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8일 금요일

신은 우리에게 집을 주셨다

 

The House is Black - 세계의 비참함에 관하여.


Forugh Farrokhzad는 객관적 기록물로서 흔히 알려진 다큐멘터리 장르의 가장 먼 바깥의 영토를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그곳은 바로 다큐멘터리의, 영화의 시원(始源)이기도 하다. Farrokhzard는 <The House is Black>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어떤 지점과 태도에 대한 진중하고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 질문의 해답을 증명해 낸다. 바로 그것은 카메라의 시선, 시선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 질문은 이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과연 정말로 객관적 기록물인가? 다큐멘터리에는 촬영자의, 혹은 감독의 아무런 시선이나 의지,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가?'

<The House is black>은 이란의 외곽에 위치한 나환자촌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신의징벌로 여겨지는 나병환자들. 그들은 같은 인간들에게 버림받았고, 신에게 마저도 버림받았다. 그들에게는 자비로운 죽음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더기를 걸치고, 하루 세끼를 거친 빵과 죽으로 연명해야 할지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에서 소재는 철저하게 응시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그 대상은 철저하게 관람자(카메라)의 시선의 범위와 삶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선의 심리적 안전거리이기도 하다. - 유리창 한 장을 두고 당신은 창밖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심지어는 조롱도 할 수 있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은 얇은 유리 한 장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 그 지점에서야 인간은 온정을 느낄 수 있고, 연민을 느낄 수 있다.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우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Farrokhzard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살점이 뭉텅 거리며 떨어져 나간다. 육체가 썩는다. 어제는 눈이 있던 자리에 오늘 아침에는 컴컴한 동공만 남는다. 괴사한 살을 떼어내도 아무런 아픔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나의 육체인데 나는 더 이상 그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모든 장면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詩의 나레이션과 함께 고스란히 화면 속에 드러난다. 자신이 직접 쓴 詩를 통해 Farrokhzard는 울부짖는다. 신의 자비를 간구한다. 삶의 애통함과 잔인함을 노래한다. 그들은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린다. 한쪽 발목 밖에 남지 않은 다리로 엎드려 절을 하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두 손을 들어 신에게 찬양을 바친다. 그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은 카메라에게,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메라를 정직하게 응시한다. -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 -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에게 일어나는 신체의 붕괴라는 현상‘들'을 통해 세계의 비참을 바라보는 시선의 윤리와 태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들.

한 여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인은 거울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자신의 추함을 빗겨 바라보지 않는다. 이때 시선의 전도가 일어난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면서 동시에 관객인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 안전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당신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전달해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사실 그것에 대한 덧칠로서도 기능한다. 너무도 생생한 사실의 이미지는 값비싼 동정이나 설익은 연민만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극장’ 유의 TV물을 보면서 잠간 흘린 눈물은 당신에게 나의 삶은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준다. 이때, 저쪽 너머 누군가의 비참은 카메라를 통해 한 개인의 안락한 자존을 위한 가상의 교환 가치로 전락된다.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전도, 이상한 전락이다.

일정한 길이의 쇼트들이 인접한 후의 휴지기에 해당하는 쇼트로 (대부분은 3~4 초길이의 쇼트들이 4 개가량 연속 된 후에) 詩의 각운처럼 인서트 되는 일련의 동일한 얼굴들은 모두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개물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자명하다.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응시한다. - 카메라는 매개할 뿐이다. - 그리고 그 응시가 도착되는 곳은 바로 당신이 존재하는 그 자리이다. Farrokhzad 는 계속되는 詩의 나레이션뿐만 아니라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들에까지 詩的인 내적 원리를 새겨 넣는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형식적 아름다움을 구현해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형식적 아름다움을 이루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흔히 추하다고 알고 있는 죽음이 현존하는 얼굴들이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끝'에 도래하기 때문에 적어도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안심을 준다. 죽음이 닥치는 그 순간에 인간이란 존재는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에게 죽음은 시시각각 현존되어지는 현상이다. 영화 속의 얼굴들과 붕괴되는 팔다리들은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 육체의 소유자들은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산자들에게 산다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일깨운다. 산다는 것은 느리고 더딘 소멸의 과정일 뿐이다. 정상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치료와 보호라는 미명아래 사회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는 박탈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집단수용과 관리하의 통제된 삶뿐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에게 찬양을 올린다. 노래를 부른다. 춤을 추고, 아이들은 놀이를 즐기고, 싸우고, 웃고, 울고, 아파하고, 결혼하고, 자손을 남긴다. 삶은 잔인하게도 어디에서든 지속된다.

그러나 Farrokhzad 는 이들의 삶의 시간들을 흔히 취하기 쉬운 온정주의적이고 측은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식사와 치료, 재활운동, 아이들의 놀이(이 아이들은 분명히 그 수용시설의 2 세대일 것이다), 그리고 혼인잔치까지 그 모든 일상들은 정직하게 포착된다. 카메라가 전달하는 이들의 일상의 모습이 품고 있는 힘은 강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일상은 ‘정상인’들의 질병에 대한 허위의식의 속살을 건드린다. 그들이 아픈 것은 그들이 아픈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이 아프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들이 아플 수밖에 없다. 누군가 아프지 않다면, 내가 아파야만 한다. 그래서 반드시 누군가 아파야만 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당연히 사회에서 격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끝을 모르는 폭력적이고 매몰찬 타자화의 논리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과연 그럴 수밖에 없나?) 나약한 우리들 삶의 기저. 누가 병자 인가? 무엇이 정상인가? 만약에, 당신 삶의 안락함이 누군가의 비참함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면 ?

<The House is Black>의 두 개의 학교 장면은 영화를 열고, 닫는다. 그 둘은 대구(對句)를 이룬다. 영화의 앞부분,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앉아 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 신은 자비로우시며 신은 은총을 주신다. 신의 자비는 끝이 없다. 아이들은 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법을 배운다. 그중엔 나병이 발병된 아이들도 있고 아직 발병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적어도 그들은 이곳에서 만큼은 나병 안에서 - 동시에 신 안에서 - 평등하다. 신이 그들에게 나병을 주었고 또 그들에게 삶을 주었다. 아이들은 읽는다. 아이들은 쓰여 진 것을 읽는다. 그 책을 쓴 것은 그 아이들이 아니다. 다시, 영화를 닫는 학교 장면. 교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생은 이렇게 묻는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지?'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하늘, 구름, 꽃, 놀이시간'. 또 선생은 이렇게 묻는다. '추한 것은 무엇이지?'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손, 발, 머리'. 마지막으로 선생은 주문 한다. '집으로 문장을 만들어보라.' 선생의 주문을 받은 사내는 또박또박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렇게 쓴다.

'The House is Black'.

천천히 꾹꾹 눌러쓰듯이. '집.은.검.다.'라고 쓴다. 읽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듣는 것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집은 존재가 기거하는 곳. 삶이 고이면서 동시에 흐르는 곳. 그러나 이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현실에 있어서 아무런 수식도 필요 없이 집은 검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죽음도 삶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에게 ‘검은 집’만을 허락한 정상인들의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물러설 곳 없는 비참함 그 자체다. 그것이 진짜 세계의 비참이다.

신은 우리들에게 집을 주셨다. 그런데, 그 집은 검다.




- 초고는 예전에 쓴 것. 2006 년 2 월 5 일 수정 및 최종 탈고.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