면 구글 맵이나 최신의 모든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런 부분이 놀랍게 보이는데, 보통 이렇게 복합적으로 최신의 어떤 것에 과거의 것을 엮어 낼때, 대부분 과거의 임팩트가 줄어드는데, 두 가지를 어떻게 최신의 것들을 통해 잘 끌어들였는가? 앞으로는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싶은가?

김 : 정신분석학을 하시는 분이라 이해가 남다른것 같다. 이해받아서 기분이 좋고, 앞으로는 조금 더 동시대적이되 약간 더 밑으로 파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치 고분을 파듯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조금전 질문하신 선생님과는 안면이 있다. 예전에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 매듭을 끊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관객 5 : 캐릭터 질문 셋 모두 같은 인물 처럼 느껴졌다. 의도가 있었는지?

김 :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 해주시겠어요 ?

관객 5 : 후경과 경이 같은 대사를 한다던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한 인물인데 여러가지의 마음의 상태를 반영 한 것인지? 의도? 혹은 인물들 간의 비슷한 정신적 성향을 고려했는가?

김 : 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경을 중심으로 거울의 앞 뒷면으로 생각을 하고, 자매간의 관계를, 영화를 유토피아 적인 관계로 다루거나 또는 서로 악날하게 다투는 식의 기존의 전형을 피해나가고 싶었다.

관객 6 : 김 정 감독님의 팬입니다. 온아라는 여자에 대한 질문인데요, 이 인물이 영화 속에서 제일 신비로웠는데, 마지막에 사라지고, 그 여자아이가 그려지는 방식이 굉장히 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온아라는 인물은 가장 영화속에서 단단해 보이는 인상을 받았는데, 온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후경이 카메라를 보는 것 처럼 독백하는 합천 세트 장에서의 장면인데요, 알고 보면 옆에 한 명이 더 있는 것인데, 그 장면은 어떻게 왜 찍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김 : 사실 다른 시나리오에서 온아와 세아가 주인공 (디지털 캐릭터) 인데, 제가 생각하는 온아는 우리나라 서비스직 여성들이 굉장히 많고 중노동을 감수하는데도, 웃음이나 그런 모든 것을 패키지로 노동에 넣어야 하는데, 온아라는 캐릭터는 고속도로 오랫 동안 운전해서 이동해야 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때 고속도로에서 짜장면을 시켜먹은 적이 있다. 그 때 매점 여자분에게 우동국물도 좀 달라고 했는데 거기 여직원이 국물 뿐만 아니라 고명까지 정성껏 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스산한 일상에서 뜻밖의 친절을 만나는데, 모두 힘들고 고된데, 그런 캐릭터에 대해 관심과 호감이 기본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 같다. 온아는 서비스 직을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후경이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조감독의 (배지영) 아이디어다. 아예 세트에서 찍는다. 후경이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찾아가지만, 그곳은 어머니가 즐겨보는 TV드라마 속의 세트장이다. 그런 부분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관객 7 : 개인적으로 남강 휴게소를 알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나와서 참 반가웠다. 영화 속에서 창이 휴게소 뒤 쪽에 앉아 있는데 사진 기자가 창을 찍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창은 눈에는 보이지만 카메라에는 찍히지 않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창은 일종의 시간의 흔적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는 눈앞의 현재를 찍는 것이지 과거를 찍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은 카메라에 잡히질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는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영화 속에서의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

김 : 시간에 대한 개념이나 느낌은 질문한 분과 비슷하다. 남강 휴계소를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반갑다.

관객 8 : 동생 생각하면서 잘 보았고, 창이 쉽게 어른이 된 남자와 경쟁이 될까라고 독백하는 장면이 있다. 어른이 된 남자에게 '쉽게'라는 의미를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 그와 반대로 억압된 남자와 경쟁했을 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 :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그 중에 에니메이터들이 있었다. 여러 팀에서 부탁을 해서 조금씩 받아 작업 했는데 애니메이터 이장익 감독이 창의 그러한 부분을 이야기 해 주었다. 한국에서 자란 에니메이터로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상상력이 제한 받지 않는 일본의 애니메이터와, 한국사회에서는 상상력의 억압이 리얼하게 다가오는 부분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남성의 시점에서 쓴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군대 가산점 문제, 이런 부분이 내제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 남자들이 억울해 하는 부분. 사회적인 억압을 받게 되는 부분. 한국에서 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양성평등의 문제는 해소가 어렵겠다 생각한다. 근데 그냥 쉽게라는 것이 아니고.

 

 

영화 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Tracy Chpman - Telling Stories

 

 

Telling Stories

- Tracy Chapman

There is fiction in the space between
The lines on your page of memories
Write it down but it doesn't mean
You're not just telling stories

 

There is fiction in the space between
You and reality
You will do and say anything
To make your everyday life
Seem less mundane
There is fiction in the space between
You and me

 

There's a science fiction in the space between
You and me
A fabrication of a grand scheme
Where I am the scary monster
I eat the city and as I leave the scene
In my spaceship I am laughing
In your remembrance of your bad dream

 

There's no one but you standing

Leave the pity and the blame
For the ones who do not speak
You write the words to get respect and compassion
And for posterity
You write the words and make believe
There is truth in the space between

 

There is fiction in the space between
You and everybody
Give us all what we need
Give us one more sad sordid story
But in the fiction of the space between
Sometimes a lie is the best thing
Sometimes a lie is the best thing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청와대 고위 핵심 관계자는 나밖에 없다능.




이동관 수석의 '커밍아웃'?…靑 '핵심 관계자' 사라질까


이동관, 혹은 땅동관, 혹은 이핵심, 이핵관씨께서 한 마디 하셨다. 앞으로는 실명 브리핑을 하겠다는것이다. 청와대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는 '관례적으로' 핵심관계자니, 한술 더떠 청와대 - 고위 - 핵심 관계자 운운하는 요상한 (비)인칭 대명사가 따라 붙었다. 기껏해야 대변인 주제에 뭔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익명이 너무 많아지니 실명 브리핑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동관은 '이건 비밀인데, 나만 알고 있는거고, 당신들에게 만 알려주는거야' 뭐 이런식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티끌만한 권력을 행사하는 쾌감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걸 남들이 뺏어갔으니 잔뜩 토라진 것이다.

결론은 '청와대 - 고위 - 핵심 - 관계자'는 나밖에 없다능. 하고 말하고픈 이동관씨의 소박한 소망이랄까. 풋.



천하무적




머리 나쁘고 무대뽀인 인간에겐 약이 없다. 게다가 병치레도 없다. 요즘 신종플루가 창궐중인데 이 인간은 끄덕도 없다. 당췌 어떤것도 통하질 않는다. 거기에 더해 완벽한 기복 신앙으로 '타락 해버린' 개신교를 믿는다는 인간은 말 그대로 '무적'이다. 총도 칼도 통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신거고, 잘 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거는 아니고 지 질나서 그리 된거고). 재보선에서 완패를 해도 그건 그거고 온리 마이웨이다. 근거가 있냐고? 아래 기사의 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차피 이명박은 사태에 대한 분석력이나 해석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냥 자기 시각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기 맘대로 결정해 버린다. 답이 없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여당의 완패로 귀결된 10.28 재보선 결과와 관련해 29일 "우리 정부가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일자리 창출과 서민경제 살리기를 위해 더 분발하고 매진하라는 채찍과 격려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근데 이 기사를 읽고 드는 생각은, '우리 정부가 성과에 안주..' 운운 했다는데, 도대체 이명박 정부가 이뤄낸 성과가 뭐가 있는가? 기껏 남들이 하다가 넘겨준것 줏어먹은 것 빼고는 전무하지 않은가. 확실히 뻔뻔함은 정치인과 개신교인의 기본 덕목이자 생존 스킬이다.



<파주>, 첫 인상








박찬옥 감독의 신작 <파주>를 보았다. 7 년이라는 긴 공백 탓인지. 이 영화가 감독의 데뷔작 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이건 그저 수사가 아니라 <질투는 나의힘>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찍혀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첫 인상은 그 지독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미학적으로 미장센이 좋다거나, 배우들이 아름답게 묘사되었거나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완성품으로서의 꿋꿋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처제와 형부의 사랑, 혹은 불륜으로 포장했던 홍보팀의 난감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 없음을 힐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룻밤 지나고 나니 오히려 홍보팀은 정직한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맞다. 보이지 않는, 만져질 수 없는, 내 안에 가둘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안 팍으로 거의 완벽하게 조응하고 있었다. 이 영화를 '~에 중요한 한국영화중 하나' 이런식의 수사를 붙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것은 호사가들의 몫이다. 자신의 이름을 영화에 걸어 어떻게든 무임승차 하려는 욕망이 강한 자들에게 양보하겠다.

아주 오랫만에 나의 온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조응하는 영화를 만났다.

p.s 사진은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무도 없는 극장을 빠져나와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을지로 쪽으로 걸어가다가 찍었다. 마음에도 눈에도 영화가 선연하게 맺혀버린 것 같다.

최은모(서우)의 언니 최은수 역으로 나오는 심이영이라는 배우가 눈에 쏙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 필모를 검색해 보니 <열혈남아>에도 나왔었고 여기저기 단역 경력이 있다. 그 중 몇 편은 보았는데도 이사람의 얼굴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배우가 자신을 알아보는 감독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감독에게도 그러 할 것이다. 심이영은 이 영화에서 만개한 꽃 처럼,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결론은, 심이영이라는 배우, 몹시도 좋아졌다는 것. 배우 김호정 이후로 두 번째다.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잘려진 세계, 그 바깥으로 부터의 시선


Edward Hopper의 그림에 관한 짧은 노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Night Hawks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선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의 빛의 제국 I(1954) 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빛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매혹적이다. 특히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공간들은 거의 마법의 순간같다. 해가 지고,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밤과 낮이 자리를 바꾼다. 서서히,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직 아워'라고도 한다. 또는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숨을 죽인채 영원같은 시간동안 그 앞에서 나는, 멈춰 버린다. 몸의 모든 고동과 호흡이 느려진다. 머리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길거리 공중전화의 샛노란 전구 빛 속의 공간이 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이 곳에서 내 사랑을 기다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핸드폰도 없었던 그 시절, 공중전화 박스에서 동전을 넣고, 행여나 번호가 틀리지 않기를 조심하면서 꾹꾹 번호판을 눌렀다. 충분한 참을성을 가지고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려 내가 여기 있음을.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말했다. 생각 난 것처럼 눈이 내렸다. 입김이 공기중에서 송글 맺히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빛 속은 따뜻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천천히 뛰고 있었다.

마그리뜨나 호퍼가 묘사하는 빛의 공간은 서정적이거나 감성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마그리뜨의 공간이 모든 언어적 사유를 무력화 시키는 매혹의 공간이라면, 호퍼는 빛이 만들어내는 면을 통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축 한다.

호퍼 작품의 첫인상은 건조함과 낯설음이다. 호퍼는 광원을 복합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부분 한 방향에서 들어온 광원을 스트레이트하게 잡아낸다. 호퍼의 그림은 마치 빛으로 날카롭게 잘려진 세계의 건조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너무 빠르게 잘려서 피가 흐르지 않는 상채기. 호퍼의 그림이 정서적으로 외로움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는 잘려진채로 눈앞에 던져진다. 대상이, 세계가 '저 곳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그림을 그린이는 세계 바깥의 구경꾼으로서, 국외자로서 남겨진다.

- 빔 벤더스Wim Wenders의 <돈 컴 노킹, Don't Come Knocking, 2005>가 호퍼의 회화를 영화적으로 재구성 해 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비록 흑백 영화이지만 호퍼의 회화는 피터 보그나도비치의 1971 년작 <마지막 영화관, The Last Picture Show>의 정서와 더 가깝게 닿아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써 봐야겠다.



유죄



<1보>법원 "용산참사 농성자, 유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한양석)는 28일 용산참사와 관련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혐의로 기소된 이충연 용산철거대책위원장(35) 등 철거민 농성자 9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현주건조물 침입, 업무방해 등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비겁하게 쓰지 말자.




'듀나'라는 사람의 영화 글을 읽고나면 항상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밥벌이로 글을 올리는 곳의 특성상 지면 제한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다 보니 그럴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글은 그냥 겉만 핥다가 끝난다. 마치, 어차피 지면은 제한 되어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하는 것 같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비단 이 사람의 신상이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 뿐만 아니라, 아예 쟁점이 되는 부분은 피하고 넘어가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보여준다. 뭔가 중얼 대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핵심은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하이텔 시절부터 지금까지 듀나가 '생존' 해온 저력인지도 모르겠다.

듀나의 글은 아주 작은 문제라도 꼼꼼히 피해가는 비겁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근데 재미있는건 이사람, 팬이 꽤 된다는거다. '듀나님이 쓰신 내용에 공감해요' 하는 말도 종종 올라온다.

물론 영화를 항상 언제나 진중하게 보면서 의미를 파헤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 듀나의 글은 '인상비평'의 범주에 넣기도 참 애매하다. 어떠한 '인상'도 밝혀내기를 (글쓴이가) 거부한다. 듀나가 쓰는 글은 '그런데 내 생각까지 당신은 알것 없고'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하튼 결론은, 이런 글은 쓰지 말자는 것.



Orson Wells 에 관한 두 개의 노트 - 숙명론적 미궁




Orson Wells 에 관한 두 개의 노트

숙명론적 미궁- 개인과 세계, 그 내밀한 충돌

세계 영화사 혹은 영화 관련 서적들의 상석에 자리잡은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케인, Citizen Kane>(1941)은 기묘한 예지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마치, 웰즈의 또 다른 작품 <맥베스, Macbeth>(1984)가 이미 미래를 알아버린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시민 케인>은 웰즈의 그 이후의 삶을 거의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후적 해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김에 좀 더 멀리 나가보자면, 웰즈의 지나친 명석함은 자신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웰즈와 스튜디오의 불화, 그럼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했던 그의 프로젝트들. RKO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계의 신동이라 불렸던 젊은 감독의 데뷔작 <시민 케인>. 그리고 그 이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완만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하락의 여정들.

거칠게 이야기해서, 웰즈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과 세계의 접경지역, 그 지점들에서 벌어지는 격렬하며 내밀한 마찰과 충돌의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스튜디오의 의도에 맞추어서 만들어 졌다는 <이방인, The Stranger>(194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웰즈는 비범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여준다. 나치 전범인 찰스 랜킨 Dr. Charles Rankin / Franz Kindler은 종전 후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중의 자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드러나 있고, 또 하나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전쟁 중의 동료가 찾아온다.

자신이 묻어버린 과거 속의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혹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이러한 주제와 이야기 구조는 <아카딘 씨, Mr. Arkadin>(1955)에서 더욱 강화되고 반복된다. 숨기와 찾기라는 추적의 형식은 웰즈의 거의 모든 영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스크린 속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위에서 벌어진다. 영화사적 맥락에서 웰즈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필름 느와르의 세계를 창시했다. 웰즈의 <악의 손길, Touch of Evil>(1958)은 필름누아르 장르의 완성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세상이 알고 있는 나 자신 사이의 틈새. 그 사이에 웰즈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의 영화는 나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세계의 광장 한 가운데 인가? 아니면 가장 깊은 자신의 내부인가?

<시민 케인>은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대의 언론 재벌이자 뉴스의 중심이었던 케인의 사망은 기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케인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생전에 케인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케인에 관해 증언하지만, 증언자들의 기억은 케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로즈버드 라는 이름의 어릴 적 케인이 타고 놀던 눈썰매를 보여주는 것을 끝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드러냄으로 인해 진실에 대한 혼란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톰슨의 말: ‘그건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야.’

종종 웰즈의 인물들은 숙명론에 심취한 고집쟁이처럼 보인다. 웰즈 자신이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한 <심판, The Trial>(1962)의 주인공 K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K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과의 불화는 이미 준비 되어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돈키호테인가? 아니면 현명하지만 비극적인 자살자인가? 기관원들이 흘려버리듯 도망치며 던져 넣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음을 맞이하는 K의 모습은 마치 폭사하는 시지푸스 같다.

그러나 웰즈는 인물들을 단순히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이거나 입체적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충복인 번스타인은 전형적인 대중영화 화법의 조연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인 재단을 운영하는 그의 늙은 모습을 보며 그가 혹시 현명한 광대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웰즈의 진정한 깊은 심도 deep focus는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은 종종 인물들의 내면이 거꾸로 뒤집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웰즈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이의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손길>에서 웰즈 자신이 연기한 퀸랜 Hank Quinlan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손에 묻은 피를 씻으려고 강물에 손을 담근다. 그런데 강물에는 오물이 가득하다.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정말로 그 손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비대한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절룩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압도적으로 위압적이지만, 마치 덩치만 커다란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타냐 (무성 영화 시절의 스타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연기했다.)는 그를 보고 '사탕과 초컬릿을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찐 것 아니냐'고 말한다. 퀸랜이 동료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마치 심통이 잔뜩 난 젖먹이 아이 같다.

웰즈는 인터뷰를 통해 찰스 포스터 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마 그는 이들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케인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며, 매우 위대한 인물인가 하면 별볼일 없는 하찮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이렇게 다르다. 그는 한 작가의 객관성에 이해 판단되지 않는다."   - 앙드레 바쟁, 『오손 웰즈의 영화미학』 (p.88 현대미학사 1996)

웰즈에게 인간이란 고정된 개념과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일하고 항상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평생에 걸친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해석 될 수 있었던 생명력은 바로 끊임없는 갈등과 번민의 상황 속에 내 던져지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변절자, 제왕, 음모자, 가련한 희생자, 폭군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 나름의 자리에서 아주 격렬한 갈등과 번민을 겪는다. 이들은 마치 아주 짧은 구간을 눈이 볼 수 없는 속도로 왕복 운동을 일으키는 진자처럼 보인다.

웰즈는 인물들을 숙명론적인 미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 안에서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인물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껏 드러나지 않고 있던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 웰즈에게 비극의 탄생은 곧 인간 존재의 새로운 탄생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웰즈라면 둘 모두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의미가 확실하고 고정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종종 멈춘다. 너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바라보거나 혹은 방관해도 될 것처럼 생각한다. 웰즈는 바로 이 순간, 진짜와 가짜, 믿음과 의심, 슬픔과 기쁨, 용감함과 무모함, 비천함과 고귀함을 한 자리에 슬쩍 놓아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명확하다고 생각될 때 관객은 그저 스크린 밖에 방관자로서 게으르게 남겨진다. 웰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따분해서 견디지 못한다는 투로 모든 익숙한 것들을 슬쩍, 장난꾸러기처럼 흔들어 놓는다. 웰즈의 영화는 대단히 전형적인 인물 구도와 이야기 구조를 가졌음에도 흔한 전형성의 인력권을 너무도 가볍게 훌쩍 벗어나 버린다.

웰즈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숙명론적 미궁 저 건너편에서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왕과 협잡꾼, 비천한 거렁뱅이와 위대한 도망자들의 세계 그 안쪽으로 넘어오라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라며 당신에게 낮고 설득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웰즈의 영화는 언제나 새롭게, 다시금 시작된다.


영화 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 동시 게재

related link : Orson Wells에 관한 두 개의 노트 - <F For Fake>




신호등

 

 

신호등

 

 

 

해가 뜰때까지 나는

그 밑에서

횡단보도 신호등의

두 눈꺼풀이

껌벅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계가 열리고

세계가 닫힌다

세계가 움직이고

세계가 멈춘다.

 

어디선가 길게

새어나오는 누군가의

한숨소리

 

고개를 돌린다.

 

 

 

2006. 2. 19

 

 

흉터




그녀는 다시 차를 따랐다.

총 때문에 손가락을 잃었지. 비둘기를 쏘는 총이 폭발해 버렸어.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으니 지금 알레한드라만 했지. 사람들이 내 손을 보고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자네 뺨에 난 상처는 말을 타다 생긴것 같군.


네, 제 탓이었어요.

그녀는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지만, 그 눈길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거든. 흉터를 얻게 된 사연은 결코 잊을 수 없지. 안 그런가?

-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p189, 민음사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아사노 타다노부 특별전


아사노 타다노부 특별전 

 

장소 : 영상자료원 KOFA (상암동)

기간 : 2009 년 11 월 12 일 (목) 부터 11 월 29 일까지.

상영작 :

 

물장구치는 금붕어 1990년 | 35mm | 95분 마츠오카 오지

청춘 딩가딩가 딩딩딩 1992년 | 35mm  오바야시 노부히코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 1993년 | DVD  이와이 슌지

환상의 빛 1995년 | 35mm | 110분  고레에다 히로카즈

피크닉 1996년 | DVD | 72분  이와이 슌지

핼프리스 1996년 | 35mm  아오아먀 신지

포커스 1996년 | 35mm | 73분  이사카 사토시

꿈의 미로 1997년 | 16mm  이시이 소고

러브 앤 팝 1998년 | 35mm  안노 히데아키

바람꽃 1999년 | 35mm | 116분  소마이 신지

지뢰를 밟으면 안녕 1999년 | 35mm | 111분  이가라시 쇼

파티 7 2000년 | 35mm | 104분  이시이 가츠히토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 2000년 | 35mm | 55분  이시이 소고

밝은 미래 2003년 | 35mm | 92분  구로사와 기요시

카페 뤼미에르 2003년 | 35mm | 103분  허우 샤오시엔

녹차의 맛 2004년 | 35mm | 143분  이시이 가츠히토

도쿄 좀비 2005년 | 디지베타  사토 사키치

하나 2006년 | 35mm | 127분  고레에다 히로카즈

새드 배케이션 2008년 | 35mm | 136분

엄마 2008년 | 35mm  야마다 요지

길 위의 여행: R246 스토리 2008년 | 디지베타  아사노 다다노부 외

 

일본 문화원이 지원하는 특별전이라, 펜엑 라타누앙의 <Last life in the Universe>가 없는 것이 아숩.

 

 

 

LG 뉴 초콜렛 폰




메가박스 유럽영화제에 영화를 보러갔다. 마침 상영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근처에 있던 LG 뉴 초콜렛 폰의 홍보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 입체 화장이 너무 심한 도우미 분들 보고 깜짝 한 번 놀라주시고, 들어갈까 말까를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용기내서 입장. 진열되어 있던 뉴 초컬릿폰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조작 해 보았다.

꼼꼼히 들여다 본것은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그런 부분도 있지만, 디자인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밑 부분의 빨간색이 구리다. 그냥 장난감 같다. 일단 왜 휴대용 전화기를 이렇게까지 긴 형태로 디자인 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터치감은 삼성 햅틱보다 느낌은 괜찮았지만, 문제는 조작에 딜레이가 있다는 것. 각 어플이 구동되는 시간이 좀 걸린다. 마치 김치-치즈 하고 하나 둘 셋 하고 셔터를 누르지만 실제로는 하나 - 둘 - 셋 - 넷!에 셔터가 찰칵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아마도 터치감을 더 살리려는 방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터치로 조작할 때마다 윙~ 윙~하고 진동이 전해진다. 그나마도 딜레이가 있다. 이것 때문에 더 느리고, 마치 핸드폰이 끙끙거리면서 덜컥 거리는 것 처럼 느껴진다.

만져본 첫 인상은 겨우 이정도로 아이팟의 아성에 도전하는건가 싶었다. 게다가 가격도 비싸다. 어쨌든 풀 터치폰의 생명은 터치감이다. 한 번이라도 아이팟/아이폰의 터치감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비교를 할 수 밖에 없다. 편향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국내 핸드폰 제조사들은 그저 애플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고서는 생색내는 꼴이다. 한마디로 무임승차라는 것이다. 그냥 웃긴다. 풋.




2009년 10월 24일 토요일

모두 다 예쁜 말들



바케로들이 잠든 후에도 두 사람은 피곤에 지친 채 기나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깨어 있었다. 말고 가죽과 남자 냄새가 밴 방에서 바케로들이 깊이 잠든 채 쉬이쉬이 숨을 쉬고, 저 멀리 우리에서는 새로 온 소들이 잠들지 못하고 음매음매거렸다.

저 아저씨들 괜찮아 보이지? 롤린스가 속삭였다.
그래, 좋은 사람들 같아.
그 낡은 안장들 봤니?
응.
우리가 도망자라고 생각할까?
그럼 도망자지, 아니냐?
롤린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소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 좋다.
정말 그래.
로차 씨에 대해서는 뭐라 하던?
별 말 안 하던걸.
아까 그 애는 로차 씨의 딸일까?
그런 것 같아.
여긴 정말 시골 같지?
그래. 그만 자자.
있잖아?
응.
옛날 카우보이는 이렇게 지냈겠지?
그랬겠지.
여기에 얼마나 머물고 싶어?
한 100년. 그만 자자.


-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p134-135, 민음사

코맥 매카시의 문체는 건조하고 풍부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살을 꼼꼼하게 발라낸 생선뼈를 보는 것 같다. '건조하지만'이 아니라, 건조하면서 동시에 풍부하다. 그의 글은 행간에 꽉 들어찬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의미를 잔뜩 집어넣으려는 자의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굉장히 무심한 것 같은데 정서적으로 풍부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읽는 재미가 각별한 책을 만났다.



서소문 - 충정로








펼쳐두기..



















2009년 10월 20일 화요일

낙원동



낙원동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국수 국물을 들이키던

중절모의 남자
 
삶은 견디는 것이다

생은 견뎌서
여하간 살아남는 것이다
 
채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국수 가락들이

바닥에 떨어져

'살았다' 낮은 탄성을 지르며

굼틀거린다
 
낯선 누군가의 발에

곧 밟혀서

불어터진 생을 마감할 지라도

삶은 견디는 것이다
생은 견뎌서
여하간 살아남는 것이다.


2007. 3. 22




낙원동













2007. 6. 4.





2009년 10월 17일 토요일

2009 부산 국제 영화제
























밥벌이를 뒤로 하고 떠났던 짧은 탈주의 기억


2009 년 부산 국제 영화제 PIFF 참관기


금요일, 하루 업무를 마치고 KTX를 타고 부랴부랴 부산엘 내려갔다. 부산에 내려서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부산역에는 기념 삼아 사진 촬영을 하는, 아마도 부산 국제 영화제를 보기 위해 내려온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이동했다. 서울의 지하철 보다 조금 폭이 좁은 편이라 자리에 앉으면 건너편의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해운대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딱 한 작품 때문이었다. 바로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프레스 카드로 아침 일찍 티켓을 구해야하는데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온라인으론 예매가 끝난 상황이고, 현장에도 얼마나 티켓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영화는 못 보아도 <카페 느와르> 만큼은 꼭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내려왔지만, 볼 수 있을지 어떨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결론 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어코’ <카페 느와르>를 볼 수 있었다.

이번 부산에서 본 영화는 순서대로, <경>, <낙원은 서쪽이다>, <카페 느와르>, <익사일> 이다. 뭐랄까 굉장히 불균질한 컬렉션인 것 같다. 사실 영화제를 여기저기 쫒아다니면서 영화를 챙겨 보는 성격은 아니다. 지금 꼭 보지 못하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것에 억눌린 기분 그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성격 탓인 것 같다. 그저 게으른 것일지도 모르고.

김 정 감독의 <경 Viewfinder>은 영화평론가인 김소영 교수의 장편 데뷔작이다. 집을 나간 (혹은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난) 동생을 찾아 나서는 여자의 이야기를 축으로, 낡은 휴게소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보게되는 상징 같은 것들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난 채로 제시가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언니의 이름은 전경이고, 동생의 이름은 후경이다. 휴게소에서 전전하는 남자의 이름은 창(window)이다. 남자는 자신을 디지털 퇴마사, 또는 디지털 탐정으로 소개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인터넷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모든 영화는 탐정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장르로서의 탐정이 아닌 행동과 결과로서의 탐정영화 말이다. 거의 모든 영화의 내러티브는 상실로 시작되고 그 상실을 수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그 수복의 결과를 제시한다. <경> 역시 동생을 찾아 길을 떠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사실 이러한 탐색의 과정은 이 영화의 맥거핀에 가깝다. <경>이 보여주려는 것은 언니가 기어코 동생을 찾아 내고 서로의 관계를 수복했다. 는 결론이 아니다. <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시간의 퇴적층 같은 것들이다. <경>에서 ‘중첩’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이 모든 것들이 남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휴게소를 동심원처럼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진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낙원은 서쪽이다>는 로드무비 형식의 블랙 코미디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소재들을 다루어 왔던 노장 감독의 신작 치고는 어쩌면 말랑말랑한 영화일 수 있겠지만, 국내에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름을 알려준 <Z>의 기묘한 유머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낯선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치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영어는 못하고, 불어를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주인공은 대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걸지만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유머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 영화에서 남들에게 통용되는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적당한 옷을 입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영화의 처음에 밀입국자들은 신분증을 모두 찢어서 바다에 버린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누드 비치로 떠밀려 살아난 엘리야스는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자신을 위장한다. 리조트 직원의 옷을 갈아입고 직원 행세를 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여자가 사다준 옷을 입고 리조트의 손님행세를 한다. 목적지인 파리까지 가능동안 엘리야스가 갈아 입는 옷은 일종의 여권 Passport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옷은 그저 몸 위에 걸쳐질 뿐이다. 옷은 사람의 본질을 바꾸어주지는 못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선 엘리야스에게 마술은 이루어졌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카페 느와르>는 개인적으로 작은, 그러나 충만한 위로 같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쓰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짧게 언급할 것이지만, 고다르의 <국외자들>의 카페 댄스 장면을 차용한 것이 분명한 정유미의 춤 장면 하나 때문이라도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의 쾌감이 마치 혈관에 천천히 차오르는 것 같은 정유미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다렸던 시간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두기봉 감독의 <익사일>은 국내 개봉했을 때 너무 작은 상영관에서 거의 끝물에 봐서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다. 이번 PIFF에서는 CGV 스타리움 관에서 상영하다고 해서 보았는데, 결과적으론 그다지 만족 스럽지 못했다. 화면 크기만 키우고 정작 영사기의 세팅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화면 밝기가 고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얼룩 같은 느낌이 묘하게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닮은 이 영화의 분위기에 약간의 플러스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만 놓고 보자면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다시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시! 였다.

두기봉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총을 마치 칼처럼 사용한다. 오우삼이 춤을 추듯 총격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퀄리브리엄>의 건카타 처럼 요란한 액션은 아니다. 인물들은 마치 총알을 ‘찔러넣듯’ 발사하는데,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액션은 특히 <익사일>처럼 어두운 공간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누가 누구를 겨냥하고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마지막 호텔에서의 총격전에서 인물들은 거대한 하나의 절멸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대사로 미루어 보건데, 홍콩 반환 이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익사일>은 그저 철지난 소재를 끌어들인 회고조의 영화라기 보다는, 이미 홍콩 반환 이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어디선가 잠자고 있다가 발견 된 것같은 느낌을 준다. 그만큼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생하게 말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번 PIFF에 참석 했던 이유는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 단 한 작품 때문이었다. 분명히 상영시간과 대중적인 부분 때문에 개봉은 불확실한 부분이고, 그렇다고 해서 영화제나 특별전 형식으로는 언제 볼 수 있을지 어려운 상황이었고, 물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볼 수 있었겠지만, 정말 따끈따끈한 그 대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영화를 봤다. 뭐 이런식의 등수놀이는 거의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질 않았다.

2001 년인가 2002 년인가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사무라이 픽션>이 PIFF에서 공개 되었을 때, 그것도 출장 길에 시간이 남아 본 것 빼고는 이번이 정식으로 참가한 것은 처음이다. 그저 시간이 맞아 <사무라이 픽션>을 보고선 턱이빠져 달아날 정도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PIFF에는 막상 내려가 정말 ‘별처럼 많은’ 영화목록들을 보니 그 예전에 교보문고를 처음 찾았던 중학생 꼬마의 설레임이 다시 살아났다. 밥벌이의 압박만 아니라면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영화제를 즐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시간 속에서의 작은 탈주라고 한다면, 영화제는 그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탈주행위다. 그러고보니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탈주’라는 주제로 엮어 볼 수 있을 법한 영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러한 공간과 시간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 동시 게재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A History of Violence



A History of Violence

스필버그의 <뮌헨, Munich>(2005)이 개봉했을 때 영화를 함께 본 친구와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는 만찬(supper)를 위해 고통(suffer)을 감내하는 이야기 같아.' 흥미롭게도, 두 단어의 발음은 거의 유사하다.

<뮌헨>에서 식탁은 자주 등장하는, 어쩌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에브너는 자신의 동료들과 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프랑스의 암거래상의 보스 '파파'는 에브너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파파'는 손수 요리를 준비하는 것을 즐기는 인자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브너와 파파는 소의 '내장'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다듬어야 냄새를 지울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은 아마도 '죽음의 냄새'일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모든 조리법의 관점은 어떻게 하면 죽음과 폭력의 - 소, 혹은 돼지, 혹은 또 다른 모든 것들에게 행하여진 - 흔적을 지울 수 있는가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브너는 임무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 때마다, 주방 가구가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모퉁이의 어느 상점 앞으로 버릇처럼 되돌아간다. 그는 쇼윈도 속의 주방을 보면서 '언제나 저런 주방을 갖고 싶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암살 임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임무수행을 거부하는 그를 찾아온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상사 에프라임에게 에브너는 식사를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에프라임은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거부한다. 혹은, 자신은 그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멈춰 선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의 마지막 장면은 식탁 앞에 앉는 돌아온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마치 스필버그가 <뮌헨>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끌고 와서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손에 피 묻힌 자와 빵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서 이 질문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혹은 '우리'에게서 (바깥의) '너'에게로, 그러니까 하나의 일정한 방향을 가정한 채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식탁 앞에 마주한 이라면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영화의 맨 처음에 놓여 져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혹은, 노래의 맨 마지막에 있는 도돌이표처럼, 이 마지막 장면은 제일 나중에 던져진 질문이지만, 그 질문을 통해 다시 그 앞의 장면들을 다시금 복기해 볼 수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금 되돌려지고, 새롭게 시작될 수 있는, 혹은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마도, 필연적으로 악몽 속으로의 회귀가 되겠지만.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091013

부산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가끔, 아침에 보았던 반짝 거리던 바닷가가 생각이난다. 몇 일 더 지내다 왔으면 했지만, 밥벌이를 빼 먹을 수는 없는 일이라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짧건 길건 여행은 일탈이다. 서울로 올라오니 한 뼘 정도 멀어졌던 현실 감각이 돌아온다. 손석희 교수와 김제동 씨가 퇴출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각각 진행 기간이 오래되었고, 출연료가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뻔뻔하고 저열한 인간들이다. 눈과 귀를 틀어막으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순한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횡수를 부려도 꼼작도 못하는 상황이라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바닷가는 좋았지만 해운대 부근은 온통 마천루 투성이였다. 우후죽순 고층 빌딩들이 공사중이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물은 짓기에 빠르고 견고할지는 몰라도, 세월의 무게와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줄 아는 현명함이 없다. 시효가 지난 '최신 건물'은 흉물스럽고 기괴하다. 그리고 낡은 건물은 반드시 재개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자본과 개발의 무한 반복이다. 이 와중에 그 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그저 뜨내기로 전락된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부산 국제 영화제, 몇 가지.





내려가있던 시간이 사실 긴 시간이 아닌데, 그전에 이렇게 저렇게 알던 사람들을 마주쳤고, 간단하지만 인사도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흔히 이런 자리에서 그러하듯, 어떤 영화를 보았느냐, 그거 어땠느냐. 이런 질문이 오갔다. 상대방의 대답으로 그 사람의 영화적 깊이를 가늠해 보는, 일종의 간보기랄까.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간단하게 '보았다'.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하는 편이다. 취향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데도, 그걸로 아래위를 정하고 맞네 틀리네를 말하는, 그런 이상한 경쟁심리는 사절이다.

모두 그런것은 아니지만, 종종 어떤 영화를 두고 의아할 정도로 과도한 상찬을 던지는 경우를본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올해 한국영화의 경향을... 올해 가장 중요한...'운운하면서 마치 엘도라도의 황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근데 그 마음 다 안다. 그렇게 남들은 모르는 진흙속의 진주 같은 영화를 오로지 자신만이 알아보았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심봤다'를 외치는 것이다. 왜 정작 만든이는 따로 있는데, 그걸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광을 파는것이 가능한것인지 모르겠다. 의외로, 사람의 생각은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도 마치 유일한 발견자인 것 처럼, 자신을 통해서만이 그 영화가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 처럼 말을 한다. 그걸 이해 못하는 사람은 그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되버리는 것이다. 굳이 겸손이라는 덕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것은 엄연한 주객전도 행위이다.

<카페 느아르>에 대해서는 몇 개의 글을 기획 중이다. 정성일 감독에게 인터뷰 약속을 받아 내었고, 아주 길고 집요하게 인터뷰를 해 볼 생각이다. '문어체 네이티브스피커'인 정성일 감독에게 그런 깜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지나친 뻘소리만 아니라면, 이 분은 아주 친절하게도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 주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감독님 이전에 선생님이다. 그 날이 기대된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권능을 도둑질하는 가짜 선지자들



관점에 따라서는 기껏 말 하나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를 지나친 발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무엇이냐 하면, 목사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 말이다. 국내에서는 꽤 내노라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름 경청하느라 주의깊게 듣고 있었는데, 한 대목에서 나는 그 '목사님'이 '강도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 끝에 일종의 마침 기도 형식으로 뭐를 해 주시고 뭐를 해 주시고 뭐를 곱배기로 주시고 어쩌구 저쩌구 미주알 고주알 주절주절 막히지도 않고 '하나님'께 은총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원하시는게 많으신지. 뭐 그건 한국 기독교가 기복적 성격이 강하고, 어차피 종교라는건 그 나라의 특성에 맞춰 약간의 변형은 겪는다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부담감은 없었지만, 하일라이트는 기도의 끝 말씀이었다. '무엇 무엇 무엇이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에 신자들은 머리를 꾸벅꾸벅 조아리며 하나님, 아버지, 아부지, 주여하고 외치며 화답을하기 시작했다.

연단위에 서신 '목사님'께서는 이순간 교묘한 바꿔치기를 시전하고 계셨다. 자신이 하나님께 갈구한 모든 은원들의 '이루어짐'을 당신이 선언하신 것이다. 제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이라면, '이루어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는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순간, 권능의 주인은 하나님에서 인간 '목사님'으로 교묘히 바꿔치기 된다. 신자들은, 그러한 권능이 자신들의 '목사님'에게 있다고 믿게 된다. 너무 과장된 생각이라고 ? 언어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 되었다. 말은 의외로 큰 힘이 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말은, 그 말의 힘을 일상속에 고착시킨다. 말씀대로 믿게 된다는 말이다. 목사들이 소위 '신학교'라는 곳에서 일종의 '웅변술'을 교육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물론 설교자가 듣는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스킬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목사는 그저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개 인간일 뿐이지, 하느님의 권능을 소유한 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고 가볍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몇 마디의 말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갈취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의외로 많은 목사들이 이런식의 언사를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세치 혀를 놀린다 해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의 주인이 옮겨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언사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볼 때, 이들의 행위는 분명히 강도짓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에 강도가 같이 매달려 있었다던가, 그럼 먼저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신 후에 죽지않고 살아남은 자들만 목사 짓을 하시던가.

매주 '라듸오'를 통해 발표하시는 본인 말씀 몇마디로 대한민국이 들썩들썩 지 맘대로 바뀌길 바라시는 어떤 분께도 물론 통용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할려면 먼저 십자가 부터 지자. (그런데 문제는 이 '어떤 분'께서는 말씀도 제대로 못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눌한 말씀에 이리저리 휘둘리니 더 부아가 치미는건 사실.)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삼청교육대 출동



"제 2 의 삼청 교육대를 만들자"

허태열 최고위원은 “옛날에 일본이나 대만에서 그런 일이 있나보다 하는 얘기를 자주 들어왔는데, 어느덧 우리 사회에 조직폭력배가 손길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돈이 되는 곳에는 다 있다. 피해자들이 누군가 하면 대부분 서민들이다. 정부가 이 토착비리 근절을 위해서 계획을 갖고 있는데 조직폭력배 특히 서민의 민생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조직폭력배 대책은 토착비리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정부가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내부 거래로 주식 부당거래하고 땅사고 위장전입하고 세금 탈루하고 등등등 '돈이 되는' 일에는 빠지지 않는 당신같은 인간들의 당연한 것 같은 그 행동의 '피해자들이 누군가 하면 대부분 서민들' 일텐데, 당신이 이렇게 정색하고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그런일이 있대요. 이렇게 말 하니까 뭔가 좀 오글거리는 기분이고 웃기기는 하는 것 같은데 좀 화도 나는 것 같고 아 이거 참 이상하구나. 허허.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혹은 고난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1609.html

이정환기자의 '삼성전자 최대 매출의 비밀'이라는 글이다. 꼭 삼성전자라는 기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위대한 가카께서 영도하시는 지금도 이런저런 걱정과 짜증이 교차하지만, 진짜 문제는 가카의 임기가 끝나고 영화 <해운대>의 그 이름도 촌스러운 '메가 쓰나미'처럼 반드시 밀려올 것이다. 이명박이 입버릇 처럼 '바람 거셀 때에는 잠잠해 질 때까지 피해가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이 정권의 모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냥 '면피 정권'인 것이다. 그때 그때 눈 앞의 장애물만 임시변통으로 피해가거나, 부숴버리거나.

차기 대권의 주인공이 박근혜가 되든, 정운찬이 되든, 허경영이 되든, 이명박 이후의 정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명박이 싸질러놓은 배설물들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을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미지 하나로 먹고 살아온 박근혜는 차기 대권을 양보하는 척, 대인배인 척 슬쩍 차차기로 미룰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음 정권이 망하든 흥하든 이명박은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 경력에 '대통령 해봤음' 문구를 큼직하게 박아 넣을 것이고,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으며 남은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씁쓸하다.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검은 사람



검은 사람


어느날 사막에서 검은 사람이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언제 마을을 떠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 이쪽 끝에서 다시 저 반대편 끝까지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곤 그들이 살고 있는 곳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은 편의상 검은 사람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오래전 사막으로 떠났고, 지금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처음에 그를 발견한 것은 마을 어귀 바깥에서 덫을 놓고 있던 들쥐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시력이 아주 뛰어났지만 처음에는 자신들이 보는 것이 신기루나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뜨거운 한 낮의 햇살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숙련된 들쥐 사냥꾼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은 자신들의 유일한 사냥감인 들쥐들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살아온 날들 중에서는.

사냥꾼 중 한 명은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검은 사람이 꼭 바다 속에서 일렁이는 검은 해초 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더 이상 이 세계에는 바다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는 나이든 사람들 중 가장 오래 살아온 자도 자신 보다 더 나이든 사람의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냥꾼은 그 표현이 꽤 적절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부분을 강조해서 여러 번 이야기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를 검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말 그대로 검은 사람이었다. 햇빛에 오래도록 노출 되어서 단련된 구리 빛의 피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검음 그 자체였다. 마치 땅에서 튕겨져 일어난 그림자처럼 검었다. 아니 그림자보다 더 검었다. 누구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따가운 한 낮의 햇살도 그의 몸에 닿는 순간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제멋대로 자라난 거칠고 숱이 많은 머리칼과 나무뿌리처럼 옹이진 손가락과 흙을 움켜쥐기라도 할 것처럼 단단히 땅을 딛는 그의 발가락 하나하나가 모두 검었다. 그가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다거나 물을 마시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속속들이 검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마을 사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검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은 그를 어떤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들쥐 사냥꾼들과 함께 마을 입구로 들어선 순간 부랴부랴 시원한 그늘과 물이 있는 집 한 채를 내 주었고 자신들의 호의를 어떻게든 검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과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바깥의 흙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더듬어 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등을 둥그렇게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더듬어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표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표정이 짓는 주름의 그늘보다 더 검었다. 실제로 그가 어떤 표정이나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 있는 집 안쪽의 어둠이 오히려 밝아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 그대로 그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시간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밤새 춥지 말라고 모닥불을 피우고 간단히 먹고 마실 것들도 가져다 두었다. 그가 제발 먹고 마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밤 보다 더 검은 사람 곁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은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피워진 모닥불 보다 더 외로워 보였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 덫을 살펴보기 위해 제일 먼저 일어난 들쥐 사냥꾼은 검은 사람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그는 자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유난히 검고 큰 동공이 새벽 미명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밤에 놓아두었던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어느 하나 손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그 부지런한 들쥐 사냥꾼은 검은 사람이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사이에 밤의 어둠을 양식 삼아 뜯어 먹는다고 상상하기 시작했고,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 부지런한 들쥐 사냥꾼은 검은 사람의 첫 모습을 바다 속 해초에 빗대어 이야기한 바로 그 사냥꾼이었다. 들쥐 사냥꾼들 사이에선 때로 좀 더 긴 이름으로 그를 부르기도 했다. ‘검고 어둠을 먹는 자‘.

그 이야기를 들은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은 그의 출현이 좋은 징조라고 믿기 시작했다. 어둠은 언제나 두려웠고 조금씩이라도 어둠을 먹어치우는 존재가 자신의 마을에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마을에 왔던 저녁 모습 그대로 앉아 있던 검은 사람은 들쥐 사냥꾼이 덫을 놓고 돌보는 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 남자가 유심히 바라보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는지,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 오후부터 검은 사람이 들쥐 사냥꾼들과 함께 덫을 돌보는 모습에서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들쥐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와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완고함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단백질원을 그들이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들쥐 사냥꾼의 일은 세습이 되었다. 그러나 세습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혈육을 통해 이루어 졌다는 뜻은 아니다. 마을에는 가족이나 혈육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자와 나이 적은 자가 있을 뿐이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동료로 받아들이기 적합한 사람을 선출해 내는 것이 그들의 ‘세습’이었다. 그 세습의 과정은 복잡한 훈련과 시험을 거쳐 치뤄졌다. 그렇게 선출된 들쥐 사냥꾼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대접했다. 그러나 그들의 긍지와 자랑, 그리고 약간의 완고함도 검은 사람의 ‘도움’을 떨쳐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검은 사람이 성실하고 뛰어난 일꾼이라는 것은 그날 오후가 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한 낮의 햇볕도 두려워하지 않는 들쥐 사냥꾼들도 잠시 쉬기 위해 그늘과 물을 찾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검은 사람은 쉬지 않고 덫을 돌보고 덫에 걸린 들쥐들을 모아왔다. 새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마을 위쪽에 있는 상수원에서 도랑 작업을 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놓고 검은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땀도 흘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땀도 검은 것 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땀이 솟아오르면 의례히 그러하듯 땀을 훔치거나 손부채질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덫과 덫 사이를 왕복 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식사를 하기위해 들쥐 사냥꾼들이 마을로 돌아간 시간에도 덫을 돌보는 것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을의 나이든 사람들은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에 그 생각을 내지 않았다. 적어도 검은 사람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 믿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늘 속에서 쉬고 있었던 들쥐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조심스러운 논쟁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검은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 질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의 때문이 아니었고 알 수 없는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은 사람을 자신들의 동료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러니까 ‘들쥐 사냥꾼’의 칭호를 그에게 허락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루한 몇 십분 간의 갑론을박이 지나고 내려진 결론은 검은 사람은 그대로 검은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 뛰어나고 근면한 들쥐 사냥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들쥐 사냥꾼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검고 말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들쥐 사냥꾼들은 그 결론에 모두 만족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세상이 멈춰버리는 순간까지 쉬지 않을 것 같은 그에게도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그는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덫을 점검하는 것을 끝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들쥐 사냥꾼들과 검은 사람이 일하던 온종일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묵을 수 있는 집을 새로 지었다. 마을에 온 첫날 그가 묵었던 집은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의 집이기도 했고 마을의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 집은 마을 어귀에 얼마 전 만들어진 경작지 근처에 지어졌다. 그 곳은 땅을 일구는 낮 시간 이외에는 마을사람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검은 사람은 들쥐 덫을 돌보기 위해 마을 바깥에 있었다. 새로 지어진 집에는 누워 쉴 수 있는 침상과 간단한 물건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에 온 첫날 저녁과 같은 자세로 문밖 흙벽에 기댄 채로 등을 둥그렇게 구부리고 앉았다.

밤이 깊어지고 하루의 일을 모두 마친 마을 사람들은 가장 숙련된 들쥐 사냥꾼의 집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검은 사람이 누구, 혹은 ‘무엇’이고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첫 모습을 바다 속 해초로 비유했던 들쥐 사냥꾼은 이번에도 자신의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검은 사람의 정체는 마을사람 중 누군가 오래전 사막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려 죽었는데, 그 그림자만 살아서 돌아온 것일 것이라 말했다. 그는 하루 종일 말없이 그 생각에만 몰두했던 사람처럼 모든 것을 너무도 완벽하게 상상해 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씩 그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아한 구석도 있었다. 검은 사람은 그림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었다. 그림자는 검은색이 아니다. 그림자는 회색에 가깝다. 게다가 그는 땅위의 그림자처럼 평편하지 않고 두툼했다. 지나치게 검고 말이 없고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설득력이 너무 강해서 차라리 상상력 좋은 들쥐 사냥꾼의 이야기를 믿는 쪽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기울어졌다. 그렇게 그가 마을에 온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어젯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들쥐 사냥꾼들은 지금까지의 사냥터 언저리 바깥으로는 덫을 놓지 않기로 했다. 서로가 말로써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사막에서 그림자가 없는 시체를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냥꾼들 중 민감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몇 몇은 실제로 간밤의 꿈에 그림자가 없는 시체를 보기도 했다. 그것은 배가 좌우로 열려서 들쥐들에 의해 내장이 모두 사라진 시체보다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마을에는 매장의 풍습이 없었다. 나이가 들고 힘이 빠져 죽게 되면 마을 상수원에서 가장 먼 사막에 버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죽는 것을 ‘쉼 없는 잠’이라고 불렀다. 쉼 없는 잠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들쥐들의 좋은 먹이가 되기도 했다. 들쥐들은 쉼 없는 잠에 빠진 자의 내장을 가장 좋아했다. 들쥐들이 뚫고 들어가 온갖 내장을 먹어치우고 남은 시체는 배가 홀쭉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들쥐들은 심장만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 속에서 심장은 돌보다 더 딱딱하게 모양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래서 그곳은 ‘돌 심장을 가진 자들의 마을’이라고 불려졌다.

잘 썩지 않는 시체의 텅 빈 뱃속은 들쥐들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다. 들쥐 사냥꾼들은 돌 심장을 가진 자들의 마을 근처에는 절대로 덫을 놓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잡은 들쥐는 공급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었다. 사막 끝에서 거친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마을의 상수원이 말라버리는 건기에는 들쥐들도 땅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돌 심장을 가진 자들의 마을 근방의 쥐들은 건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땅위를 돌아다녔다. 건기에 산자들의 마을에는 먹고 마실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간혹 사냥꾼들이 잡아온 들쥐의 피를 마실 때, 혹은 간단하게 손질해서 구운 고기나 밭에서 거둔 채소를 함께 넣어 끓인 국을 먹을 때 마다 야릇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기분의 정체를 알려드는 마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검은 사람이 마을에 온지도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그 동안 들쥐포획양은 그 전보다 곱절은 늘어났고 지지부진 끝장을 보지 못했던 마을 상수원에서 새로 생긴 경작지 까지 물을 대는 일도 끝났다. 굵은 주먹돌들이 세심하게 걸러진 새 경작지에는 여러 가지 씨앗이 뿌려졌다. 그 땅은 마을 상수원 가까이 있었던 예전 경작지보다 더 기름졌다. 검은 사람은 해가 사라지면 자신의 집 앞으로 돌아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밤을 맞이했다. 이제 마을 사람 누구도 그가 자고 먹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또 그만큼 그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의 가장 나이 어린 사람들이 검은 사람의 거처 주변에서 놀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철저하고 세심하게 금지 되었다. 무엇보다 검은 사람의 심기를 거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게다가 그들에게 가장 나이 어린 사람들은 소중한 노동력의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들쥐 사냥꾼이 되거나 수로를 파거나 경작을 하기에는 아직 모자란 어린 사람이 검은 사람의 거처를 찾아갔다. 그는 이상하게 검은 사람이 사막을 바라보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정말로 사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검은 사람이 몇 되지 않는 별들이 떠오르고 새벽 동 너머로 사라지는 그 시간 내내 사막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의 사막은 파랗고 창백했다. 달이라도 밝은 날은 더했다. 그런 날은 마을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검은 사람은 문득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 주위를 서성이곤 했다. 그 모습은 마을사람들이 알던 낮 동안의 검은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낮 동안 검은 사람은 확신과 근면함으로 단단하게 뭉친 바위처럼 일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고 마을의 가장 숙련된 사람의 손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을 해 냈다. 그러나 푸르고 창백한 사막위로 떠오른 달 빛 아래에 선 검은 사람을 보는 순간 어린사람은 그가 조금 창백하고 투명해졌다고 느꼈다. 아니 그것은 정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검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검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달빛과 사막의 창백한 바람을 머금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어린사람은 마을 사람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다.

세번의 건기가 지나갔다. 이 세계에는 우기가 없었다. 비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건기가 끝나면 마을 상수원에 조금씩 물이 고였고 마을 사람들은 물이 차오르는 것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동안 마을에서 여섯의 가장 나이든 사람들이 돌 심장을 가진 자들의 마을로 떠났고 네 명의 가장 나이 어린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태어난다는 개념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검은 사람의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사람의 곁에 가거나 귀찮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중했다. 그러한 행동이 잔인할 수도 있었지만 낮의 사나운 태양과 밤의 두려운 어둠이 그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요령은 그렇게 잊지 않고 신중함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처럼 잠이 잘 오지 않는 밤 어린사람은 검은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그 날도 밝게 떠오른 달은 사막을 비추고 있었다. 그날따라 사막은 더 파랗고 창백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사막이 오히려 여기 살아있는 자들의 마을보다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밤 나들이를 나섰다 덫에 걸린 들쥐의 비명 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검은 사람이 사막을 바라보고 달 빛 아래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언제부터인가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다시 보기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검은 사람은 언제나 있었던 그 자리에 없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숨어 있던 곳에서 기다렸지만 검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사람은 은신처에서 나와 그의 집으로 다가갔다. 모닥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가져다 놓아두는 먹고 마실 것도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집 안쪽에는 침상과 선반 모서리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어린사람은 검은 사람이 마을을 떠났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정확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검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기가 오고 다시 상수원이 느리게 차오르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검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중 단 한사람 간혹 밤마다 검은 사람의 집을 찾던 어린사람만 빼놓고 누구도 검은 사람이 떠난 것을 궁금히 여기지 않았다. 마을 외곽 새 경작지에 지어졌던 검은 사람의 집은 새로 들쥐 사냥꾼이 된 사람에게 주어졌다. 들쥐 사냥꾼이 된다는 것은 혼자 사는 집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건기가 다른 때 보다 길어진 탓에 돌 심장을 가진 자들의 마을의 거주자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 상수원 너머로 멀리 사냥 탐색을 떠났던 들쥐 사냥꾼 몇 명이 먹을 수 있는 노란 물을 품고 있는 하얀 조약돌을 자루 가득 넣어온 그날 저녁, 어린사람은 꿈을 꾸었다. 아니 그것은 꿈속으로 불려내진 기억이었다. 그 곳에 검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등을 구부리고 앉아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과 귀와 코와 입에서 무언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사람은 그것들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으려고 애썼지만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흘러 내렸다. 어린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런 것이 눈과 귀와 코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꼭 검은 사람 안쪽에 있는 또 다른 검은 사람이 그 구멍들을 통해 바깥으로 넘쳐 나오는 것 같았다. 검은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들이 흐르지 않게 하려는 듯 얼굴을 앙상하고 옹이진 두 손으로 가렸다. 열 개의 손가락과 두 개의 손바닥 틈사이로 계속해서 흘러내린 그것들은 검은 사람이 앉아있는 주변으로 작은 내를 이루면서 사막으로 흘러갔다. 그 때 처음으로 어린사람은 검은 사람이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계속해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그것들 사이로 그가 하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나.는.”

어린사람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다음 밤 날 검은 사람은 마을에서 사라졌다.

집에 함께 잠드는 나이든 사람들은 이미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집안에는 어린사람 혼자였다. 그의 왼쪽 눈에는 무언가 투명하고 작은 것이 맺혀 있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몹시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것을 닦아 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 작고 투명한 것은 왼쪽 눈에서 떨어져 흙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혹시라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간밤의 냉기와 습기가 서려있는 흙바닥을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훑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햇살이 어린사람의 그림자를 문지방까지 길게 걸쳤다. 그 순간. 어린사람은 자신의 그림자가 예전보다 조금 더 짙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집 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세상에서 제일 황량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일 먼저 머리속에 들어온 이미지는 사막에서 돌아온 검은 사람의 옆모습이었다. 그걸 가지고 짧은 산문시로 쓰려고 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이야기가 제 멋대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단편소설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글이 산문시라고 생각한다. 좀 길게 쓰기는 했지만.



2006. 2. 1. 새벽


Arco - Perfect World




이 곡을 듣고 싶어서 퍼플 레코드까지 찾아갔는데, 정작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없었다.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21 grams






21  grams

 도시를 빠져나가는 마지막 열차가 플랫폼을 떠난다 열차를 놓친 사내가 그림자처럼 일렁인다 유리창에 비친 창백한 꿈들이 길게 이명음을 남기면서 사라진다 시야의 맨 먼 가장자리 소실점의 맨 끝. 마침표로 남겨진다 사내의 발끝이 희미하게 지워진다 이제는 정말로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천천히, 육신의 무게를 놓아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