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 또는 빠져나왔던 이야기들

일단 세미나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세미나의 제목은 영화'와' 내러티브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아니다. 영화의 종속 변수로서의 내러티브가 아닌, 병존하는 개념으로서의 영화와 내러티브. 이 두 가지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제목 자체가 하나의 '낚시'였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밀을 밝혀낼 것처럼 오인할만한 소지가, 어쩌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세미나 다 끝내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미나 발제문의 목적은 무언가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세미나의 어원은 라틴 어 'Seminarium'이다. 어린 동물을 사육하는 축사,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일종의 인큐베이터로 의미를 이해해도 될 것이다. 세미나는 무언가를 양육하고, 키워서 그것이 제 발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장소'이다. 만약에 이 장소가 어떤 종류의 개념 같은 것들을 증명하고 선언하(고 선언된 결과를 마치 잘라낸 동물의 목을 벽난로 위에 전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모임을 세미나가 아닌 '컨퍼런스 Conference' 로 불러야만 할 것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이번 세미나의 발제문은 이러한 목적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작성 되었다. 이미 세미나가 끝난 지점에서 이러한 부연 설명은 일종의 사후 약방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혹은 그러려는 의지가 없는 (또는 의지가 희박한) 세미나는 과연 어떤 효용 가치가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에 대한 답은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이나, 혹은 이 세미나 '후기'를 읽게 될 당신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발제문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우연히 안토니오니의 <욕망 Blow Up> 과 <도청 The Conversation>을 연이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DVD가 아닌, 극장 상영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들이 일종의 메타-영화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 그리고 이야기에 관한 영화로서 말이다. 그리고 두 영화는 일종의 탐정영화로 볼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매닉스 님께서는 발제문에서 소재로 삼은 네 편의 영화가 어떻게 장르적으로 탐정영화로서 묶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발제문에 적은 대로, 네 편의 영화들의 구조를 탐정물의 구조 위에 겹쳐놓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탐정 장르의 영화, 그러니까 탐정장르 영화와의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성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에서 포커스를 장르에 두지 않고, 이 영화들의 생김새, 유사성에 맞추어 본다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세미나 발제문을 인용하자면, 탐정영화는 기본적으로 몰락과 하강의 장르다. 이것은 탐정영화가 (세계 대전 후의 미국에서) 잉태된 시기적 특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종 필름 느와르, 갱스터 무비와 동등하게, 혹은 하부(세부) 장르로 구별되는 탐정영화는 폭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주인공을 묘사한다. 탐정은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지만, 사건의 능동적인 주인공은 아니다. 탐정은 진실에 대한 욕구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탐정 행위의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단단하게 감추어진 세계의 표면 뒤로는 인간의 저열한 욕망과 탐욕이 들끓고 있다. 이때 더 이상 진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 중략 -

이제부터 예시하게 되는 세 작품 - <욕망 Blow-Up>, <도청 Conversation>, <마더>는 모두 기본적으로 탐정영화의 얼개를 가진다. 간략히 도식화하자면, 사건이 일어난다 - 주인공이 사건에 흥미를 가진다 -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 결말로 이어지는 구조를 지닌다. 두 작품은 각각 인간의 주요한 감각인 시각과 청각을 소재로 삼는다. <욕망>에서 주인공은 살인 현장을 우연히 촬영하게 되지만, 총소리는 듣지 못한다. - 사진 속 덤불에서 총의 형상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 코폴라의 <도청>은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주인공은 녹음된 소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때 관객이 보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주인공이 눈으로 목격한 일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영화 속 사건에서 철저히 외부자로 남겨지지만, 봉준호의 <마더>는 주인공 탐정-마더가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자라는 부분에서 공통점과 다른점을 가진다.
<도청>과 <욕망>은 히치콕의 <이창>을 그 기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창>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본다. 그리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건을 겪게 되는데,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창’ 너머의 삶으로의 개입이라는 사건이 영화의 주요한 이야기다. <욕망>과 <도청> 역시 각각 사진과 도청의 전문가인 주인공들이 자신의 창작물, 혹은 결과물 속으로 의도하지 않은 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건너감, 그리고 이쪽과 저쪽 세계의 ‘삼투’라는 주제로 볼 수 있는데, 창작자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결국 창작자 자신이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때, 눈으로 본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거칠게 말해서, 탐정장르는 개인의 세계에 대한 인정투쟁을 다룬다. 이러한 개인의 인정투쟁은 그것이 맞는가 틀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보아버린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 행위는 몰락 하는 주인공이라는 탐정장르의 특성상, 기존의 질서나 기득권에 대한 개인적이고 내밀한 저항의 기표가 되기도 한다. 탐정장르의 주인공은 대부분 반영웅Anti-Hero 으로 묘사된다.

히치콕의 <이창>의 주인공은 건너편 창틀 안쪽의 타인들의 삶에 하나 하나 이름을 붙이며 나름의 내러티브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웃들에게 자신만의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창조행위와 유사하지만, 사실 이러한 관계는 그 역으로도 동일하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인) 그는 스크린 이쪽의 관객들에게 보여짐을 당하는 위치다. 이러한 역전은 영화의 말미에 그대로 실현된다.
<욕망>과 <도청>은 전통적인 장르 규칙의 내러티브의 확장과 변용을 통해 장르 자체에 대한 독특한 해석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고민까지 함께 담아냈다. 단순히 ‘장르 비틀기’가 아닌, 장르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통해 탐정영화의 가능성을 궁극적으로 확장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봉준호의 <마더>를 끌어들인 것은 일련의 트릭을 통해 봉준호가 장르와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 사이에 고의적인 균열을 삽입하고, 이러한 반칙에 가까운 전략을 취함에 있어서 다시 한번 복기 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발표를 염두에 둔 발제문 치고는 분량이 많은 것은 발표의 보조 용도로서가 아니라 나중에라도 간략히 정리된 자료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램에서 욕심껏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이에 대해서 매닉스 님께서 '짜집기 한 부분이 많다'고 하신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애초에 이 발제문은 작성자의 생각의 흐름을, 그러니까 이러한 컨셉의 생각들이 왜 가능했었나를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기획이 되었다. 그러니 생각의 '원전'들을 밝히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축과 축약을 해야만 하는 발제문의 특성상, 발췌 한 부분의 개념들의 정확한 설명을 기입하지 못한 것은 작성자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당일날 세미나에 참석했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어차피 앞 부분, 그러니까 여기 저기 자료들을 취합, 정리한 부분들은 길게 설명을 하고 넘어갈 것이라고 미리 야이기를 해 두었던 부분이다. 발제문의 배포가 근 한 달 전에 이루어졌고, 발제문에 원전이 된 책들의 목록을 기재했던 만큼 (의지가 있었다면) 그 기간동안 충분히 읽고 이해할 부분은 이해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기대가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하튼, 서론은 여기까지.
내러티브
내러티브에 관한 개념은 아직도 적확히 정의가 된 것은 아니다. 물론 대략적인 정의, 혹은 ‘합의’는 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내러티브의 개념이나 용법, 생김새는 조금씩 변용되거나 혹은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일단 편의를 위해 우리는 이야기하는 방식, 혹은 이야기 그 자체를 내러티브라고 해 두자. 사실 이번 세미나의 질문은 아주 오래된, 어쩌면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질문이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본다. 그리고 영화도 역시 비슷하다. 그렇다면 영화와 소설의 이야기는, 혹은 영화와 소설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영화는 과연 무엇인가? 영화가 그저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소설과 변별점은 없지 않은가?
미리 이야기하자면, 세미나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발생 시키므로, 영화는 대단하다, 대강 이런 결론을 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극장을 전재로 한). 영화 보기가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구나 동일한 영화를 보지만, 누구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일종의 거름망과도 같다. 김성욱 평론가의 5월 강연회에서 다루어졌던 주제처럼, 영화에서 프로젝션Projection은 스크린 위에만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관객에게 투사되고, 관객을 투과한 이미지는 다시 관객의 바깥으로 투사된다. 고다르가 이야기했듯, 영화는 관객과 스크린 그 중간쯤 어디에 존재 되어지는 것이다 (능동형이 아닌 '되어지는' 이라는 수동형을 사용한 것에 주의).
동일성과 유사성
이러한 영화의 내러티브 방식은 소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다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방식의 유사성이다. 만약 영화와 소설의 내러티브 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같음을 의미하는 '동일' 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복잡한 문제는 끝이다. 그것은 그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더 이상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그것은 죽은 짐승을 저녁 식탁에 올리는 것이다. 게임 끝. 타임 아웃.
그러나 영화와 소설의 내러티브 방식은 유사하다. 유사하다는 것은 일종의 운동, 혹은 움직임, 의식의 흐름, 이동 같은 것들을 유발한다. A와 B 에게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유사성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단히 고착된 의미의 표면 위로 미끄러지는 흔적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흔적들을 우리는 영화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선형적 사고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 부터, 선형적 사고방식은 발견되고, 발전 되었다. 애초에 문자라는 도구는 기록을 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문자라는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의식을 문자 위에, 혹은 문자의 행간에 투영했지만, 그 반대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의식의 한계와 용법이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 대부분이 신체의 연장extension, 보철prosthesis의 개념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문자를 사용하면서 선형적 사유는 인류의 사고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1부터 100까지 혹은 그 너머까지 숫자를 ‘순서대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정리된 역사History를 기억한다. 또는 그렇게 배운다. 어제는 오늘의 앞에 있었던 것이며, 내일은 오늘의 다음에 오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대부분 맨 앞 장부터 맨 끝장까지 ‘차례대로’ 읽는다. 이야기와 생각은 순서에 따라, 일련의 규칙에 따라 정렬된다.

필름의 선형적 운동, 영화의 비선형적 탈주의 시간
그러나 영화에서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선형적 운동에 기반한다. 맨 첫번째 필름의 프레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순서대로 화면에 보여진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극장은 성난 관객들 대부분에게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어리둥절 하지만 돈을 준다니 그래도 좋은 극소수의 누군가에게, 물론 당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환불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규칙이다. 영화의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 그런데 그 순서는 누가 정하는가? 놀랍게도 영화사의 초기에는 편집권이 감독이 아닌 영사기사에게 있었다. (고, 매닉스님께서 흥미로운 지적을 곁들여 주셨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우리는 두 시간 남짓, 혹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관에 앉아, 혹은 홈시어터가 설치된 거실 앞에, 혹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본다. 영화의 속성 중 하나는 (극장 환경을 전제로 했을 때) 영화는 책을 읽는 것처럼 마음대로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자신을 강제하는 환경 속으로 기꺼이 (그것도 내 돈을 내고, 내 시간을 들여서!) 속박을 자처하는 것이다. 여하튼 불은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고, 그리고 끝난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장면들을, 혹은 영화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는 아니다.
영화라는 경험, 그리고 영화와 내러티브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 하나는 모두가 같은 것을 보지만, 누구도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종 영화의 밀도는 관객 개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통과할 때, 더 깊어지기도 한다. 물론 바르트가 이야기한 내포독자의 개념은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경험이 어떻게 문학 작품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선 매닉스 님께서 지적을 해 주셨고, 김시광 님께서 문학의 행간과 리듬, 문학적 구조에 대한 열띤 강연을 해 주셨다. 그런데 너무 흥분을 하셨다. 나는 내가 뭔가 크게 잘못을 한 것은 없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질문; 문학적 경험과 영화적 경험은 내포 독자, 혹은 내포 관객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일 한 것인가? 다른 점이 전혀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어떤 ‘응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김시광님은 영화의 ‘폭발적인 정보량의 홍수’에 대해 이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공감되는 지적이다. 영화의 정보량과 문학의 정보량은 그 양적 차이가 엄청나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화면의 정보가 창작자가 지시하고픈 것, 지시하고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지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꼭 관객 뿐만이 아니라, 영화관의 물리적 환경이나, 공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영화는 ‘위대한 우연의 예술’이다. 감독이, 제작자가, 투자자가 완벽하게 제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도 실수를 하기 바라지 않으며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Cut를 여기서 자를까, 아니면 1.2 초 뒤에 자를까? 이 장면의 촬영은 몇 mm 렌즈를 사용할까, 조명은? 등등등)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제반 작업의 요소들은 어쨌든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고 류태희 님께서 지적해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작업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영화 보기를 더 풍부하게 해 준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에겐 흥미롭고 근사한 경험이다.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경험들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김시광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영화의 압도적인 정보량은 더 많은 층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영화와 문학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숨겨진 말과 단어들
세미나 자료의 맨 마지막 장은 ‘내러티브로 내러티브 하기’라고 썼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표하셨다. 홍은화님께서는 세미나 전에 ‘내러티브로 내러티브 하기를 반박’하는 글을 올릴 생각도 하셨다니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이다. 여기에는 숨겨진 말과 단어들이 있다. 조금 풀어서 쓰자면, ‘(문학적) 내러티브로 (영화적) 내러티브(를) 하기’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기본 개념은 ‘실제 혹은 허구적 사건의 설명’을 의미한다. 재미난 것은, 영화에 있어서 내러티브의 기능은 이야기하기 storytellling이지, 묘사description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영화의 개별 이미지들을 이야기가 아닌 묘사로서, 그것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공감각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연쇄가 비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는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추출을 해 낼때에만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이미지의 공감각적 투사가 있어야만 이야기들의 형성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의 이미지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그저 이미지일 뿐인 것일까? 초기 영화는 연극적 타블로Tableau 혹은 광경Vue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구문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쇼트Shot 에도 이야기는 있다. 사실상 영화는 이야기들의 연쇄를 통해, 그러니까 내러티브를 통해 내러티브를 해 내는 것이다. 이 때, 앞 쪽의 내러티브는 고정된 이야기로서의 내러티브로, 그리고 뒤 쪽의 내러티브는 순간적으로 생성 되어지는. 그리고 다시 소멸 되어지는 현상으로서의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 발제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인용하면서 길고 긴 ‘세미나 후기’를 마무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주제에 관해선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무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작성자의 목적도 아니고 취향도 아니다. 물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작성자의 목적도 아니’기 때문에 발제문에서, 또는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그리고 지금 이 후기를 작성하면서 내가 저질렀을 실수나 잘못된 개념의 설정에 대해 면책 특권을 미리 설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이 저 영화들에 있었다. 혹은 있다. 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세미나를 끌어가는 방식이 장황하고, 널뛰기 하듯 요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이 심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같은 방식으로 결론을 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각자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안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정해진 규칙은 없다.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증명하거나 자랑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문학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다. 내러티브는 이야기하는 기능이며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내러티브와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른 것일까? 그것은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방법적/기능적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문학의 내러티브는 구조적으로 선형적이다. 영화 역시 필름의 물리적 운동과 극장으로의 입장 - 관람 - 퇴장 이라는 조건으로 놓고 본다면 선형적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비선형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영화는 내러티브-하기를 통해 문학 텍스트가 가지는 내러티브 형식의 한계를 더 멀리까지 확장한다. 루이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1926)에서 여인의 눈을 면도칼로 잘라내는 장면은 영화의 속성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이 장면을 눈으로 보면서, 마치 그 장면이 내 눈에 면도날을 들이대는 것 같은 공감각적 경험을 얻는다. 이러한 즉자적 반응은 문학 텍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종종 영화는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거의 직접적인 신체적 감각으로 ‘접속’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순간, 영화는 내러티브를 통해 내러티브-하기를 수행한다.
근본적으로 영화는 수동적인 경험이다. 게다가 관객은 이러한 불편한 환경 속으로 자발적으로, - 그것도 자신의 돈과 시간을 저당잡힌채로 - 구속을 자처한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영사기가 초당 1/24 의 이미지들을 사출 한다. 관객이 스크린을 보는 순간 스크린의 이미지들은 동시에 관객의 내부로 투사projection 된다. 관객의 눈은 카메라이면서 동시에 영사기가 된다. 이때,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야기 되어지기가 아닌, 이야기-하기를 시작한다. 관객은 영화 자체이며 동시에 극장이고, 독립된 개개의 스크린이며, 구경꾼이 된다. 바로, 영화라는 ‘우주’가 탄생되는 순간이다. ‘

이 내용은 영화 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도 동시에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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