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1일 월요일

Intolerence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가 재임용 탈락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홍익대학교의 강의도 (이미 수강신청이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취소 되었다. 뭐든지 '실용'의 잣대를 들이대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강의 취소 사태는 '소비자'인 학생들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대학 측은 이런 사태에 대해서 이미 학칙으로 방어를 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진중권만큼 '잘 팔리는' 강사를 타당한 이유도 없이 잘라버리는 것을 보자면, 이 정부가 '실용과 자율 시장경쟁'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념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비정규직 법에 의거하여. 각 대학의 시간 강사들의 무더기 해임이 예상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시국 선언을 했던 대학 교수들에 대한 세무 조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뭐든지 법대로.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 법과 원칙을 맹목 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눈 앞의 현실을 무시하려는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의 소산이다. 그리고 법과 원칙을 이야기 하려면 그 기준이 누구에게나 적용 되어야 하지만, 또 그것은 용납하지 않는것이 지금 정부의 모습이다.

정부의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인사들에 대한 이러한 합법을 가장한 불법 테러 행위는, 반대로 지금 정부가 얼마나 자신감이 희박한지 반증해준다. 문제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싸워줄 수 있는 민주당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대학 강사, 교수들에 대한 정부의 이번 대응탄압은 분서갱유에 버금가는 사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최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내야만 하지만, 정부는 광장을 틀어막고,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 중에 (정부의 입장에서) 문제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개인은 철저하게 두들겨 패고 있다.

임기 만료 2012 년까지 앞으로 약 3 년. 그 뒤에 과연 우리는 조금이라도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신은 우리에게 집을 주셨다

 

The House is Black - 세계의 비참함에 관하여.


Forugh Farrokhzad는 객관적 기록물로서 흔히 알려진 다큐멘터리 장르의 가장 먼 바깥의 영토를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그곳은 바로 다큐멘터리의, 영화의 시원(始源)이기도 하다. Farrokhzard는 <The House is Black>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어떤 지점과 태도에 대한 진중하고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 질문의 해답을 증명해 낸다. 바로 그것은 카메라의 시선, 시선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 질문은 이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과연 정말로 객관적 기록물인가? 다큐멘터리에는 촬영자의, 혹은 감독의 아무런 시선이나 의지,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가?'

<The House is black>은 이란의 외곽에 위치한 나환자촌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신의징벌로 여겨지는 나병환자들. 그들은 같은 인간들에게 버림받았고, 신에게 마저도 버림받았다. 그들에게는 자비로운 죽음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더기를 걸치고, 하루 세끼를 거친 빵과 죽으로 연명해야 할지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에서 소재는 철저하게 응시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그 대상은 철저하게 관람자(카메라)의 시선의 범위와 삶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선의 심리적 안전거리이기도 하다. - 유리창 한 장을 두고 당신은 창밖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심지어는 조롱도 할 수 있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은 얇은 유리 한 장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 그 지점에서야 인간은 온정을 느낄 수 있고, 연민을 느낄 수 있다.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우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Farrokhzard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살점이 뭉텅 거리며 떨어져 나간다. 육체가 썩는다. 어제는 눈이 있던 자리에 오늘 아침에는 컴컴한 동공만 남는다. 괴사한 살을 떼어내도 아무런 아픔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나의 육체인데 나는 더 이상 그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모든 장면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詩의 나레이션과 함께 고스란히 화면 속에 드러난다. 자신이 직접 쓴 詩를 통해 Farrokhzard는 울부짖는다. 신의 자비를 간구한다. 삶의 애통함과 잔인함을 노래한다. 그들은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린다. 한쪽 발목 밖에 남지 않은 다리로 엎드려 절을 하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두 손을 들어 신에게 찬양을 바친다. 그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은 카메라에게,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메라를 정직하게 응시한다. -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 -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에게 일어나는 신체의 붕괴라는 현상‘들'을 통해 세계의 비참을 바라보는 시선의 윤리와 태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들.

한 여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인은 거울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자신의 추함을 빗겨 바라보지 않는다. 이때 시선의 전도가 일어난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면서 동시에 관객인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 안전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당신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전달해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사실 그것에 대한 덧칠로서도 기능한다. 너무도 생생한 사실의 이미지는 값비싼 동정이나 설익은 연민만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극장’ 유의 TV물을 보면서 잠간 흘린 눈물은 당신에게 나의 삶은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준다. 이때, 저쪽 너머 누군가의 비참은 카메라를 통해 한 개인의 안락한 자존을 위한 가상의 교환 가치로 전락된다.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전도, 이상한 전락이다.

일정한 길이의 쇼트들이 인접한 후의 휴지기에 해당하는 쇼트로 (대부분은 3~4 초길이의 쇼트들이 4 개가량 연속 된 후에) 詩의 각운처럼 인서트 되는 일련의 동일한 얼굴들은 모두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개물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자명하다.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응시한다. - 카메라는 매개할 뿐이다. - 그리고 그 응시가 도착되는 곳은 바로 당신이 존재하는 그 자리이다. Farrokhzad 는 계속되는 詩의 나레이션뿐만 아니라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들에까지 詩的인 내적 원리를 새겨 넣는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형식적 아름다움을 구현해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형식적 아름다움을 이루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흔히 추하다고 알고 있는 죽음이 현존하는 얼굴들이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끝'에 도래하기 때문에 적어도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안심을 준다. 죽음이 닥치는 그 순간에 인간이란 존재는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에게 죽음은 시시각각 현존되어지는 현상이다. 영화 속의 얼굴들과 붕괴되는 팔다리들은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 육체의 소유자들은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산자들에게 산다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일깨운다. 산다는 것은 느리고 더딘 소멸의 과정일 뿐이다. 정상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치료와 보호라는 미명아래 사회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는 박탈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집단수용과 관리하의 통제된 삶뿐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에게 찬양을 올린다. 노래를 부른다. 춤을 추고, 아이들은 놀이를 즐기고, 싸우고, 웃고, 울고, 아파하고, 결혼하고, 자손을 남긴다. 삶은 잔인하게도 어디에서든 지속된다.

그러나 Farrokhzad 는 이들의 삶의 시간들을 흔히 취하기 쉬운 온정주의적이고 측은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식사와 치료, 재활운동, 아이들의 놀이(이 아이들은 분명히 그 수용시설의 2 세대일 것이다), 그리고 혼인잔치까지 그 모든 일상들은 정직하게 포착된다. 카메라가 전달하는 이들의 일상의 모습이 품고 있는 힘은 강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일상은 ‘정상인’들의 질병에 대한 허위의식의 속살을 건드린다. 그들이 아픈 것은 그들이 아픈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이 아프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들이 아플 수밖에 없다. 누군가 아프지 않다면, 내가 아파야만 한다. 그래서 반드시 누군가 아파야만 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당연히 사회에서 격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끝을 모르는 폭력적이고 매몰찬 타자화의 논리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과연 그럴 수밖에 없나?) 나약한 우리들 삶의 기저. 누가 병자 인가? 무엇이 정상인가? 만약에, 당신 삶의 안락함이 누군가의 비참함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면 ?

<The House is Black>의 두 개의 학교 장면은 영화를 열고, 닫는다. 그 둘은 대구(對句)를 이룬다. 영화의 앞부분,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앉아 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 신은 자비로우시며 신은 은총을 주신다. 신의 자비는 끝이 없다. 아이들은 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법을 배운다. 그중엔 나병이 발병된 아이들도 있고 아직 발병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적어도 그들은 이곳에서 만큼은 나병 안에서 - 동시에 신 안에서 - 평등하다. 신이 그들에게 나병을 주었고 또 그들에게 삶을 주었다. 아이들은 읽는다. 아이들은 쓰여 진 것을 읽는다. 그 책을 쓴 것은 그 아이들이 아니다. 다시, 영화를 닫는 학교 장면. 교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생은 이렇게 묻는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지?'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하늘, 구름, 꽃, 놀이시간'. 또 선생은 이렇게 묻는다. '추한 것은 무엇이지?'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손, 발, 머리'. 마지막으로 선생은 주문 한다. '집으로 문장을 만들어보라.' 선생의 주문을 받은 사내는 또박또박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렇게 쓴다.

'The House is Black'.

천천히 꾹꾹 눌러쓰듯이. '집.은.검.다.'라고 쓴다. 읽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듣는 것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집은 존재가 기거하는 곳. 삶이 고이면서 동시에 흐르는 곳. 그러나 이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현실에 있어서 아무런 수식도 필요 없이 집은 검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죽음도 삶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에게 ‘검은 집’만을 허락한 정상인들의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물러설 곳 없는 비참함 그 자체다. 그것이 진짜 세계의 비참이다.

신은 우리들에게 집을 주셨다. 그런데, 그 집은 검다.




- 초고는 예전에 쓴 것. 2006 년 2 월 5 일 수정 및 최종 탈고.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결과적으론) 짜고 치는 고스톱

 

 

 "故김대중 전 대통령 현충원 안치 취소" 소송 제기


사람의 생각이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의 사이에서 발생되는 긴장과 이완의 역학 관계를 통해서 또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게임의 룰, 또는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번 국장을 두고 소위 '보수 단체'의 반응은 극렬했다.

누군가는 이러한 보수단체의 반발이 가카의 지지도를 흔들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개소리다.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보수단체 할배들이 ㅈㄹㅂㄱ을 하면 할 수록 그건 가카에게 도움이 될 뿐이다. 한 쪽에선 극렬 반대, 가카께선 계륵의 모습으로 인자하게 '대통합'을 외치고. 그림 그려지지 않는가. 유치하고 치졸하고 촌스럽다.

 

 

아이폰 포기하자

 

 

 

 

아이폰 나오긴 할까 이번엔 'GPS' 복병


그래, 아이폰 포기하자. 포기하지 않는다고 내가 뭐 어찌 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이쪽으로 가면 저기로 가라하고, 저기로 가면, 요기로 가라하고. 애플도 지치겠다. 낡은 법령 때문에 못 들어온다는데, 그렇다고 법령 뜯어 고쳐가면서 '아이폰 들어오세요' 해 줄만한 정부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고. 맨날 무슨 무슨 수치 들이대면서 대한민국이 IT 강국이라고 하는데, 정작 체감하는건 그냥 촌스런 일등 제일 주의 국가일 뿐이다. 원래 기본 실력 없는 애덜이 스펙이나 숫자에 집착하는데, 딱 그렇다. 공허하고 우습다.


 

 

 

 

가문의 영광



레이소다 대문에 내가 찍은 사진이 올라갔다 ! 가문의 영광이로세 !
기념으로 캡춰. 디씨 식으로라면, '인증' :)





2009년 8월 24일 월요일

후원회 모집중

 

 

 에이미트 회장이 소송비 후원회 결성

값싸고 맛있는 미국산 쇠고기가 팔리지 않은 것은 자신들 탓이 아니라며, 소송을 걸테니 소송비를 후원할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한다. 후원회 이름도 거창하게 '2008 촛불피해 소송비용지원 특별후원회' 라고 한다. 도대체 왜 자신들의 사업 감각이 뒤떨어져 벌어진 일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이 '손해 배상' 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돈 없고 빽 없는 가난한 소비자라도, 질 좋고, 맛있고, 덩달아 저렴하기까지 한 상품을 구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다. 이런 소비자의 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자신들의 후진 사업 감각을 탓할 일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처음에는 값이 저렴했을지 모르지만, 환율로 인해 쇠고기 가격이 뛰어 올랐으니 첫 번째 공적은 강만수 전 재경부 장관에 있고, 미쿡산 쇠고기가 '싸고 질좋다'라고 허위 광고를 한 어떤 분 께서 두 번째 공적을 차지하셔야 맞는 것 아닐까 싶다. 도대체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냉동 되어 있던 고기가 맛있을 수 있다는 발상은 어느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그러니까, 높으신 두 분께는 불경을 치르기 그러하니, 만만한 연예인 들이나 때려잡자 이것이겠지. 그냥 차라리 고추를 떼버리시지.

 

 

Canon G11

 

 Canon G11. 2009 년 10 월 출시 예정

 

 

G10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것 같은데 벌써 G11 이 나온단다. 하드웨어 사양 자체로만 본다면 G10에 회전 LCD 달아주고. 화소 좀 늘려주고, 등등 크게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회전 LCD 하나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이제는

 

 

올해 두 분의 장례식을 치뤘다. 그리고.

 

이제는 기뻐할 일들만 남았다.

 

'29 만원의 행복'을 몸소 실천해 보이시는 분,

주어 따위 없이도 성실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분

그 이외 기타등등. (요즘 '화해' 어쩌구 하고 다니는 분은 기타에 넣어드리겠음)

 

얼마남지 않았다. 거대 여당의 힘을 등에 엎고 재선 삼선까지 '합법적'으로 자리를 보전 하더라도. 어쨌든 당신들에게도 차례는 공평하게 돌아올 것이다. 당신들 차례가 된다면 진심으로 기뻐하겠다. 기쁨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겠다.

 

기다려라.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광화문에 가면 시네큐브가 있(었)다.

 

 

 

광화문에 가면 교보 문고가 있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것이 중학교 시절이었다. 광화문에 가면 큰 서점이 있는데, 거기 가면 엄청나게 많은 책 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생 꼬마 혼자 물어물어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그리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갈급증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여기에 살고 싶다. 출판사 사장 딸과 결혼이라도 할까. 아니야, 돈이 있어야 해. 돈이 많으면 뭐해 책을 읽어야 한다. 읽어야 해. 서점 직원이 될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왔던 용돈을 깼다. 읽고 싶었던 시집과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탐욕스런 웃음을 흘렀다. 이제부터 이 책들은 ‘내 것’이다. 꼬박 5 개월을 모은 용돈 십 몇 만원이 모조리 날아갔다. 그래도 행복했다. 뿌듯했다. 돌아오는 버스는 일부러 남산을 한참 돌아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골라 탔다. 차창으로 여름 오후의 햇살이 뽀얗게 부서졌다.

 

광화문에는 시네큐브도 있다. <로보캅>과 <람보>와 <백투더 퓨처> 말고도 또 볼 만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그 영화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나는 배웠다. 맨 처음 시네큐브를 찾았을 때, 광화문 교보문고를 처음 찾았던 중학생의 어지럼증이 다시 불현듯 기억났다. 몸이, 그 때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다. 넉넉하지 않았던 학생시절 그래도 꼭 챙겨보던 로드쇼와 키노에서 글로만 ‘읽었던’ 영화들을 진짜로, 퀴퀴한 골방 같은 시네마데크들의 화질 좋지 않은 비디오 테잎 화면이 아닌 진짜 영화로 만날 수 있는, 그것도 이렇게 근사한 공간에서 우아한 사치를 부릴 수 있다니.

이제 백두대간이 광화문 시네큐브의 운영을 중단하게 된다. 극장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기업인 태광 기업 쪽에서 시네큐브의 운영은 계속 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어쨌든 공간은 남겨 진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진심으로 아쉽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영화는 공간을 채우는 기억이다.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지만, 우리는 눈으로 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어루만지고, 체감한다. 그 모든 기억들과 시간들. 불이 켜지면 그 기억들은 다시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동행한 이와 소곤거리며 나누었던 대화 속에, 때로는 혼자 찾았던 조금 외롭지만 고즈넉했던, 나와 당신의 기억 속에 남는다. 공간의 주인은 바뀌겠지만, 그 기억의 주인은 바뀌지 않는다. 백두대간과 함께 했었던 시네큐브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들도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영화 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 동시 게재.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fascinus

fascinus

fascinus는 그리스어 phallos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그리스어 phallos는 남성의 자지를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phallos / fascinus는 '남근상'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남성의 몸에 부속되어 있는 기관으로서의 자지가 아닌, 숭배의 대상이며, 젠더적 관점에서의 남성의 '자지'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며 신화학적 맥락에서 남근상에 더 가깝다.

 

'매혹'을 의미하는 fascinatio는 fascinus에서 파생된 단어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외설적인것은 동시에 매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더 정확히 이야기해서, 외설적인 무엇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혹의 감정을 초래한다. 여기에서 '외설'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기준에서의 어떤것이 아닌, 그것을 보는이, 그 앞에 서는 이로 하여금 어떤 형태로든 욕망의 움직임, 혹은 전이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현상을 의미한다.

 

파시즘 fascism의 기저에는 매혹fascinatio이 반드시 존재한다. 매혹은 종종. 개인의 시선과 사고하는 방식을 단 하나의,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단일한 어떤 것으로 집단화fascio한다. '결속' 혹은 '집단'을 의미하는 fascio는 이제는 경멸적인 관용어가 되었다. fascio라는 단어가 이렇게 쓰이게 되는 배경에는,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실체는 전혀 없는) 집단과 그 집단의 일원이라고 한 치의 의문도 없이 믿고 있는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환시체계가 존재한다.

 

개인과 집단. 그 사이에 등호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은 종종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크기이던, 혹은 어떤 형태이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은 집단이라는 이름과 형태로 응집이 가능하다. 그렇게 모여든 개인의 힘은 때로 큰 힘으로 뭉쳐져서 의도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단의 힘은 그대로 개인에게 전이되거나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개인은 '집단의 이름'으로 그 힘의 개인적 전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개인과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환시체계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떤 집단에나 명분은 존재한다. 이러한 일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종교, 기타등등의 가치를 내걸고 명분은 성립될 수 있다. 명분이란 언제나 중립적인 가치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명분이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름 안쪽으로 복속 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순간 발생된다. 예를들어 '정의가 우리에게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의라는 개념, 혹은 가치체계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는, 그 의미를 근본부터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정의, 혹은 어떤 가치, 어떠한 이상 같은 것들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끝. 인간이 가질 수는 없지만, 인간이 그것을 끝내 성취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어야 한다. 그것은 눈 앞에 있으면서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그 상태로 놓아둘 때, 성립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은 계속해서 갱신되어야만 하는 어떤 태도일뿐이다.

 

진정한 매혹fascinatio이란, 무언가를 보았을 때, 무언가를 느꼈을 때의 그 감정같은 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 어떤 울림으로 남겨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본것이, 내가 느낀것이 나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 수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는지 깨달아 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매혹의 이름이다.

 

note.

 

 

아리스토텔레스. “상상의 이미지가 없으면(aneu phantasmatos) 사고할 수 없다(noein)." 그는 덧붙여 환상이 없으면 기억도 없다고 말했다(『기억에 대하여』, 449b). 라틴어 simulacra는 그리스어 eidola뿐만 아니라 phantasmata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 라틴어 단어 imagines는, 선조들이 사망하면 바로 그날 후손들이 그들의 입술에 청동 거울을 올려놓고 그들의 얼굴을 화폭에 그리거나, 점토에 그려 굽거나, 밀랍에 새긴 다음 현관 홀의 작은 찬장에 보관하던 두상을 가리키던 말이다. 프랜시스 예이츠는 고대 구전문학에 적합했던 인위적 기억술에 관한 연구를 했다. 키케로 이후 거의 두 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는 여전히 기억을 하나의 건물, 즉 그 안에 인위적으로(artificiellement, 라틴어 artifex는 화가를 의미한다) 놓인 물건들을 찾으려고 구석구석 살펴보는 건물처럼 여겼다.

 

  로마의 집들은 우선 책이고 그 다음으로 기억이었다. 로마에서 집에 들어가는 것은 ‘책의 페이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고 ‘비망록(memorandum)'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공화국 말기에 키케로가 했던, 우리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다음 단언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야 한다(『헤레니움 가(家)에게』. IV, 『웅변에 대하여』, II). “왜냐하면 그 장소들은 초칠을 한 얇은 서판(書板)이나 파피루스와 아주 흡사하고, 물건들의 이미지들은(simulacris)은 글자들(litteris)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배열과 배치는 글쓰기와 유사하다. 연설을 하는 행위는 독서에 비견될 수 있다.”

 


- 파스칼 키냐르, <섹스와 공포>, 문학과 지성사

 

 

 

 

이명세의 M 에 관한 짧은 노트

 

영화의 이미지는 필름의 기억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연속되는 이미지들은 필름의 불연속적인 기억들이다. 여기서 기억들은 기억-들로 띄어 읽을 수 있다. 이 기억들은 단일한 하나의 (군체로서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으로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를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기억-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명세의 신작 <M>은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기억한다는 행동이다. ‘행위’가 아니라 행동이다. 사변으로서의, 의식의 움직임으로서의 행위가 아닌, 하나의 존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운동하게 되는 행동이다. 기억은 존재를 구축한다. 현재는 기억이라는 행동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초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에서 만난 성우(임원희)와 민우는 장난처럼, 혹은 진담처럼 서로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기억은 한 존재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체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나’라고 말한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당신은 ‘기억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한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망각과 같은 축을 공유하는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억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맨 먼저 망각을 깨달아야만 한다. 영화 속에서 민우(강동원)가 어렴풋이 자신을 뒤 쫒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 그 순간, 그를 둘러싼 공간은 무정형적인 망각의 이미지들이 교차되는 공간으로 변형된다. 그가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존재를 느낀 그 순간부터, 영화 속의 시간과 공간은 중첩되고 되풀이 되면서 변주된다. 출판사 직원과 만나는 횟집의 벽의 창, 혹은 액자는 다른 방을 비추면서 동시에 내부를 바깥으로, 다시 바깥을 내부로 불러들인다. 이 단순한 치환을 통해 시간은 되풀이 되거나, 행동들이 되풀이 된다. 민우의  집은 중첩되고 흐릿한 반영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넓은 공간을 구획하는 것은 투명하지 않은, 그 위에 반영을 비추면서 그 너머의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흐릿하게 투영하는 유리벽들이다. 이 공간들을 가로지를 때, 민우는, 혹은 미미는, 혹은 은혜는, 그림자이면서 서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처럼 변형된다.

 

이 영화를 두고 단순한 내러티브를 중언부언,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해요?’라는 대사가 나오고 있는데도 이 영화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 하는 것과 같다.

 

 

침묵의 음악

 

 



















'먼 데서 들려 오는 듯이'라는 지시어는 가장 내밀하며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듯한 음악들을 지칭한다. 우리 안에 있는 음악은 세상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무엇이다. 황량하고 벌거벗은 세상조차도 아닌, 그것은 세상의 부재이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p180, 동문선 현대신서. 2002

Glenn Gould : Bach - Keyboard Concerto No.1 D minor BWV 1052
지휘 : Leonard Bernstein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국장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할 수 있다.

 

1.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자

2.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

 


법치 좋아하는 윗 분께서는 뭐든 본인 임기내에 처리하시길 좋아하시니,

위 조항도 반드시 '임기 내에' 실행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쁜 마음으로 국화 들고 찾아 뵙겠슴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

 

 

 

 

김대중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

 

 

 

 

 

 

요즘 읽고 있는 책

 

그저께 배명훈의 <타워>를 끝내고 간단한 독서 후기를 쓰고, 계속해서 다른 소설들을 읽어 나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 호흡을 길게 끌어서 인문학 쪽으로 방향을 틀것인지 살짝 고민, 결정은 조르쥬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로 낙점.

 

- '인문학' 이라니 일주일에 2-3 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어야 어디가서 방구라도 낄 만한 '지적수준'이 되는거라고 일갈하신 어떤 분이 생각난다. 목욕을 하고 난 후 소장을 쓸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그 순간 이 분은 엑스타시를 느끼시는 것 같다.

 

- 이 사람보면  하루키 소설에서 런던 타워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하는 (런던 타워인지 어딘지는 책을 읽은지 기억이 멀어서 불분명) 캐릭터가 생각난다. 그런데, 그 캐릭터는 귀엽고 순진한 구석이라도 있지. 넓은 이마에 꼬불거리는 앞 머리와 노려보는 듯 위로 치뜬 눈은 암만봐도 평범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 이 분을 놓고서, '아젠다 설정 능력이 비범하다'고 좋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냥 어디에 이름 석자를 꾸겨 박아야 하는지 잘 아는 생존 본능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그러니까, 그냥 개새끼란 말. 서울대 나오고 학력이 좋으면 뭐하나. 하는 짓이 찌질하고 더러운데.

 

- 이런 종자들 치고 소위 '스펙' 안 따지는 놈들 없더라. 지들이 믿을게 그거 밖에 없거든.

 

- 물론 주어는 없'읍'니다. (아 씨바 비겁해)

 

여하튼, 본론으로 들어와서. 책을 읽을 때 역자 서문이나, 해설 같은 것은 잘 읽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면 아는대로. 서문이나 해설을 읽으면 왠지 훈수를 '당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당장은 잘 모르던 부분들도 마음에 담아 두다 보면 어느 날, 어느 순간 불현듯 개념이 딱 하고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런 즐거움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읽지 않은 서문이나 해설 부분 들만 모아도, 책 몇 십 권은 나오지 않을까. 언제 날 잡아서 읽지 않았던 나머지 부분들을 찾아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감벤은 여기저기서 '난해하다'고 해서 잔뜩 쫄았었는데, 의외로 술술 잘 읽힌다. 개념 자체는 어려운 것은 맞지만, 말을 어렵지 않게 풀어간다. 이런 책. 이렇게 쓰는 사람 좋다.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2009년 8월 16일 일요일

[타워] 어디에나 있는, 그러나 이 땅 위에서만 가능한 농담.

타워타워 - 10점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장편 소설인줄 알았는데, 연작 소설이었다. 674 층의 초고층 '타워 도시국가'인 빈스토크Beanstalk에 관한 소설 <타워> 말이다. 좀 더 촘촘한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권투로 치자면 펀치가 묵직한 인파이터 스타일을 대비했는데, 스텝이 날렵한 아웃 복서 스타일을 링 위에서 만난 느낌이랄까.

<타워>는 굉장히 보편 타당하면서, 동시에 특수한 내용의 소설이다. 이제는 알려질대로 알려진 권력의 속성을 재치 넘치는 필치를 통해 풀어가지만, 동시에 현재의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기시감 같은 것이랄까. 2008 년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당시에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경들을 보면서 고대 보병 전술을 시위에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것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심각해지면 지는거다' 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요즘에는 '심각해지면 잡혀간다'로 바꿔도 될 만큼, 말 좀 편안하게, 맘대로 할만한 시대가 아닌것 같다. 요즘은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풍자 소설'을 그나마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이 소설의 풍자 감각은 최고다. 조금 옮겨 적어 보자면 이런 식이다.


"아 진짜, 황 박사님. 그렇다고 이런 걸 사 오시면 우리 꼴이 우스워지잖아요. 몰약沒藥은 좀. 그거 때문에 우리 선물까지 이상해지 잖아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금반지랑 향수랑 몰약이 뭐예요. 게다가 박사가 세 명이야.." - 첫 번째 이야기, '동원 박사 세 사람 - 개를 포함한 경우' 중에서.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테리 프래쳇과 닐 게이먼이 함께 쓴 <멋진 징조들 Good Omens>를 읽었다. 다음 읽을 책으로는 배명진의 <타워>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두 작품 모두 SF 소설이어서가 아니다. 사실, 배명진의 <타워>를 SF 소설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 소설은 아픈 농담 같은 소설이다. 푸하하 큭큭큭 웃지만, 하아... XX(자체검열) 그게 내 이야기야. 하게 되는 그런 농담 말이다.

P.S 근데 '광장의 아미타불' 에피소드는 에미넴의 노래 'Stan'의 형식을 차용한 것 아닌가 싶다. 표절이니 어쩌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절묘하고 재밌다는 말이다.



http://slowland.textcube.com2009-08-16T13:40:530.31010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Tokyo ! - 흔들리는 도쿄




Tokyo ! - 흔들리는 도쿄

도쿄가 흔들린다. 장롱 밑에 들어가 있던 쌀알처럼 집 밖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흔들림이 멈춘다. 사람과 모든 것들이 잠시. 순간과 영원의 짧은 만남. 그러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부동 자세로 있던 사람들은 주섬주섬 다시 자신의 집을 찾아 돌아간다. 그리고 사내는 집안으로 돌아가려는 여자의 ‘버튼’ 을 누른다.

(어쩌면) ‘이제서야’ 사랑을 발견한 남자와, 이제 막 집안에 틀어박히려는 여자의 사정. 그러니까 이것은 히키코모리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히키코모리가 다른 히키코모리를 만나려면 집을 찾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자신의 집을 버려야만 한다. 익숙하게 입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만 한다.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접촉’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는 집안에 틀어 박힌지 10 년이 지나 11 년째를 접어든다. 그는 매주 목요일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다. 그녀는 피자를 배달한다. 매주 남자의 집에 찾아 간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난다. 여자는 지진에 혼절한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남자는 깨워야만 한다. 지금 남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타인과 ‘접촉’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작은, 그러나 엄청난 용기다.
 
‘배달하는 사람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돈을 건네고, 물건을 받는다. 간단하다. 전화와 돈만 있으면 모든것이 해결된다.’

절대로 타인과 눈을 맞추지 않았던 남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박스 너머로 보인 그녀의 가터벨트이다. 에로틱하거나 유혹적이지 않은, 한 쪽만 수줍게 드러내 놓은 가터벨트는 남자의 눈길을 여자의 얼굴로 끌어들인다. 허벅지에서 얼굴로.

남자에게 타인은 돈을 건네는 손, 그 밑으로 보이는 신발, 그 신발 위에 얹혀져 있는 다리 같은 것들. 그 맨 위에 어떤 얼굴이 달려 있는지는 이 남자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은 그저 하나의 도구, 그를 빼 놓고도 무심히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메타포일 뿐이다.

여자의 도발은 귀엽기까지 하다. 우연처럼, 여자와 남자의 눈길이 허공에서 잠간 만난다. 그 순간, 도쿄가 흔들린다. 집이 흔들리고 도로가 흔들리고, 쌓아 놓은 책들이 무너진다. 남자와 여자. 이 둘을 둘러싼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눈길이 만나고 피부가 만난다. 타인을 만지는 행위를 통해 그가 거기에 있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것은 나의 경계를 타인을 통해서 비로서 확인 하는 것이다. 타인은 당신의 거울이다. 그 거울에 당신은 자신을 비추어 볼 수도 있고, 당신을 만져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과의 접촉을 피해 집안으로 틀어박히는 것은 자신을 바라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여기 있음을 확인 하지 않려는 것이다.

남자는 집안 곳곳에 편재 遍在함으로서 부재不在한다. 오프닝에서 집안을 유영하듯 돌아다니는 카메라는 화장실에 있던 남자가 어느새 거실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또 뒤돌아 서면 주방에 선채로 식사를 때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집 그 자체이다. 집을 옷처럼, 피부처럼 입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집은 익숙한 자궁이고 풍족한 무덤이다.

깨어난 여자는 집안을 둘러보며 말한다. “완벽해.” 남자의 세계는 여자의 틈입으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흔들리고, 굴러떨어진다. 어쩌면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사랑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은유는 순진하고 뻔하다. 그런데 봉준호는 이런 폭신폭신한 사랑 이야기에 세기말의 풍경을 슬쩍 겹쳐 둔다. 그리고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마음 먹은 것처럼 보인다.

이 세기말의 풍경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세계에서 흔히 보아왔던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가는 길에 만나게되는 간유리 뒤 흐릿하게 지워지는 누군가의 모습은 기요시의 유령과 정확하게 겹쳐진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타인, 그리고 거울 위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이라는, 부지불식간에 다가오는 이러한 깨달음이 몰고오는 파국. 그리고 결국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빈 집과 빈 공장과 텅빈 거리들만 남겨진 세계.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봉준호는 쉽사리 희망을 품지 않는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은, 그는 근면하고 꾸준한 비관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두 형사는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가족은 복원되지 않았다. 이 헛헛한 복수의 감각들.

오직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일념. 남자는 집을 나선다. 햇살이 따갑고 눈부시다.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집 밖으로 나온 남자는 자신을 11 년간 품고 있었던 집을 바라본다. 담쟁이 넝쿨이 집을 송두리째 감싸고 있다.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동물 같다. 집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제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 세계의 끝에 걸쳐져 있는 맨 처음의 절실하고 단순한 감각.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남자와 여자가 (비로소) 만났다는 것.




도쿄 ! (Tokyo!, 2008)

감독 : 레오스 카락스, 미셀 공드리, 봉준호
 




영화비평 전문 웹진 네오이마주에 동시 게재.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네오이마주 9 차 세미나 후기

 

- 후기, 또는 빠져나왔던 이야기들

 



일단 세미나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세미나의 제목은 영화'와' 내러티브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아니다. 영화의 종속 변수로서의 내러티브가 아닌, 병존하는 개념으로서의 영화와 내러티브. 이 두 가지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제목 자체가 하나의 '낚시'였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밀을 밝혀낼 것처럼 오인할만한 소지가, 어쩌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세미나 다 끝내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미나 발제문의 목적은 무언가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세미나의 어원은 라틴 어 'Seminarium'이다. 어린 동물을 사육하는 축사,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일종의 인큐베이터로 의미를 이해해도 될 것이다. 세미나는 무언가를 양육하고, 키워서 그것이 제 발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장소'이다. 만약에 이 장소가 어떤 종류의 개념 같은 것들을 증명하고 선언하(고 선언된 결과를 마치 잘라낸 동물의 목을 벽난로 위에 전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모임을 세미나가 아닌 '컨퍼런스 Conference' 로 불러야만 할 것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이번 세미나의 발제문은 이러한 목적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작성 되었다. 이미 세미나가 끝난 지점에서 이러한 부연 설명은 일종의 사후 약방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혹은 그러려는 의지가 없는 (또는 의지가 희박한) 세미나는 과연 어떤 효용 가치가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에 대한 답은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이나, 혹은 이 세미나 '후기'를 읽게 될 당신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발제문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우연히 안토니오니의 <욕망 Blow Up> 과 <도청 The Conversation>을 연이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DVD가 아닌, 극장 상영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들이 일종의 메타-영화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 그리고 이야기에 관한 영화로서 말이다. 그리고 두 영화는 일종의 탐정영화로 볼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매닉스 님께서는 발제문에서 소재로 삼은 네 편의 영화가 어떻게 장르적으로 탐정영화로서 묶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발제문에 적은 대로, 네 편의 영화들의 구조를 탐정물의 구조 위에 겹쳐놓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탐정 장르의 영화, 그러니까 탐정장르 영화와의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성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에서 포커스를 장르에 두지 않고, 이 영화들의 생김새, 유사성에 맞추어 본다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세미나 발제문을 인용하자면, 탐정영화는 기본적으로 몰락과 하강의 장르다. 이것은 탐정영화가 (세계 대전 후의 미국에서) 잉태된 시기적 특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종 필름 느와르, 갱스터 무비와 동등하게, 혹은 하부(세부) 장르로 구별되는 탐정영화는 폭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주인공을 묘사한다. 탐정은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지만, 사건의 능동적인 주인공은 아니다. 탐정은 진실에 대한 욕구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탐정 행위의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단단하게 감추어진 세계의 표면 뒤로는 인간의 저열한 욕망과 탐욕이 들끓고 있다. 이때 더 이상 진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 중략 -

 



이제부터 예시하게 되는 세 작품 - <욕망 Blow-Up>, <도청 Conversation>, <마더>는 모두 기본적으로 탐정영화의 얼개를 가진다. 간략히 도식화하자면, 사건이 일어난다 - 주인공이 사건에 흥미를 가진다 -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 결말로 이어지는 구조를 지닌다. 두 작품은 각각 인간의 주요한 감각인 시각과 청각을 소재로 삼는다. <욕망>에서 주인공은 살인 현장을 우연히 촬영하게 되지만, 총소리는 듣지 못한다. - 사진 속 덤불에서 총의 형상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 코폴라의 <도청>은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주인공은 녹음된 소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때 관객이 보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주인공이 눈으로 목격한 일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영화 속 사건에서 철저히 외부자로 남겨지지만, 봉준호의 <마더>는 주인공 탐정-마더가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자라는 부분에서 공통점과 다른점을 가진다.

<도청>과 <욕망>은 히치콕의 <이창>을 그 기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창>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본다. 그리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건을 겪게 되는데,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창’ 너머의 삶으로의 개입이라는 사건이 영화의 주요한 이야기다. <욕망>과 <도청> 역시 각각 사진과 도청의 전문가인 주인공들이 자신의 창작물, 혹은 결과물 속으로 의도하지 않은 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건너감, 그리고 이쪽과 저쪽 세계의 ‘삼투’라는 주제로 볼 수 있는데, 창작자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결국 창작자 자신이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때, 눈으로 본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거칠게 말해서, 탐정장르는 개인의 세계에 대한 인정투쟁을 다룬다. 이러한 개인의 인정투쟁은 그것이 맞는가 틀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보아버린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 행위는 몰락 하는 주인공이라는 탐정장르의 특성상, 기존의 질서나 기득권에 대한 개인적이고 내밀한 저항의 기표가 되기도 한다. 탐정장르의 주인공은 대부분 반영웅Anti-Hero 으로 묘사된다.

 



히치콕의 <이창>의 주인공은 건너편 창틀 안쪽의 타인들의 삶에 하나 하나 이름을 붙이며 나름의 내러티브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웃들에게 자신만의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창조행위와 유사하지만, 사실 이러한 관계는 그 역으로도 동일하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인) 그는 스크린 이쪽의 관객들에게 보여짐을 당하는 위치다. 이러한 역전은 영화의 말미에 그대로 실현된다.

<욕망>과 <도청>은 전통적인 장르 규칙의 내러티브의 확장과 변용을 통해 장르 자체에 대한 독특한 해석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고민까지 함께 담아냈다. 단순히 ‘장르 비틀기’가 아닌, 장르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통해 탐정영화의 가능성을 궁극적으로 확장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봉준호의 <마더>를 끌어들인 것은 일련의 트릭을 통해 봉준호가 장르와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 사이에 고의적인 균열을 삽입하고, 이러한 반칙에 가까운 전략을 취함에 있어서 다시 한번 복기 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발표를 염두에 둔 발제문 치고는 분량이 많은 것은 발표의 보조 용도로서가 아니라 나중에라도 간략히 정리된 자료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램에서 욕심껏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이에 대해서 매닉스 님께서 '짜집기 한 부분이 많다'고 하신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애초에 이 발제문은 작성자의 생각의 흐름을, 그러니까 이러한 컨셉의 생각들이 왜 가능했었나를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기획이 되었다. 그러니 생각의 '원전'들을 밝히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축과 축약을 해야만 하는 발제문의 특성상, 발췌 한 부분의 개념들의 정확한 설명을 기입하지 못한 것은 작성자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당일날 세미나에 참석했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어차피 앞 부분, 그러니까 여기 저기 자료들을 취합, 정리한 부분들은 길게 설명을 하고 넘어갈 것이라고 미리 야이기를 해 두었던 부분이다. 발제문의 배포가 근 한 달 전에 이루어졌고, 발제문에 원전이 된 책들의 목록을 기재했던 만큼 (의지가 있었다면) 그 기간동안 충분히 읽고 이해할 부분은 이해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기대가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하튼, 서론은 여기까지.



내러티브

내러티브에 관한 개념은 아직도 적확히 정의가 된 것은 아니다. 물론 대략적인 정의, 혹은 ‘합의’는 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내러티브의 개념이나 용법, 생김새는 조금씩 변용되거나 혹은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일단 편의를 위해 우리는 이야기하는 방식, 혹은 이야기 그 자체를 내러티브라고 해 두자. 사실 이번 세미나의 질문은 아주 오래된, 어쩌면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질문이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본다. 그리고 영화도 역시 비슷하다. 그렇다면 영화와 소설의 이야기는, 혹은 영화와 소설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영화는 과연 무엇인가? 영화가 그저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소설과 변별점은 없지 않은가?

미리 이야기하자면, 세미나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발생 시키므로, 영화는 대단하다, 대강 이런 결론을 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극장을 전재로 한). 영화 보기가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구나 동일한 영화를 보지만, 누구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일종의 거름망과도 같다. 김성욱 평론가의 5월 강연회에서 다루어졌던 주제처럼, 영화에서 프로젝션Projection은 스크린 위에만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관객에게 투사되고, 관객을 투과한 이미지는 다시 관객의 바깥으로 투사된다. 고다르가 이야기했듯, 영화는 관객과 스크린 그 중간쯤 어디에 존재 되어지는 것이다 (능동형이 아닌 '되어지는' 이라는 수동형을 사용한 것에 주의).



동일성과 유사성

이러한 영화의 내러티브 방식은 소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다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방식의 유사성이다. 만약 영화와 소설의 내러티브 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같음을 의미하는 '동일' 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복잡한 문제는 끝이다. 그것은 그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더 이상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그것은 죽은 짐승을 저녁 식탁에 올리는 것이다. 게임 끝. 타임 아웃.

그러나 영화와 소설의 내러티브 방식은 유사하다. 유사하다는 것은 일종의 운동, 혹은 움직임, 의식의 흐름, 이동 같은 것들을 유발한다. A와 B 에게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유사성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단히 고착된 의미의 표면 위로 미끄러지는 흔적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흔적들을 우리는 영화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선형적 사고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 부터, 선형적 사고방식은 발견되고, 발전 되었다. 애초에 문자라는 도구는 기록을 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문자라는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의식을 문자 위에, 혹은 문자의 행간에 투영했지만, 그 반대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의식의 한계와 용법이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 대부분이 신체의 연장extension, 보철prosthesis의 개념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문자를 사용하면서 선형적 사유는 인류의 사고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1부터 100까지 혹은 그 너머까지 숫자를 ‘순서대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정리된 역사History를 기억한다. 또는 그렇게 배운다. 어제는 오늘의 앞에 있었던 것이며, 내일은 오늘의 다음에 오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대부분 맨 앞 장부터 맨 끝장까지 ‘차례대로’ 읽는다. 이야기와 생각은 순서에 따라, 일련의 규칙에 따라 정렬된다.

 



 

필름의 선형적 운동, 영화의 비선형적 탈주의 시간

그러나 영화에서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선형적 운동에 기반한다. 맨 첫번째 필름의 프레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순서대로 화면에 보여진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극장은 성난 관객들 대부분에게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어리둥절 하지만 돈을 준다니 그래도 좋은 극소수의 누군가에게, 물론 당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환불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규칙이다. 영화의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 그런데 그 순서는 누가 정하는가? 놀랍게도 영화사의 초기에는 편집권이 감독이 아닌 영사기사에게 있었다. (고, 매닉스님께서 흥미로운 지적을 곁들여 주셨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우리는 두 시간 남짓, 혹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관에 앉아, 혹은 홈시어터가 설치된 거실 앞에, 혹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본다. 영화의 속성 중 하나는 (극장 환경을 전제로 했을 때) 영화는 책을 읽는 것처럼 마음대로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자신을 강제하는 환경 속으로 기꺼이 (그것도 내 돈을 내고, 내 시간을 들여서!) 속박을 자처하는 것이다. 여하튼 불은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고, 그리고 끝난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장면들을, 혹은 영화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는 아니다.



영화라는 경험, 그리고 영화와 내러티브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 하나는 모두가 같은 것을 보지만, 누구도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종 영화의 밀도는 관객 개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통과할 때, 더 깊어지기도 한다. 물론 바르트가 이야기한 내포독자의 개념은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경험이 어떻게 문학 작품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선 매닉스 님께서 지적을 해 주셨고, 김시광 님께서 문학의 행간과 리듬, 문학적 구조에 대한 열띤 강연을 해 주셨다. 그런데 너무 흥분을 하셨다. 나는 내가 뭔가 크게 잘못을 한 것은 없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질문; 문학적 경험과 영화적 경험은 내포 독자, 혹은 내포 관객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일 한 것인가? 다른 점이 전혀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어떤 ‘응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김시광님은 영화의 ‘폭발적인 정보량의 홍수’에 대해 이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공감되는 지적이다. 영화의 정보량과 문학의 정보량은 그 양적 차이가 엄청나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화면의 정보가 창작자가 지시하고픈 것, 지시하고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지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꼭 관객 뿐만이 아니라, 영화관의 물리적 환경이나, 공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영화는 ‘위대한 우연의 예술’이다. 감독이, 제작자가, 투자자가 완벽하게 제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도 실수를 하기 바라지 않으며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Cut를 여기서 자를까, 아니면 1.2 초 뒤에 자를까? 이 장면의 촬영은 몇 mm 렌즈를 사용할까, 조명은? 등등등)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제반 작업의 요소들은 어쨌든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고 류태희 님께서 지적해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작업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영화 보기를 더 풍부하게 해 준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에겐 흥미롭고 근사한 경험이다.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경험들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김시광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영화의 압도적인 정보량은 더 많은 층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영화와 문학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숨겨진 말과 단어들

세미나 자료의 맨 마지막 장은 ‘내러티브로 내러티브 하기’라고 썼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표하셨다. 홍은화님께서는 세미나 전에 ‘내러티브로 내러티브 하기를 반박’하는 글을 올릴 생각도 하셨다니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이다. 여기에는 숨겨진 말과 단어들이 있다. 조금 풀어서 쓰자면, ‘(문학적) 내러티브로 (영화적) 내러티브(를) 하기’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기본 개념은 ‘실제 혹은 허구적 사건의 설명’을 의미한다. 재미난 것은, 영화에 있어서 내러티브의 기능은 이야기하기 storytellling이지, 묘사description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영화의 개별 이미지들을 이야기가 아닌 묘사로서, 그것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공감각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연쇄가 비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는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추출을 해 낼때에만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이미지의 공감각적 투사가 있어야만 이야기들의 형성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의 이미지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그저 이미지일 뿐인 것일까? 초기 영화는 연극적 타블로Tableau 혹은 광경Vue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구문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쇼트Shot 에도 이야기는 있다. 사실상 영화는 이야기들의 연쇄를 통해, 그러니까 내러티브를 통해 내러티브를 해 내는 것이다. 이 때, 앞 쪽의 내러티브는 고정된 이야기로서의 내러티브로, 그리고 뒤 쪽의 내러티브는 순간적으로 생성 되어지는. 그리고 다시 소멸 되어지는 현상으로서의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 발제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인용하면서 길고 긴 ‘세미나 후기’를 마무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주제에 관해선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무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작성자의 목적도 아니고 취향도 아니다. 물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작성자의 목적도 아니’기 때문에 발제문에서, 또는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그리고 지금 이 후기를 작성하면서 내가 저질렀을 실수나 잘못된 개념의 설정에 대해 면책 특권을 미리 설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이 저 영화들에 있었다. 혹은 있다. 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세미나를 끌어가는 방식이 장황하고, 널뛰기 하듯 요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이 심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같은 방식으로 결론을 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각자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안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정해진 규칙은 없다.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증명하거나 자랑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문학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다. 내러티브는 이야기하는 기능이며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내러티브와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른 것일까? 그것은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방법적/기능적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문학의 내러티브는 구조적으로 선형적이다. 영화 역시 필름의 물리적 운동과 극장으로의 입장 - 관람 - 퇴장 이라는 조건으로 놓고 본다면 선형적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비선형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영화는 내러티브-하기를 통해 문학 텍스트가 가지는 내러티브 형식의 한계를 더 멀리까지 확장한다. 루이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1926)에서 여인의 눈을 면도칼로 잘라내는 장면은 영화의 속성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이 장면을 눈으로 보면서, 마치 그 장면이 내 눈에 면도날을 들이대는 것 같은 공감각적 경험을 얻는다. 이러한 즉자적 반응은 문학 텍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종종 영화는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거의 직접적인 신체적 감각으로 ‘접속’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순간, 영화는 내러티브를 통해 내러티브-하기를 수행한다.

근본적으로 영화는 수동적인 경험이다. 게다가 관객은 이러한 불편한 환경 속으로 자발적으로, - 그것도 자신의 돈과 시간을 저당잡힌채로 - 구속을 자처한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영사기가 초당 1/24 의 이미지들을 사출 한다. 관객이 스크린을 보는 순간 스크린의 이미지들은 동시에 관객의 내부로 투사projection 된다. 관객의 눈은 카메라이면서 동시에 영사기가 된다. 이때,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야기 되어지기가 아닌, 이야기-하기를 시작한다. 관객은 영화 자체이며 동시에 극장이고, 독립된 개개의 스크린이며, 구경꾼이 된다. 바로, 영화라는 ‘우주’가 탄생되는 순간이다. ‘



 

 

이 내용은 영화 비평 웹진 네오이마주에도 동시에 올려집니다.

 

 

 

2009년 8월 9일 일요일

고양이들은 알리라



2009. 7 월 26 일, 아현동. Canon G10


하루 종일 손님이 눈에 띄지 않자 불안해진 하인이 식사 시간에 방문을 두드린다.
아무 대답이 없다.
살며시 문을 밀자 그의 시 '고양이들은 알리라' 에서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다른 날이 있을 것이고,
다른 목소리가 있을 것이니 ..... "

"..... 너는 혼자 미소지으리.
고양이들은 알리라.
너는 고대의 단어를 들을지니,
그 시절 축제가 끝나면 잊혀지는
옷처럼 지치고 공허한 단어를."



- <거대한 고독> 프레데릭 파작, p300 - 301, 현대문학, 2003 년




G.I Joe : The Rise of Cobra



G.I Joe 를 봤다. 10 살 짜리 남자애가 G.I Joe '인형'을 손으로 들고 피유 ~ ! 쿠슈~! 슈우웅 ~! 하고 노는 그대로 만들어졌다. 시나리오도, 배우들 연기도 딱 그 수준이다. 그렇다고 재미 없다는 건 아니다. 그냥 의자에 푹 파 뭍혀서 10 살 남자애 마음으로 본다면 재미있다.

제일 압권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 시간을 기다려왔어' 하는 투로 준비 해 뒀던 코브라 커맨더 가면을 꺼내 쓰는 the doctor. 스타워즈 광팬 정도 되는 것 같다. 얼마나 마스크가 쓰고 싶었을까. 그 장면에서 미친듯이 웃었다. 최고다.

데니스 퀘이드는 한 마디로 지못미. 이 영화에서 제일 많이 '아숩다'

근데 번역은 좀 그렇더라. 영화가 그렇다고 번역까지 초딩 수준으로 해 놓음 어떻게 해.


가카를 알자



[읽은척 매뉴얼 번외편] 신화는 없다



딴지 일보의 재미있는 기사. 그러나 읽고 보면 사실 재밌기만은 않은 기사. 가카를 알기 위해 가카의 저서를 모두 완독하는 용행을 해냈다. 장하다. 대략 여기저기 네트에서는 가카를 까대고 있지만, 만만치 않게 무서운 인간이라는 내용'도' 있다.

허긴 '평사원' 에서 대통령 까지 정말 초고속 '신분 상승'의 흔치 않은 예를 몸소 보여주시기 때문에 무서운 인간이라는 것에는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냥 이건 개새끼다.


난 이렇게 딱 한 줄로 요약 하고 싶다.

 
역시 주어는 없'읍'니다. 굽신굽신


끗.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자전거는 정직하다.




자전거는 정직하다. 페달을 밟는 자는 자전거의 미덕이 서늘한 정직함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단 한 뼘도, 단 한 순간도, 내 다리의 움직임 없이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체인과 바퀴는 제 자리에서 회전하지만 바로 이 제자리 걸음이 자전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전거는 비틀비틀 쓰러지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맨 처음 자전거를 배우게 될 때, 자전거가 넘어지려는 방향으로 가볍게 핸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겨울 빙판에서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적당하게 미끄러질 줄 아는 감각을 몸 안에 들이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고 팔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우리는 곧잘 넘어지고 만다. 몸이 기우는 딱 그만큼만 몸을 맡길 줄 아는 위태로운 균형의 감각 같은 것을 체득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이라는 것을 아주 조금 배우게 된다. 이 겸손과 긍정의 힘이 바로 자전거를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이렇게 적는다. “자전거를 통해 세상의 길들은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다시 흘러 나간다.” 당신은 길의 일부이면서 전체이고, 동시에 까마득히 먼 소실점이 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 앞에 있으며 또 저 뒤에 남겨진다. 이때 당신은 길고 외로운 흔적을 남기며 지나가는 하나의 점이된다. 자전거를 타게 되면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상대적 개념일뿐, 원래는 중첩되고 동시에 편재하는 하나의 느슨한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된다. 자전거타기는 이러한 중첩된 순간들을 쉼없이 통과하는 행위이다. 당신 앞에 마련된 모든 순간들을 고스란히 호흡하는 행위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걷는 것과 다르다. 길을 걷는 것은 아주 더디고, 주의깊게 길을 맛보는 것이다. 걷는 행위를 통해 길이 가지고 있던 처음의 속도감은 유보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이의 몸위로 길은 쓰여지고 남겨진다. 자전거타기는 길이 가지고 있는 속도감의 기억을 되살린다. 페달과 엉덩이, 손바닥을 통해 길의 감각들은 고스란히 내 몸으로 전달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맛 보는것과 다르다. 길을 체험하고, 그 기억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 때, 길과 나는 다르지 않다. 내가 바로 길이 된다.

자전거 타기에 있어 쉼은 곳 운동이다. 턱 밑까지 심장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같고, 허벅지 근육이 파열 될 것 처럼 괴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그 정점의 순간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은 ‘더 달리고 싶다’는 또다른 치열한 욕망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단순한 중독과는 다른 것이다. 쉼과 운동이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진실을 몸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의 깨달음은 경이롭다.

페달은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페달을 밟는 직선 운동은 자전거 바퀴의 원운동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페달의 원운동은 두 개의 정점을 교대로 순환하는 운동으로 전달된다. 오른쪽 발이 원의 정점에 오르게되면 왼쪽 발은 원의  최하점을 지나게 된다. 두 점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두 개의 힘은 서로를 밀고 당긴다. 두 개의 다른 힘은 자전거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탄 채로 길을 마주하면 어디로도 가지 않고 멈춰 있는 것 같은 길이 사실은 세상 어디로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길은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이 길은 세상 어디에든 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나는 길 위에서 꿈을 꾼다. 이 먼 길들의 끝에는 당신이, 또는 내가, 또는 꿈꾸는 무엇이  반드시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그리하여 나는 그 곳에 끝내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단단하고 소박한 위안을 얻게되기를.



2009년 8월 5일 수요일

모로로



모로로

제닥의 막내둥이 고양이 모로로. 놀러왔다.


광속의 속도로 움직이는 왼쪽 귀. 휘리리리릭 ~







핥핥핥......



'그네' 박근혜

 

 

스텝 꼬인 박근혜, 한계 봉착한 '한마디 정치'

 

 

프레시안의 기사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제껏 잘 해오던 수첩공주 놀이를 끝낼 시간이 다가 왔다는 진단이다. 더 이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없다는 말인데, 기사를 쓴 이는 이걸 거의 확정적으로 못 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박근혜에게는 아직 무궁무진한 정치적 역량 (이라고 쓰지만 꼼수라고 읽자) 이 있다고 본다. 기사에서 '예고' 한대로 박근혜에게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압박이 들어간다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박근혜에게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사를 쓴 분이나, 어느 대학 교수라는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박근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박근혜에겐 '칩거' 라는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잊혀질 때 쯤 다시 쏘옥 하고 얼굴을 내밀겠지. 어찌나 고귀하신지. ㅍㅍ

 

 

 

2009년 8월 2일 일요일

소나기, 제닥, 고양이들





제닥에 있는 모로로. 막둥이. 벌써 이렇게 컸다.






우아한 순이.




졸려 죽겠다. 나비.



- 바둑이는 바쁘신지 알현을 허하시지 않는다.




조용히 해 주세요. 죄송하지만.




홍대 상상마당에서 <퀸 락 몬트리올>을 봤다. 영화 시작전에 이런저런 광고가 나왔다. 옆자리 동행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옆의 여자가 '죄송하지만 좀 적게 이야기 해 달라.'고 말했다 영화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해한다. 공공장소에선 주변을 의식해서 예의있게 작은 목소리로 씨부리란 말이겠지. 그런데 아직 영화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이 여자야. 원칙. 그거 좋은거다. 그런데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에 따라, 방법에 따라 원칙은 사람 때려잡는 망치가 되기도 하고 만사 부드럽게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윤활유도 되기도 한다.

영화 시작하고 30 분 정도 내내 불쾌하고 화가 났다. 왜 이따위 말을 들어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가 어찌나 쪼꼬만 엉덩이를 열심히 흔들어 주시는지 기분이 덩실덩실. 잊기로 했다. 조용히 해 달라던 옆자리 여자는 신났다. 이 명박 스러운 여자야. 조용히 해 주세요. 죄송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