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6월 24일 있었던 네오이마주 6월 세미나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들을 토대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봉준호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후기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태생적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창작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본 한계 내에서만 뭔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때 제일 주의가 필요한 것은 오버하지 않는 것이다.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건 종종 뻘줌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굉장히 값진 경험을 남겨주기도 한다. 특히 생각을 말로 구체화 하는 것은 글로 쓰는 것과는 또 다르다. 말을 하는 그 순간 자신의 생각을 재정립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은 이러한 값진 경험의 시간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지난 6월 24일의 몇 시간들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다.
Prologue
봉준호의 영화들을 거칠게라도 일별 해 본다면 '책임'이라는 주제를 찾게 된다. 물론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왜 당신들은 책임을 지려하지 않느냐'고 질문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러한 풍경들을 묘파하는것에 대부분의 관심을 두는 것 같다. 혹은 그러한 풍경만이 진짜 (블랙) 유머의 소재로 적합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그는 자신이 자라고 보아온 이땅의 풍경들 만을, 자신이 아는 것 만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만을 그리기로 (아직까지는) 작정한 것 같다.
떠밀린남자, 개를 찾아 나서다
<플란더스의 개>의 주인공은 시간제 강사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어한다. 혹은 되려 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가 교수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교수가 되려는 이유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교수가 되면 회사 다니느라 피곤한 아내도 그냥 아내가 아닌 '교수님 아내'가 된다. 더이상 봇짐 장사처럼 떠돌아 다니지 않고 자신만의 안락한 연구실과 자신만의 수업과 학생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시간강사다. 당연히 돈도 별로 많이 벌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바로는, 그는 그닥 돈 좀 있는 집안의 자식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남편된 책임을 통감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교수가 아니므로 사정상 그럴 수 없다는 투로 행동한다. 옹색한 가계의 빈틈은 대부분 아내의 벌이로 메꾼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교수가 되어야만 한다. 지금 남편된 도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못나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교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돈이 필요하다. 교수가 되기 위한 급행열차의 티켓. 이 '티켓'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퇴직을 종용받은 아내의 퇴직금이다. 이 순간, 이 남자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며 자신의 진짜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위치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어떤 시스템, 또는 개인에게 단지 책임만을 강요하는 그 무엇 들. 그리고 아내의 강아지가 사라진다. 교수가 되려는 사내의 못미더운 추격전.

마이너카피의 나라
추격전이라는 테마는 다음 영화인 <살인의 추억>으로 이어진다. 추격전은 누군가 도망치는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추격의 대상이 잡힌다면, 추격은 끝나버린다. 이것은 추격전을 소재로 삼은 <살인의 추억>의 딜레마이다. 범인을 잡을 것인가, 잡지 않을 것인가. 혹은 잡지 '못 할' 것인가.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박두만이 카메라의 정면을 바라 보는 것은 이 추격전의 끝을 스크린 너머로 슬며시 연장하는 것이다. 거기 어딘가. 어두운 그곳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 거기 있어라. 거기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당신. 미치도록 당신이 잡고 싶다.
<살인의 추억>에서 국가라는 거대한 생물은 더 이상 그 구성원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이때 영화 속 연쇄 살인범은 잘라내고 파괴할 수 있는 외우주의 타자가 아니라(<에이리언 Aliens> 시리즈의 발전과 전복이 그러했듯이) 내부의 미세한 균열이며, 나와 닮은 또다른 모습이다. - 이것은 다음 영화 <괴물>로 까지 이어진다. - 사람들은 계속해서 희생되지만,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니, 질 수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인 형사는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다. 조서를 꾸미고, 조서는 결재 받기위한 상부보고 절차를 거친다. 이 서류가 상부로, 상부로, 상부로, 끝도 없을 것 같은 결재 라인을 통과 해야만 비로서 사건은 '성립' 된다. (당연하게도, 서류로 정리되지 못하고, 승인 받지 못하는 사건은 존재 하지 않는것으로 취급 된다. 간단한 예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만 원을 빼앗겼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해 보아라.) 최종 책임자의 승인이 결재라는 행위로 마무리 되지만, 승인에 대한 책임은 다시 '실무자'의 몫이 된다. 사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면 공은 위로 돌려지고 실패에대한 전가는 하부로 더 무거워진채로 남겨진다. (찌꺼기처럼, 먹다 차버린 밥상처럼!) 봉준호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냉소에서 시작된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태생 자체가 합리적인 근대적 책임의 구조를 교묘하게 마이너 카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왠지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누구도 근본적인 책임을 질 수 없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미궁은 하나의미궁. 모든 미로는 중심에서 만난다.⑴
이어지는 <괴물>에서 어른들은 그 누구도 아이들에 대해 책임 지지 않는다. 강두는 맨 처음에 딸이 아닌 다른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뛰었고, 한강 둔치 매점을 '서리'하던 세진과 세주는 돌보아주는 어른이 없는채로 노숙하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연약하고, 그리고 딱 그만큼 강인하다. 강두는 현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무시한다. 강두의 언어는 사회의 안쪽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그게.. 죽었는데, 살아 있어요'. 강두는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두의 행동은 흔한 인정투쟁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현서가 '여기에 있다' 고 말하지 않고, '저 바깥 어딘가에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한민국의 일부분이지만, 누구도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캄캄한 어둠 그 속에 무언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서로를 보듬을 줄 아는 것은 어린아이들 뿐이다. 혹은 어른으로서의 행동을 흉내낼 줄 아는 어른-아이들. 세진과 세주과 그렇듯이, 현서와 세주가 그렇듯이. 그리고 강두가 현서와 세주에게 그러했듯이.
어쩌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어른의 층위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책임에 대한 추궁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책임을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이영화는 슬쩍 내비춘다. 그렇다면 끊임 없는 책임에 대한 근거들을(통화 목록, 서류들, 기록을 위한 모든 기록들) 남겨둘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은 근원 자체가 책임과는 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에 따른 적절한 처방의 제시는 봉준호의 관심사가 아닌 것 처럼 보인다. 다만 초반의 독극물 에피소드에서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삑사리'를 통한 탈주, 그리고 그 탈주들의 중첩이 초래하는 시스템의 균열을 통한 모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이 영화를 반미 영화로 놓고 정치적으로 불온한 영화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선택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정치성은 나와 타자, 자국과 타국의 문제, 혹은 정당과 구호으로서의 정치성이 아닌,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정치적 선택의. 정치적 행동의 윤리성에 관한 정치성이다. 그러니까 삶의 근본적 행동원리로서의 정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미국인 상급자의 명령 역시, 시스템의 범주에서 벗어난 결정이라는 점이다. 분명히 독극물의 처리에 관한 절차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절차를 지킬 의무 역시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기분나쁘고 지저분하며, 귀찮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한국인 하급자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하달된 명령은 정확히 실행 Excute 되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듯이 '괴물의 탄생'을 보게된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를 단지 '반미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영화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두고 '만약'을 말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겠지만, 미국인 상급자의 '명령'에 만약 하급자인 한국인이 은밀하게 항명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올 수 있었을까 ? 명령이 하달 되었을 때, 그 명령의 실무자의 선택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은 그러한 개인의 선택을 시스템적으로 최소화 하는 쪽으로 구축되어 있다. 오죽하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발언까지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과 판단을 최소화하고, 훈련 받은대로, 명령 체계에 따르도록 훈육된 조건 반사적인 인간형. 그리고 이러한 정해진 절차와 규율에 균열을 가져오는 개인의 '선택'이 초래하는 어떤 것들.
그런데 봉준호는 여기에서 또 한번의 비틀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정치적 선택의 행위 역시, 개인의 의지가 그대로 관철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손에서 미끄러지는 화염병, 괴물을 빗겨가는 화살, 이 모든 '삑사리'(까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는 삑사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인상적이었는지 인터뷰 제목은 '삑사리의 예술'로 정해졌다.)들의 총합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의도하지 않았던 균열과 돌출을 유래하게 된다면, 결정과 행동의 문제는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봉준호는 답변을 잠시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주 미약하나마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앞의 삶이 비록 맘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촘촘하게 살아 가는 것. '밥 먹자' 소리에 벌떡 일어나 기꺼이 밥상앞에 앉는 것. 이러한 현재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만들어낸 어떤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아직 가까운 바깥에는 검고 깊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데. 그 누구도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리고 여기, <마더>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봉준호는 <마더>에서 책임의 무게에 절멸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흔히 이 영화에서 모성의 괴물성을 지적한다. '아줌마'라는 비릿한 공용어를 입 밖에 내뱉을때 그 공기가 품고 있는 어떤 기운 같은 것 말이다. 극단적인 클로즈업 쇼트와 익스트림 롱 쇼트를 마구잡이로 횡단하는 이 영화는 그림 같은 들판의 풍경 한 구석에 꼬물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마더'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것은 그저 수사적인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지금 여기의 지형도가 된다.
구치소에 수감된 또 다른 아이에게 '너 엄마는 있어?'라고 질문하는 순간, 마더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불쌍함도, 미안함도 아니다. 이 순간 마더는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아들과 한 밥상에 앉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데, 저 불쌍한 자식 뒤치닥거리 해 주려면 그래도 살아야 하는데, 가슴이 턱턱 막히고 울컥 울컥 내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살아서 약도 챙겨주고 밥도 멕여주고 옷도 입혀 줘야하는데, 아아 잊어야지 잊어야지 잊어야지 춤을 춰야지 춤을 추고 잊어야지.
여기 괴물이 있다. 아니 인간이 있다. 인간이 춤을 춘다. 괴물이 춤을 춘다. 마더가 춤을 춘다. 그녀들이 춤을 춘다.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다. 알주머니 속에서 굼틀거리는 도룡뇽 알처럼 투명하고 찬란하고 불길하고 아름답다. 너무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Epilogue
<마더>에 대한 이야기는 이 쯤에서 줄인다. <마더>는 봉준호 영화의 마침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질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또 다시 ‘책임’의 문제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일백프로’ 장담하지 못하겠다. 이것은 오롯이 봉준호의 선택의 문제인데, 다만, 그의 영화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삼게 된다면, 충분히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봉준호의 촉수는 민감하고 날렵하다. 봉준호는 짓궂고 익살맞다. 재미있는 장난감 앞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잔인하고 순진하고 또 냉혹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주 1)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 7 권 ‘Brief Lives’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