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7일 일요일

밤 눈




밤 눈

 

 

기형도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후울쩍



후울쩍

 

 

돌아오는 길 위에
떨어져 있는
양말 한짝
누가 훌쩍
벗어두고
몸을 던졌나

 

세상사는것
허허롭다고
이 한몸
날리는 것 쯤이야
한짝 벗어두는 것 쯤이야
훌쩍 던져 버렸나

 

호기롭게
몸 날리면서
그래도 혹시
살아있다면
깽깽걸음으로라도
집까지 돌아가야 하니까
남은 한짝
손에 꼭쥐고
그 부끄러움에
그 뻔뻔함에
얼굴 가리고

 

후울쩍.





2005. 5. 20



懷 歸 - 혹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들로의 귀환




懷 歸

- 혹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들로의 귀환

 

 


아아 이제는

이제는 더이상 !
벌떡 일어나 앉아
막막히 가슴을 두드리던
창밖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회색의 젖은 손톱자욱 남기며
흐르는

 

지나간 날들은
기억과 사물들의
무심한 스침으로
끊임없이
돌아온다


고막이 멍해지도록
나를 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새벽의
깨달음

 

 



2005. 5. 16





幻想痛




 

幻想痛

 

 


내가 너를 생각속에 품고 내딛는 걸음마다
알지못하는 사이에 쌓이는 푸른먼지들이
그 만큼 지상의 무게로 너의 심장을 내리누르던 날들
어쩔 수 없이 숨쉬듯 그 날들을 그리워 할때마다
내 손목과 심장위로 자오선을 긋고 지나가는 幻想痛

 

눈 질금 감고 뛰어내리면
지하철 선로위에도 인당수가 생길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푸른 그림자속으로 기울어가는 거리
너를 찾아 새벽 늦도록 서성이던 기억들


이제 나는 너를 생각하는 풍경속에서
내가 지워지기를 꿈꾼다


생각하지 말것
숨쉬지도 말것
걷지도 말것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것.

 

 


2005. 5. 14




바람의 열두 방향





바람의 열두 방향


머나먼 곳, 밤과 아침과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나를 만들기 위한 생명의 원형질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 기다리니
아직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지금
내손을 얼른 잡고 말해 주오.
당신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말해주오, 내가 대답하리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 주오.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A.E. 하우스먼, <슈롭셔의 젊은이>







분홍빛의 까끌한 혀






분홍빛의 까끌한 혀

 

 

 

서걱이는 새벽잠에서 깨어난 방 한구석
분홍빛의 까끌한 혀가
어둠을 할짝이고 있다


그 혀가 핥고 지나간 어둠의 마디들은
뒷꿈치를 슬쩍들었다가

풀쩍이며 떨어져 내리는
바짝마른 회색 가루로 부서져
완만한 삼각형 언덕을 만들면서 조금씩 쌓인다


봄날 나른한 바람의 등짝을 타고놀던 송화가루처럼
속절없던 시간들이 봉인된
검고 메마른 기억들


나는 알고 있다 그 가루들이 사실은
내 안에 쌓이고 있었다는 것을

 

슬쩍 가져간 내 손끝을
잠시 멈칫하지만 익숙하게 핥아 올리는
분홍빛의 까끌한 혀에게

익숙치 않은 내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가루로 만들어주렴.

 

 

 

2005. 5. 3